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하지 않다는 것은 곧 신기하다거나 독특하다는 느낌을 넘어 때로는 이상한 혹은 싫은 등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발전하기 쉽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만큼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대중이 혐오하는 대상도 얼마든지 친숙하다거나 옳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일반 대중이 옳다고 믿는 어떤 사건이나 대상도 이상한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신념이나 가치 체계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아니라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학습 환경이나 언론의 다양성을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 한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얼마 전 야당의 선대위에 가담했던 한 젊은이(라고 말하기는 나이가 꽤나 들었지만)의 독선적인 자기 주장 내지는 지나친 편견에 대해 연일 이어지던 언론이나 대중의 지적에 대해 나는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깊은 비애를 느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부의 불평등 구조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다. 이런 까닭에 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은 아이의 인성이나 건전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소위 'SKY'로 지칭되는 명문 대학을 향한 외길에 아이를 줄 세우곤 한다. 물론 예외적인 학부모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대부분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도 다양한 책이나 영상을 통해 습득하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대물림받는 게 일반적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해 학교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인성 교육이 웬 말이냐는 투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누군가(대개는 부모님)로부터의 강제적인 세뇌나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곧 자신의 노력이나 가치 판단의 결과로 형성된 것인 양 속단하곤 한다. 인생이 불행해지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인의 생각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거나 그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사고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거나 숫제 없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구 선생에 대해 '국밥 좀 늦게 나왔다고 사람 죽인 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5·18 민주화 운동을 일컬어 폭동이라고 하거나, 긴급재난지원금을 개밥에 비유하거나, 실업급여 수급자를 향해 거지근성이라고 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이와 같은 사고를 지닌 당사자를 그저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는 다만 5·18 민주화 운동의 실상에 대해서도, 김구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해서도, 혹은 가난한 이의 삶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에 대해 그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면에 곪을 대로 곪은 병폐를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우리는 제2, 제3의 노 씨를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편견의 소유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제 사회의 정서와 동떨어진 일본이 끝을 알 수 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서가 그렇게 변해간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동시에 먼 나라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한 명의 지구인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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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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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이 야속한 것은 비단 나 스스로가 늙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의 다정했던 사람들을 속절없이 앗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가까웠던 사람들을 차츰 잃어간다는 건 더없이 슬픈 일이다. 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이것 역시 속절없는 세월과 유한한 생명에 대한 반작용임을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매몰찬 냉대에 대한 티끌처럼 가벼운 한 인간의 무위한 반항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1인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닮은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다채로운 시간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도 많지 않을까.『세월』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신비체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닮은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나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는, 너무도 그럴듯한 상상.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는 타인과 만나고, 한 몸으로는 다 살아낼 수 없는 무지갯빛 시공간을 겪어내는 것은 아닐까. 지구라는 별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롭고, 덜 아프고,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p.282)


정여울의 에세이 <잘 있지 말아요>는 작가가 읽었던, 혹은 보고 느꼈던 수많은 '사랑 이야기'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이자 해석이며, 사랑에 대한 통념과 전문가의 해설을 곁들인 진지한 논평이기도 하다. 작가는 다양한 연관 매체의 지식을 자신의 글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책에 국한하지 않는 독자의 다양한 관심을 아우른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스탕달의 <적과 흑>,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이언 매큐언의 <속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 등 서른일곱 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대한 자신의 지적 경험과 그를 통해 정립된 개인의 사랑관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상처가 스스로 발화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사랑은 매력으로 시작되어 우정으로 승화되고, 마침내 서로에게서 최고의 스승을 발견하는 위대한 배움으로 이어진다. 이미 만들어진 완벽한 사랑의 저수지에 풍덩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거운 돌을 나르고 빈틈을 메워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의 호수를 만들어가야 한다."  (p.323 '에필로그' 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홀로 오지 않는다. 행복과 사랑, 분노와 사랑, 기쁨과 사랑, 슬픔과 사랑, 때로는 엄숙함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에 약방의 감초처럼 사랑이 함께하는 까닭은 혹여라도 우리가 사랑으로 가는 길을 잃었을 때, 다른 감정과 더불어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했던 신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의 전부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소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그 사랑을 통해 그들 주변의 세상을 좀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빛이다."   (p.290)


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왔던 감정. 그 숭고한 역사의 흔적을 우리는 한 권의 책으로, 혹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혹은 감동적인 연극이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눈을 통해 빛 속에 감추어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통해 다채로운 사랑의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그저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눈먼 청맹과니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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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 회사는 물론 친한 친구들도 몇몇이 만나 식사나 한 끼 하는 정도이지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 중 많은 것들이 변하였고, 변하고 있는 중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도 이제는 대면 모임보다는 비대면 모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추세이니 이렇게 몇 년만 지나면 송년 모임은 숫제 우리의 기억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고등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어 잠깐 얼굴을 비쳤었다. 오미크론의 공포 탓인지 많은 친구들이 모였던 건 아니지만 위드 코로나 이전에는 모임 자체를 금했던 터라 열 명 안팎의 인원도 꽤나 많은 듯 느껴졌던 것이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나 느낄 수 있는 반가움과 살아 있다는 느낌은 온라인에서의 난무하는 하트나 과한 사진들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친구들 얼굴을 못 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친구들 각자의 독특한 표정이나 말투, 특유의 제스쳐 등이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껏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들 각자는 자신만의 행동 양식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매번 느끼게 된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으로 인해 그들 내부의 지적 수준이나 교양, 인격 등이 평가되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알게 모르게 평가하곤 하는 것이다. 최근에 언론 보도가 많아진 야당 후보의 화법이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태도를 보면서 이 사람의 지적 수준이 아주 낮거나 무엇인가 숨기고 싶은 게 많아서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질문을 귀 담아 듣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질문의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그의 대답은 항상 횡설수설 명확한 논지도 없이 산으로 향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다른 나라의 정상을 만나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하고 국익에 합당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낸다는 건 처음부터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끝을 흐리거나 논점을 회피한 채 횡설수설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자신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이다. 사람이 솔직하고 자신감이 있다면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명확히 말할 일이지 질문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건 질문자를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삼국지연의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 있나? 특별히 없다면 좋아하는 문학작품이 있느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닥터지바고가 생각난다는 대답 같은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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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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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우리의 의식 표면으로 가볍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각의 주인인 나에게 "이제 좀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허락을 득하는 것은 아니다. 도식적인 경로를 통해 멀리서 다가오는 것도 아닌 까닭에 미리 대비를 하거나 환영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채업자처럼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가 가만히 사라지는 까닭에 '이런 기억도 있었구나.' 재차 확인할 뿐이다. 그런 기억들은 대개 나와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지닌,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이식된 듯한, 전혀 다른 개체의 기억처럼 느껴지곤 한다. 먼 훗날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의 기억 속을 둥둥 떠다니면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갈 것만 같은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어른이 된 지금은 내 딸의 감정적인 혼란과 비틀거림을 용납할 수 없어 짜증스러운 것만큼이나 나는 당시의 내가 낯설고 멋쩍다. 질서 정연하지 않고 안정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버거워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왔던 것처럼, 그리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처럼 내 딸 역시, 아니 이 땅의 모든 여고생들이 성장기란 어두운 터널 속을, 그 감정의 도가니 속을, 그리고 언젠가는 기억에서 멀어져 갈 현재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204 '역자 후기' 중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여고생 시절의 기억들을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소환한다. 물론 나와 같은 남자 독자라면 사정이 다를 테지만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그 시절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1964년생인 에쿠니 가오리의 고교 시절과 완전히 닮은, 판박이의 경험들이 독자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일본이 아닌 한국은 생각이나 배경부터가 다를 테고. 하지만 그 시절에 들었던 생각들, 이를테면 학교생활, 성적, 부모님과의 갈등, 연애나 우정 등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겪는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괜한 오해와 분노, 서글픔,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던 순간들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p.138 '천국의 맛' 중에서)

 

그 시절의 우리는 덩치만 컸지 미처 성장하지 못한 이성의 발달을 탓할 새도 없이 분출하는 감정의 지배하에 놓인 몸뚱어리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난감해하곤 했다. 실수는 다반사였고,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운 바를 다음에는 제대로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이나 결심은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 "그때보다 사는 게 조금 더 편해졌거나 그때보다 더 행복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지금도 만나야 했기에 만났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반년쯤 지나 미요와 다시 마주쳤다. 미요는 밤인데도 교복을 입고 시부야의 센터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앞으로 가로막는 나를 보고도 금방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아뿔싸' 싶어 하는 표정을 짓고는, 헤실헤실 미소를 지어댔다."  (p.195 '머리빗과 사인펜' 중에서)

 

겨울은 왠지 모르게 여름보다 농밀하거나 균질한 시간들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네의 말썽꾸러기들이 친구의 집에 모두 모여 엉뚱한 작당을 하거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거나, 춥고 어두운 거리를 이유도 없이 걷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길었던 밤은 온데간데없고 여느 날처럼 부옇게 해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겨울밤은 매년 조금씩 길어져만 가는 듯하다. 가뜩이나 12월의 밤은 무리하게 길기만 하고, 독서로도 채울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이 부담스러운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르곤 한다. 길기만 했던 겨울밤도 언젠가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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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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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서가를 하릴없이 거닐라치면 마치 우연처럼 프랑스 문학 구간을 스쳐갈 때가 더러 있다. 프랑스의 여러 문학가들 중 나의 시선을 아련하게 사로잡는 인물. 프랑수아즈 사강. 자신의 인생을 열정적으로 탐닉했던 삶의 애호가이자 자신의 선천적인 재능을 물 쓰듯 허비했던 재능 과다 보유자, 나는 사강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천재 작가 사강에 대한 질투이자 그녀의 빛나는 작품에 대한 애증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그녀가 프랑스의 한 TV 풍자쇼에 출연하여 자신을 변호했던 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에 대한 아련한 느낌은 어쩌면 그 말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강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독자가 기억하는 바로 그 말.

 

프랑수아즈 사강의 미발표 유작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아마도 내가 여전히 사강의 애독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04년 사강의 사후 아들인 드니 웨스토프가 발견한 원고를 10여 연간 스스로 엮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는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의 미완성 작품임에도 사강 특유의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체와 파격적인 사랑을 그려 냄으로써 '역시, 사강!'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파니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서로에 대한 정절 속에 있었다. 캉탱이 죽고 난 후 맞는 아침은 결코 그 이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만은 예외였다. 그녀보다 훨씬 어린 장난꾸러기 청년 덕택에 그런 느낌을 다시 맛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두 사람의 나이 차가 얼마인지 정확히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고, 그가 자기 딸 - 그녀의 눈에 어딘가 한참 잘못된 - 의 남편이라는 사실, 사람들이 그 청년을 정신병자로 여긴다는 사실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p.270)

 

프랑스 지방의 재력가인 앙리 크레송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에는 사업가인 앙리 크레송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상드라, 앙리 크레송의 아들 뤼도빅 크레송과 그의 아내 마리로르, 상드라의 동생이자 앙리 크레송의 처남인 필립이 함께 살고 있다. 이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던 뤼도빅은 여러 의원과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결코 회복될 가능성이 없노라는 의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온갖 향정신성 약품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본 뤼도빅의 장모 파니 크롤리는 사위의 그 고통스러운 모습에 눈물을 흘렸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앙리 크레송은 아들을 퇴원시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 뤼도빅은 체력적으로는 완벽히 회복했으나 정신과 치료의 후유증으로 이따금 몽롱하고 정상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원한다는 것외에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마리로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바보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던 뤼도빅을 잊지 않았다. 뤼도빅의 퇴원은 그녀에게 결코 반갑지 않았고, 차라리 우아한 미망인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여 마리로르는 뤼도빅을 공공연히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물론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앙리 크레송은 여리고 착한 자신의 아들이 무시당하는 걸 결코 두고 볼 수가 없었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아들의 건재를 알리려 하는데...

 

앙리 크레송은 사돈이자 아들의 장모인 파니 크롤리를 파티에 초대한다. 최근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었던 파니는 아들이 병원에 있을 때 유일하게 눈물을 흘려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에서 장모가 병원에 있는 사위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뤼도빅의 아내인 마리로르는 물론 계모인 상드라 등 '라 크레소나드'에 사는 그 누구도 뤼도빅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파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 한 번도 피아노 덮개가 열리지 않았던 오래된 피아노를 손보도록 한 파니가 슈만의 사중주를 연주하였고 피아노 선율에 이끌렸던 뤼도빅은 파니의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만다.

 

"그들은 창문과 피아노 사이에 앉아 있었다. 덧문 사이로 비쳐 든 햇빛이 장난치듯 아른거리며 뤼도빅의 매끄러운 머리카락과 파니의 커다란 눈 위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슈만의 고통스러운 동시에 그윽하고 달콤한 곡조를 치는 데 열중해 있었다."  (p.169)

 

'사랑은 병이나 중독과 같으며, 때로 3~4년 정도 그 중독에 빠질 뿐 사랑이 영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강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지금보다 더 관대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사랑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규정하는 까닭에 사랑은 때로 집착으로 변질되어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갔던 사강 역시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1월의 마지막 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더니 퇴근길에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내 손에 단단히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허망하게 놓쳐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휑한 바람이 드나들 것만 같은 느낌.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뼈대를 드러낸 가로수의 살풍경한 모습.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운 11월의 어느 날,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먼 이국땅의 어느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우울했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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