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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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삶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죽음 이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조리한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심어 놓은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한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신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안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를 단박에 비틀어버리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했던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Le faux, c'est mort)."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 이제 떼를 지어 나가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여러분의 정신에 명예 훈장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멍청하게 군다면, 침묵하겠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습지대,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습지대로부터 그저 몇 가지 소소한 자료와 그저 그런 이야기들 그 이상의 것을 환하게 밝혀내기 위한 준비 작업일 따름이다."  (p.64)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읽는 독자라면 의당 '자연사'와 자유죽음(혹은 자살)' 사이에서의 윤리의식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와 그렇다면 자연사는 도덕적으로 옳고 자유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렇다면 자연사란 무엇인가? 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40대의 젊은 가장이 자연재해로 사망하거나 50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자연사인가? 그렇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60대의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정(주관적인 결정)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고 그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해야 하는가? 아메리는 이처럼 비논리적인 관습에 의문을 표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로부터 습득한 죽음의 윤리에 의해 스스로의 생각을 말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험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p.254~p.255)


자유죽음은 아메리의 판단처럼 자유에 따른 선택이 분명하지만 자유죽음의 과정은 충동자살이나 동반자살과는 구별된다고 믿는다. 자유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실행과 성공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말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는 것만 못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 존엄을 포기하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지나친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의 결과는 그가 의도한 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삶의 안식과 평안을 원하는 이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얻는 것은 평안한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과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는 이 책에서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일견 옳다. 그러나 공허한 결과에 대해 아메리 자신도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자유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언제든 자신은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p.264)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장 아메리는 1976년 이 책이 출간되고 2년 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자살 옹호론자라는 오명과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아메리 역시 자유죽음의 무의미성과 당당한 삶의 길로 나설 것을 적극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자유죽음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낙인찍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합리적'이라는 말도 삶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실제로 자유죽음에 성공한 이의 경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이쪽 세상의 말이자 의미임을 절감하게 된다.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긴 이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합리적'이라고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합리적'이란 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의미한 담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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