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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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서가를 하릴없이 거닐라치면 마치 우연처럼 프랑스 문학 구간을 스쳐갈 때가 더러 있다. 프랑스의 여러 문학가들 중 나의 시선을 아련하게 사로잡는 인물. 프랑수아즈 사강. 자신의 인생을 열정적으로 탐닉했던 삶의 애호가이자 자신의 선천적인 재능을 물 쓰듯 허비했던 재능 과다 보유자, 나는 사강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천재 작가 사강에 대한 질투이자 그녀의 빛나는 작품에 대한 애증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그녀가 프랑스의 한 TV 풍자쇼에 출연하여 자신을 변호했던 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에 대한 아련한 느낌은 어쩌면 그 말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강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독자가 기억하는 바로 그 말.

 

프랑수아즈 사강의 미발표 유작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아마도 내가 여전히 사강의 애독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04년 사강의 사후 아들인 드니 웨스토프가 발견한 원고를 10여 연간 스스로 엮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는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의 미완성 작품임에도 사강 특유의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체와 파격적인 사랑을 그려 냄으로써 '역시, 사강!'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파니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서로에 대한 정절 속에 있었다. 캉탱이 죽고 난 후 맞는 아침은 결코 그 이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만은 예외였다. 그녀보다 훨씬 어린 장난꾸러기 청년 덕택에 그런 느낌을 다시 맛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두 사람의 나이 차가 얼마인지 정확히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고, 그가 자기 딸 - 그녀의 눈에 어딘가 한참 잘못된 - 의 남편이라는 사실, 사람들이 그 청년을 정신병자로 여긴다는 사실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p.270)

 

프랑스 지방의 재력가인 앙리 크레송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에는 사업가인 앙리 크레송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상드라, 앙리 크레송의 아들 뤼도빅 크레송과 그의 아내 마리로르, 상드라의 동생이자 앙리 크레송의 처남인 필립이 함께 살고 있다. 이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던 뤼도빅은 여러 의원과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결코 회복될 가능성이 없노라는 의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온갖 향정신성 약품들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본 뤼도빅의 장모 파니 크롤리는 사위의 그 고통스러운 모습에 눈물을 흘렸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앙리 크레송은 아들을 퇴원시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 뤼도빅은 체력적으로는 완벽히 회복했으나 정신과 치료의 후유증으로 이따금 몽롱하고 정상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원한다는 것외에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마리로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바보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던 뤼도빅을 잊지 않았다. 뤼도빅의 퇴원은 그녀에게 결코 반갑지 않았고, 차라리 우아한 미망인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여 마리로르는 뤼도빅을 공공연히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물론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앙리 크레송은 여리고 착한 자신의 아들이 무시당하는 걸 결코 두고 볼 수가 없었고, 성대한 파티를 열어 아들의 건재를 알리려 하는데...

 

앙리 크레송은 사돈이자 아들의 장모인 파니 크롤리를 파티에 초대한다. 최근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었던 파니는 아들이 병원에 있을 때 유일하게 눈물을 흘려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에서 장모가 병원에 있는 사위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뤼도빅의 아내인 마리로르는 물론 계모인 상드라 등 '라 크레소나드'에 사는 그 누구도 뤼도빅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파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 한 번도 피아노 덮개가 열리지 않았던 오래된 피아노를 손보도록 한 파니가 슈만의 사중주를 연주하였고 피아노 선율에 이끌렸던 뤼도빅은 파니의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만다.

 

"그들은 창문과 피아노 사이에 앉아 있었다. 덧문 사이로 비쳐 든 햇빛이 장난치듯 아른거리며 뤼도빅의 매끄러운 머리카락과 파니의 커다란 눈 위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슈만의 고통스러운 동시에 그윽하고 달콤한 곡조를 치는 데 열중해 있었다."  (p.169)

 

'사랑은 병이나 중독과 같으며, 때로 3~4년 정도 그 중독에 빠질 뿐 사랑이 영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강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지금보다 더 관대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사랑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거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규정하는 까닭에 사랑은 때로 집착으로 변질되어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갔던 사강 역시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1월의 마지막 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더니 퇴근길에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내 손에 단단히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허망하게 놓쳐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휑한 바람이 드나들 것만 같은 느낌.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뼈대를 드러낸 가로수의 살풍경한 모습.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운 11월의 어느 날,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먼 이국땅의 어느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우울했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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