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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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우리의 의식 표면으로 가볍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각의 주인인 나에게 "이제 좀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허락을 득하는 것은 아니다. 도식적인 경로를 통해 멀리서 다가오는 것도 아닌 까닭에 미리 대비를 하거나 환영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채업자처럼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가 가만히 사라지는 까닭에 '이런 기억도 있었구나.' 재차 확인할 뿐이다. 그런 기억들은 대개 나와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지닌,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이식된 듯한, 전혀 다른 개체의 기억처럼 느껴지곤 한다. 먼 훗날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의 기억 속을 둥둥 떠다니면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갈 것만 같은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어른이 된 지금은 내 딸의 감정적인 혼란과 비틀거림을 용납할 수 없어 짜증스러운 것만큼이나 나는 당시의 내가 낯설고 멋쩍다. 질서 정연하지 않고 안정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버거워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왔던 것처럼, 그리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처럼 내 딸 역시, 아니 이 땅의 모든 여고생들이 성장기란 어두운 터널 속을, 그 감정의 도가니 속을, 그리고 언젠가는 기억에서 멀어져 갈 현재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204 '역자 후기' 중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여고생 시절의 기억들을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소환한다. 물론 나와 같은 남자 독자라면 사정이 다를 테지만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그 시절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1964년생인 에쿠니 가오리의 고교 시절과 완전히 닮은, 판박이의 경험들이 독자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일본이 아닌 한국은 생각이나 배경부터가 다를 테고. 하지만 그 시절에 들었던 생각들, 이를테면 학교생활, 성적, 부모님과의 갈등, 연애나 우정 등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겪는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괜한 오해와 분노, 서글픔,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던 순간들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p.138 '천국의 맛' 중에서)

 

그 시절의 우리는 덩치만 컸지 미처 성장하지 못한 이성의 발달을 탓할 새도 없이 분출하는 감정의 지배하에 놓인 몸뚱어리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난감해하곤 했다. 실수는 다반사였고,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운 바를 다음에는 제대로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이나 결심은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 "그때보다 사는 게 조금 더 편해졌거나 그때보다 더 행복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우리는 지금도 만나야 했기에 만났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반년쯤 지나 미요와 다시 마주쳤다. 미요는 밤인데도 교복을 입고 시부야의 센터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앞으로 가로막는 나를 보고도 금방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아뿔싸' 싶어 하는 표정을 짓고는, 헤실헤실 미소를 지어댔다."  (p.195 '머리빗과 사인펜' 중에서)

 

겨울은 왠지 모르게 여름보다 농밀하거나 균질한 시간들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네의 말썽꾸러기들이 친구의 집에 모두 모여 엉뚱한 작당을 하거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거나, 춥고 어두운 거리를 이유도 없이 걷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길었던 밤은 온데간데없고 여느 날처럼 부옇게 해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겨울밤은 매년 조금씩 길어져만 가는 듯하다. 가뜩이나 12월의 밤은 무리하게 길기만 하고, 독서로도 채울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이 부담스러운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르곤 한다. 길기만 했던 겨울밤도 언젠가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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