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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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삶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 품었던 질문 하나로 인생의 전체 행로가 바뀌었던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답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 시한을 못 박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답변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은 참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삶 또한 공허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란 삶에서 필요한 자질구레한 여러 질문들을 추리고, 그것들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가 원자를 쪼개고 최초의 빛을 포착하고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는 데는 한 줌의 방정식과 구불구불한 선, 알쏭달쏭한 기호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이 수식들을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p.252)


칠레의 젊은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쓴 논픽션소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입증을 요하는 과학의 세계가 결국 추상이나 논리만 존재하는 명상의 세계 혹은 철학적 세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임을 소설적 허구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에 담긴 화학자,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경쟁자들과 치열한 이론 논쟁을 펼치며, 하나의 완성된 답변을 향해 끝없이 묻고 답합니다. 과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프리츠 하버,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 그로텐디크 등이 보여주는 인간 정신의 확장과 그 한계에 대한 지적 욕망의 분출은 실로 아름답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영혼이 담기지 않은 수학적 방정식이나 알쏭달쏭한 기호가 대부분이지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그런 결과물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그들의 치열했던 정신적 향연을 논픽션 소설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슈바르츠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p.71)


책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지적 활동의 시기를 작가는 아주 빈약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여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풍부한 살을 입히는 작업을 가함으로써 독자들은 차갑게만 느꼈던 과학자의 열정을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영혼의 삶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던 각각의 인물들을 역사 속 필연으로 한데 묶음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은 끊이지 않는 장대한 역사의 물결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던 모든 질문의 답변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품게 합니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는 20세기 초에 전례 없는 세계 대기근을 몰고 올 뻔한 비료 부족 사태와 맞섰다. 하버가 아니었다면 구아노와 초석 같은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p.35)


책을 첫 페이지부터 읽었던 독자라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 흔하디 흔한  과학 논픽션 중 하나라는 생각에 시큰둥 외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페이지 수를 더할수록 시대가 다른 인물들 간의 긴밀한 연관성과 인물들의 지적 성과가 빛나던 시점에 있어서의 생생한 묘사,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팽팽한 긴장감 등으로 인해 '과학 논픽션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며 절로 감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작품의 맨 마지막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과학 논픽션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읽었는데, 일정 부분 허구라는 작가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과학자나 수학자들의 삶에 있어 그들의 성과에 비해 자연인으로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뇌와 숱한 질곡의 시간들은 간과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도 어쩌면 젊은 시절에 품었던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은 다른 이의 삶과 하등 다를 게 없을 듯합니다. 다만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로 인해 우리들 각자의 삶은 재평가되고, 저마다 다른 문장으로 기술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하고, 우리의 삶도 죽음을 전제로 존재할 뿐입니다.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여러 질문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질문조차 가려 뽑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매번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는 게 바빠서'라는 흔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듯한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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