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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없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열의 아홉은 그럴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테면 비장애인이라는 특권, 이성애자라는 특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특권, 다문화 가정이 아닌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특권 등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여러 특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른바 '천부특권'을 누리고 살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천부인권론'을 옹호하는 국가가 아닌 '천부특권론'을 강하게 신뢰하는 국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류로 생활하다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별처럼 다른 위치에서 경험해보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평생 그 특권을 모를 수도 있다." (p.32)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죄야?"라거나 "내가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남들이 나에게 보태준 거 있어?"라는 식으로 항변한다면 뭐라 대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천부인권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날벼락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권리를 관철할 수도 없는 소수자로 태어났다면 말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그들에게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족쇄를 덧씌우는 역할을 할 테지요. 그들이 평생 차별과 소외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p.171)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혹여라도 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자신의 특권에 대해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이런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건 꽤나 위협적인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 걸 뺏는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양보한다는 건 아흔아홉 섬 가진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대가도 없이 한 섬을 내어주는 꼴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할 듯합니다.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던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p.204)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입니다. 게다가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편 가르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는 건 요원한 일인 듯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미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정의의 실체를 믿고 이를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느리지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정의를 믿고 실천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몇 안 되는 누군가에 대한 헌사의 글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천부특권'의 혜택을 받고 자란 내가 새삼 미안해지는 까닭은 누군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침묵'이라는 회색적 언어를 통해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선 채 소수자를 외면해 왔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의의 언어는 다시 쓰여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