날씨가 많이 풀렸다.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한 계절과 결별하는 건 어지간히 슬픈 일이라는 걸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하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한 계절을 보내는 숙취의 뒤끝은 언제나 쓸쓸함이었다. 지난 계절의 잔재처럼 마음에 남았던 쓸쓸함은 새로운 계절의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지곤 하지만, 새로운 계절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와 같은, 당연히 있어야 할 긍정적인 기분을 반나마 상쇄하곤 했다. 정월 대보름의 찬란했던 달빛이 짙은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외국인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실감하겠지만 그들과의 전화 통화에서의 주제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석열에게로 좁혀진다. BTS를 배출한 국가에서, 블랙핑크를 배출한 국가에서, 기생충을 제작한 봉준호 감독을 배출한 국가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을 배출한 국가에서 어떻게 윤석열과 같은 미친 작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느냐는 게 그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질문과 함께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엄 성공의 축배를 그들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국회를 향해 달려갔던 그 위대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지켜왔던 일상을 휘청거리며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다 쓰러져가던 경제를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의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체로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p.372~p.373)


작가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썼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한 동시에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짊어지는 동물이기도 하다. 날씨가 풀리고 겨울의 잔주름이 펴지는 시기. 나는 그 쓸쓸함의 숙취를 풀기 위해 산책을 하고 뻐근해진 다리를 욕조 속에 담근다. 그럴 때 나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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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1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굥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꼼쥐 2025-02-16 14:26   좋아요 0 | URL
헌재 재판관들 앞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그런 듯합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지요.
 
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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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도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아는 뉴스 맞춤형 시대가 되고 말았다. 플랫폼이 알아서 영상을 추천해 주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치이념에 맞지 않는 뉴스나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불리한 뉴스는 애시당초 뉴스 취급도 받지 못한다. 정치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추세를 반영하듯 평소 정치 뉴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많은 국민들에게도 강제적으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극단적인 편 가르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업무 외에는 사적인 말조차 건네지 않으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갈수록 개별화되는 플랫폼 알고리즘 속에서 하나의 사안을 두고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콘텐츠는 사라져간다는 것, 도파민 ROI 시대에 뉴스의 가치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정확히 민주주의의 지향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인정투쟁은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주목경쟁은 사람들의 관심 그 자체를 좇는다는 박권일의 지적과 정치인들이 숙성시킬 시간이 없이 콘텐츠의 전반적인 질을 떨어뜨린다는 정주식의 지적 역시 이 가설을 지지한다."  (P.43)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티는 일'을 일컬어 우리는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더욱 갈등을 부추기고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야당과 시민단체를 향해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자신들을 향한 극렬 지지자들에게는 권력으로 비호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효과는 분명했다. 국민들을 이념적 내전 상태로 치닫게 함으로써 피아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12월 3일 그날 밤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고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허약함에 좌절했다. 희망과 좌절을 냉정하게 파악할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그만큼 소중히 키워가야 할 우리 민주주의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이 토론에 없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 없는 비관이다."  (P.397)


2022년 봄 '토론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치유 모임처럼 만나 2025년 1월까지 140여 회의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들. 정주식 칼럼니스트를 비롯하여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 <소수의견>을 썼던 박권일, CBS 뉴미디어 <씨리얼>의 신혜림 PD,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 <한겨레21>의 이재훈 편집장, 장혜영 전 국회의원이 그들이다. 책에 실린 13개의 테마, -'도둑맞은 집중력'과 뉴스의 위기, '죽은 개가 돌아왔어요' 복제견 찬반논란, 양당제를 돕는 중도정치의 역설, 정치인 향한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 인구 문제를 과장함으로써 은폐되는 것들, 카리나는 몇 살부터 연애하면 됩니까?, 진보정치는 왜 망했을까?, 영피프티는 언제까지 젊을까?, 거부권 중독 윤석열 대통령의 심리 상태, 대한민국이 양궁협회처럼 운영된다면..., 사람들이 <흑백요리사>에 열광한 이유,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계엄국과 응원봉,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는 어쩌면 윤석열 정부의 집권 전반에 대한 커다란 이슈들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로서 아쉬웠던 점은 참가한 토론자들의 이념 성향이나 지향점이 매우 유사했다는 것이다.


"이 혼란의 끝에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잇을까. 우리가 겨울에 본 것은 국가적 아노미 상태에서도 질서를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힘이다. 분명한 것은 당연한 미래는 없으며 어떤 세계와 결별할지 어떤 세계와 마주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일곱 논자가 만들고 싶은 미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우리의 여정이 더 나은 공동체를 열어가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전할 수 있길 희망한다."  (p.9 '여는 글' 중에서)


토론 문화가 사라진 자리에 폭력과 증오가 싹트고 있다. 대결과 반목이 일상처럼 꿈틀대는 이 시기에 우리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구심점은 과연 무엇일까? 폭력과 증오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번영의 세계로 이끌어 줄 리는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처럼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세를 불리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그들에게 국가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에도 토론 문화가 되살아나서 좌와 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방안을 찾는 데 골몰하는 날이 올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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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는 없는 말이지만 '눈치'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사전에 따르면 눈치는  '일의 정황이나 남의 마음 따위를 상황으로부터 미루어 알아내는 힘'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눈치를 채다', '눈치가 없다', '눈치가 빠르다', '눈치를 살피다' 등 다양한 표현으로 쓰곤 한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눈치를 살피다'는 '기색을 살피다'와 비슷한 용례로 보기도 하는데, '기색'이나 '면색'보다는 '눈치'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아이템 중 하나가 어쩌면 '눈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직장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사실 '눈치'가 빠른 사람과 일을 하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의뢰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준다면 그보다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일도 어찌 알았는지 결과물을 눈앞에 턱 하니 내놓을 때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을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업무적인 관계에서는 편하고 유용한 사람일지 몰라도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다. 비록 업무적인 관계에서는 부담스럽고 답답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기준에서 '눈치'가 없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전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성향이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한 반면 눈곱만큼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 부류가 그것이다. 물론 전자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이도 사적으로 가까이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까이할 필요가 있지 않고서는 열이면 열 그런 부류의 인간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윤석열'이라고 하겠다. 그는 정말 '눈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인물이다. 재수 없으니 이만 각설하고, 나는 후자의 인간형을 좋아한다. 고집스럽고 때론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상황에 따라 숨기거나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음에는 두고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그(또는 그녀)가 대신해 주었을 때 일견 당황하면서도 속이 다 시원할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말을 뱉음으로써 당사자인 그(또는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나는 그(또는 그녀)를 향해 '당신은 잘못한 게 전혀 없다'고 크게 말해주고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깨를 다독여주거나 거하게 술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끌림의 감정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비록 '눈치'가 없는 인간을 선호하고 신뢰하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가 빠른 인간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날이 추우니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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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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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없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열의 아홉은 그럴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테면 비장애인이라는 특권, 이성애자라는 특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특권, 다문화 가정이 아닌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특권 등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여러 특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른바 '천부특권'을 누리고 살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천부인권론'을 옹호하는 국가가 아닌 '천부특권론'을 강하게 신뢰하는 국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류로 생활하다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별처럼 다른 위치에서 경험해보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평생 그 특권을 모를 수도 있다."  (p.32)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죄야?"라거나 "내가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남들이 나에게 보태준 거 있어?"라는 식으로 항변한다면 뭐라 대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천부인권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날벼락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권리를 관철할 수도 없는 소수자로 태어났다면 말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그들에게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족쇄를 덧씌우는 역할을 할 테지요. 그들이 평생 차별과 소외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p.171)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혹여라도 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자신의 특권에 대해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이런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건 꽤나 위협적인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 걸 뺏는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양보한다는 건 아흔아홉 섬 가진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대가도 없이 한 섬을 내어주는 꼴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할 듯합니다.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던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p.204)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입니다. 게다가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편 가르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는 건 요원한 일인 듯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미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정의의 실체를 믿고 이를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느리지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정의를 믿고 실천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몇 안 되는 누군가에 대한 헌사의 글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천부특권'의 혜택을 받고 자란 내가 새삼 미안해지는 까닭은 누군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침묵'이라는 회색적 언어를 통해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선 채 소수자를 외면해 왔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의의 언어는 다시 쓰여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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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틈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스며든다. 겨우내 난방이 너무 덥다며 불만을 쏟아내던 K 과장도 최근 며칠은 전혀 말이 없다. 간간이 눈이 내렸고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텅 빈 거리를 제 세상인 양  찬바람만 휩쓸고 지나갔고, 나는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내다보다 으스스 몸을 떨었다. 한겨울에도 햇볕이 좋은 날에는 늘 습관처럼 거닐던 인근 공원도 지금은 눈에 덮여 살풍경한 느낌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먹이를 찾는 새들이 포릉포릉 날고 뼈만 앙상한 나무들이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흔한 이어폰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청력 손상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덕분인지 지금도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청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때가 더러 있다. 거리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타인의 전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는 경우, 닭살이 돋을 듯한 사랑의 밀어나 콧소리가 섞인 세 살배기 어린애 말투 등을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사랑 표현에 적극적인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그 빈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유교보이로 자란 나로서는 목까지 차오르는 역겨움을 시시때때로 눌러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적인 전화를 소음공해라는 명목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와 같은 고충이 있다 보니 남들처럼 상시로 이어폰을 사용함으로써 청력을 지금보다 낮추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을 하게도 된다.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있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김애란 작가가 글을 매우 잘 쓰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리고 김애란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매우 공들여 쓰는 작가라는 사실. 작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랄까, 아무튼 갑자기 찾아온 기분 좋은 자극으로 인해 독서의 속도는 마냥 더디게 흘러간다.


"초여름 저녁 개수대 앞에 난 책받침만 한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총총 반짝였다. 다닥다닥 붙은 현대식 가옥 사이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십자가도 한둘 솟은 덕에 네모난 창틀 속 풍경은 그 자체로 고장 난 멜로디카드처럼 보였다. 하늘은 노랑이었다가 주황에서 보라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푸르게 변했다. 나는 산 아래 밀집한 온갖 형태의 집들을 바라봤다.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의 일부만 옮겨봤는데 이처럼 정제되고 감각적인 표현들이 책의 끝까지 내내 이어진다. 물론 작가 역시 자신이 처음 쓴 글에 퇴고에 퇴고를 거쳐 최종 결과를 책으로 내놓은 것일 테지만 나는 작가의 책을 읽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녀가 작가 지망생 시절 겪었을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애틋한 마음으로 어림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길거리를 거닐며 훔쳐 들었던 어느 행인의 전화 내용처럼 가볍거나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몸짓이나 말투는 물론 자신을 스쳐가는 온갖 풍경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붙잡기 위해 그녀가 들였을 땀과 노력에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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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2-0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꼼쥐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산문집의 문장을 읽으면서 그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한 땀과 노력이 느껴진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훌륭한 작가는 그 보다 더 대단한 안목을 지닌 독자로 부터 발견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아 감사 합니다. 뜻 깊은 주말 되세요!

꼼쥐 2025-02-08 12:43   좋아요 0 | URL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라 할지라도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감탄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독자로서 작가를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애란 작가의 솜씨는 새삼 놀랍게 다가온 게 사실입니다. 마힐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