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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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삶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심어 놓은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신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안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를 단박에 비틀어버리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했던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Le faux, c'est mort)."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 이제 떼를 지어 나가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여러분의 정신에 명예 훈장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멍청하게 군다면, 침묵하겠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습지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습지대로부터 그저 몇 가지 소소한 자료와 그저 그런 이야기들 그 이상의 것을 환하게 밝혀내기 위한 준비 작업일 따름이다."  (p.64)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는 독자라면 의당 '자연사'와 자유죽음(혹은 자살)' 사이에서의 윤리의식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자연사는 도덕적으로 옳고 자유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렇다면 자연사란 무엇인가? 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40대의 젊은 가장이 자연재해로 사망하거나 50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자연사인가? 그렇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60대의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정(주관적인 결정)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그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해야 하는가? 아메리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관습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로부터 습득한 죽음의 윤리에 의해 스스로의 생각을 말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험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p.254~p.255)


자유죽음은 아메리의 판단처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분명하지만 자유죽음의 과정은 충동자살이나 동반자살과는 구별된다고 믿는다. 자유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실행과 성공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말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는 것만 못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존엄을 포기하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의 결과는 그가 의도한 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삶의 안식과 평안을 원하는 이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얻는 것은 평안한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과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는 이 책에서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다. 그러나 공허한 결과에 대해 아메리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언제든 자신은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p.264)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장 아메리는 1976년 이 책이 출간되고 2년 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자살 옹호론자라는 오명과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아메리 역시 자유죽음의 무의미성과 당당한 삶의 길로 나설 것을 적극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자유죽음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말도 삶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실제로 자유죽음에 성공한 이의 경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이쪽 세상의 말이자 의미임을 절감하게 된다.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긴 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합리적'이라고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합리적'이란 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의미한 담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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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0시 기준 코로나 위중증 환자는 511명, 하루 새 숨진 환자는 84명으로 113일 만에 최다를 기록했다고 한다. 8월 21일 0시 기준으로는 위중증 531명, 사망 64명으로 점점 악화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정부는 노인의 복지비와 의료비 지출을 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고령층의 위중증 환자 수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노인들의 자유로운 집회를 유도하고, 노인들이 쉽게 모일 만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용산공원의 임시 개방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향후 대책으로는 수명이 다한 원전의 재가동을 하기에 앞서 안전은 신경 쓰지 말라는 대통령의 엄명도 있었다. 원전 주변에 사는 주민은 상대적으로 고령층이 많으니 그들을 자연스럽게 보내드리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곳곳에 프락치를 심는 게 비용이나 효율성 면에서 최선일 터, 초대 경잘국장으로 프락치 유경험자를 앉힌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령층의 인구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은 사실 군부독재 시절에도 보기 어려웠던 반인륜적인 정책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토록 앞장서서 실천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경제가 그만큼 위태롭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아무튼 우리는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인 인구의 획기적인 감소를 추구하고 있는 정부의 노력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구차한 행위가 짠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성숙되면서 '프락치'의 필요성은 점점 사라지는 듯했는데 현 정권이 출범하면서부터 프락치 활동의 유경험자를 적극 물색하여 중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정부는 '프락치'를 곳곳에 심어 정보를 수집하고,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물들을 색출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조기에 검거함으로써 조직 전체를 와해하려는 시도를 끝없이 자행했다. 그러나 동료와 선후배를 밀고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프락치'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까닭에 '프락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은 유혹에 쉽게 넘어갔던 김 모 국장과 같은 인물도 간혹 있었지만 말이다.


행안부에서 초대 경찰국장을 임명함에 있어 그의 '프락치' 전력을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흠결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잘 따르고, 자신의 흠을 덮기 위해 아랫사람을 심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찰을 손안에 쥐고자 했던 현 정부의 의도에 부합하는 인물로 김 모 국장은 적격이라고 하겠다. '프락치'는 정부와 반대 입장에 있던 조직의 상황만 밀고했던 게 아니라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규합하고 선동하는 역할도 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인 상황에서는 '프락치'의 역할 중 후자가 더 중요한 듯 보인다. 그런 까닭인지 정부는 노인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려 했다. 비난 여론이 심해서 실행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암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프락치'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어서 감회가 새롭다. 그게 다 김 모 국장의 화려한 전력 덕분이다. 사실 그런 활동을 했던 사람이 백주대낮에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분 역시 이종오의 <후흑학>을 열심히 읽고 실천하는 듯하다.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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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8-21 1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런 후진적인 작태들은 결코 자연도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정부에서 확실히 보여주네요. ‘물에 빠진 개는 다시는 뭍에 발을 올리지 못하도록 과감히 몽둥이로 때리라‘는 루쉰의 외침이 새삼 떠오르네요.

꼼쥐 2022-08-22 21:30   좋아요 0 | URL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항상 합리적이고 옳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닌 듯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는 것일 테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통령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나라 국민들도 많은 생각을 했을 듯합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특허 지식재산권으로 평생 돈 벌기 - n잡러시대 방구석에서 창업하기
남궁용훈 지음 / 리텍콘텐츠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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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코믹 SF 작품 중에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이 있다. SF 팬덤에서 컬트를 만든 최초의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140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아이디어는 사실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어도 모르는 채 <유럽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한 권을 들고 독일을 여행하던 작가는 인스부르크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청각장애자였고, 몇 분 후 다른 길에서 길을 물었던 상대방 역시 청각장애자였다. 마음을 고르느라 맥주를 사서 마신 후 다시 길을 물었는데 그는 청각장애자에 더하여 시각장애자였다. 낯선 곳에서 공포스러운 경험을 겪은 작가가 비틀거리며 길을 걷다가 부딪혀 미안하다고 했던 사람도 청각장애자였다. 알고 보니 근처의 호텔에서 청각장애자 총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인데 작가는 그 일을 겪은 후 <유럽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들고 들판에 가서 누웠고, 하늘에 별이 뜨자 작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누군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다면 내가 먼저 총알 같이 떠날 텐데. 그 후 작가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출발은 그처럼 아주 작은 우연이었던 셈이다.


"마흔 살 무렵의 어느 날 집에 있을 때, 아내가 반려견을 목욕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반려견은 목욕이 싫다고 몸을 비비 꼬고 있었고, 반려견을 잡기 위해 샤워기를 내려놓으면 물줄기는 사방으로 흩뿌려졌습니다. 무릎 사이에 샤워기를 끼워 고정하지만 잠깐뿐이었습니다. 반려견 목욕이 끝났을 때 아내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내의 불편하을 해결해 줄 수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술안주로 내놓은 문어숙회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샤워기 손잡이에 문어 빨판을 붙여 필요한 곳에 붙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p.15)


두 아이의 아빠이자 아마추어 발명가인 남궁용훈의 저작 <특허, 지식재산권으로 평생 돈 벌기>는 이처럼 필요와 간절함의 결합으로 탄생한 우연의 결과물 덕분에 인생 역전에 성공했던 사람들의 몇몇 사례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집필 동기와 유사하다. 우연에서 비롯된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꿈을 구체화하고, 형상화하고, 자신의 사업을 보호하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동안 교육이 만들어 낸 벽을 깨고 일어나게 하는 힘을 주기 위해 집필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변혁의 시대로 정해진 길로 가지 않아도 자신의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기술혁신이 나라의 미래를 담보하기에 도전하는 청년과 지원자들을 정부지원사업으로 돕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도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p.11 '프롤로그' 중에서)


프롤로그에 이어 제1장 '특허·지식재산으로 인생역전을 이룬 사람들', 제2장 '꿈의 나침판 아이디어부터 발명까지, 비즈니스로 set-up 시키는 방법', 제3장 '지식산업설계도를 그리기 위해 꼭 알아야 할 특허제도', 제4장 '특허를 지키고 지식산업설계도를 완성하기 위한 제도들', 제5장 '꿈과 목표를 이루어주는 특허·지식재산권 상품화 방법'의 총 5장에 이르는 본문이 끝나면 에필로그와 부록으로 예비창업자를 위한 사업계획서가 첨부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던 '특허 및 지식재산권'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인생역전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그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꼼꼼하고 세밀하게.


"부디 이 책을 읽은 분들은 주식과 가상자산에만 열광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움직여야지 얻을 수 있습니다. 노력하더라도 실패라는 고배를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돌아보면 나에게 더 크게 나아갈 힘을 줍니다. 지금의 아픔은 작은 성장통일 뿐입니다."  (p.278 '에필로그' 중에서)


말하자면 이 책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외로운 자기계발자를 위한 안내서'인 셈이다. 안내서를 충실히 따른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성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절망의 시간 동안 암울한 기억으로 채우지는 않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 도전과 끊임없는 두드림 속에서 절망의 부분 부분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가 일부 소수인의 특권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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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어져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를 우리는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절망'은 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된 주요 원인, 말하자면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음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본인의 잘못된 판단과 처신으로 희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좌절하거나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품거나. 물론 좌절을 선택한 개인 역시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생존을 위해 무엇인가 버들쩍거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절망감의 원인 제공자가 타인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예컨대 미성년자인 자신을 돌보는 보호자(부모가 대부분이겠지만)의 무능과 방치가 계속하여 이어진다거나 자신이 속한 국가 또는 기업의 대표가 무능하여 도무지 회생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을 때, 타인의 부작위로 인한 개인은 절망은 단지 수용하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개인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절망의 결과는 원망과 분노로 귀결됩니다.


며칠 전 UPI뉴스와 KBC광주방송이 넥스트위크리서치에 의뢰하여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절망'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실 '절망'은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고, 그에 대한 감정은 분노나 원망 혹은 암울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대통령이 무능하여 국가의 미래가 암흑으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운명을 바꿀 만큼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명백한 불법행위가 드러나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탄핵에 이르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취임 후 겨우 100일이 지난 대통령이 이렇다 하게 한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있다 하더라도 탄핵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가슴에 품은 채 앞으로의 5년을 견뎌야 하는가? 하는 문제만 남습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국민 대다수가 '화병'에 걸리고 말 텐데 말입니다.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지만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오늘날 '절망'이라는 죽음의 늪에 빠지고 보니 배에 구멍이 뚫린 '대한민국호'의 미래가 자못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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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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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삶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 품었던 질문 하나로 인생의 전체 행로가 바뀌었던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답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 시한을 못 박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답변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은 참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삶 또한 공허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란 삶에서 필요한 자질구레한 여러 질문들을 추리고, 그것들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가 원자를 쪼개고 최초의 빛을 포착하고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는 데는 한 줌의 방정식과 구불구불한 선, 알쏭달쏭한 기호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이 수식들을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p.252)


칠레의 젊은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쓴 논픽션소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입증을 요하는 과학의 세계가 결국 추상이나 논리만 존재하는 명상의 세계 혹은 철학적 세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임을 소설적 허구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에 담긴 화학자,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경쟁자들과 치열한 이론 논쟁을 펼치며, 하나의 완성된 답변을 향해 끝없이 묻고 답합니다. 과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프리츠 하버,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 그로텐디크 등이 보여주는 인간 정신의 확장과 그 한계에 대한 지적 욕망의 분출은 실로 아름답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영혼이 담기지 않은 수학적 방정식이나 알쏭달쏭한 기호가 대부분이지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그런 결과물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그들의 치열했던 정신적 향연을 논픽션 소설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슈바르츠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p.71)


책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지적 활동의 시기를 작가는 아주 빈약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여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풍부한 살을 입히는 작업을 가함으로써 독자들은 차갑게만 느꼈던 과학자의 열정을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영혼의 삶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던 각각의 인물들을 역사 속 필연으로 한데 묶음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은 끊이지 않는 장대한 역사의 물결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던 모든 질문의 답변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품게 합니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는 20세기 초에 전례 없는 세계 대기근을 몰고 올 뻔한 비료 부족 사태와 맞섰다. 하버가 아니었다면 구아노와 초석 같은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p.35)


책을 첫 페이지부터 읽었던 독자라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 흔하디 흔한  과학 논픽션 중 하나라는 생각에 시큰둥 외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페이지 수를 더할수록 시대가 다른 인물들 간의 긴밀한 연관성과 인물들의 지적 성과가 빛나던 시점에 있어서의 생생한 묘사,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팽팽한 긴장감 등으로 인해 '과학 논픽션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며 절로 감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작품의 맨 마지막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과학 논픽션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읽었는데, 일정 부분 허구라는 작가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과학자나 수학자들의 삶에 있어 그들의 성과에 비해 자연인으로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뇌와 숱한 질곡의 시간들은 간과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도 어쩌면 젊은 시절에 품었던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은 다른 이의 삶과 하등 다를 게 없을 듯합니다. 다만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로 인해 우리들 각자의 삶은 재평가되고, 저마다 다른 문장으로 기술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하고, 우리의 삶도 죽음을 전제로 존재할 뿐입니다.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여러 질문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질문조차 가려 뽑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매번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는 게 바빠서'라는 흔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듯한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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