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배추 한 포기의 가격이 2만 원을 넘나드는 바람에 장을 보는 주부들의 한숨이 깊어졌던 적이 있었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근래의 일이다. 그렇다고 배추 가격이 뚝 떨어져 지금은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배추의 가격이 이렇게 고공행진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다들 '김치'를 일러 '금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이토록 싸고 질 좋은 식재료인 배추를 얼마나 무시하고 천대했던가 하는 반성이 절로 들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서리가 내린 밭에서 지난가을 일손이 모자라 마저 수확하지 못한 배추가 하얗게 얼어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겉이 얼어 흐물흐물해진 배춧잎을 몇 겹 걷어내고 나면 아직 얼지 않은 싱싱하고 노란 고갱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뚝뚝 끊어 흐르는 냇물에 대충 씻은 후 한입에 우적 씹었을 때의 입안 가득 퍼지던 알싸한 단맛을 나는 몇십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기름을 조금 두른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던 연한 배춧잎의 슴슴한 맛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날것일 땐 달았던 배추도 밀가루를 묻혀 구워놓으면 밍밍하고 싱거워졌다. 생속을 가진 사람은 배추적의 맛을 몰랐다. 배추적을 입에 넣어 "에이 뭔 맛이 이래? 싱겁고 물맛만 나네!" 하면 자기 속이 생속이라는 고백이었다. 곱게 자란 처녀들이 그랬고 남자들도 대개는 그랬다. 하긴 남자들 상엔 배추적 같은 허드렛 음식은 아예 올리지도 않았다."  (p.17)


김서령의 에세이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뭉클한 마음도 들었다가,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가, 손에 닿을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과거의 어떤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들게도 된다. 유튜브에선 시시각각 먹방이 올라오고 어느 OTT 플랫폼의 예능 프로그램에선 요리 대결이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순식간에 부쳐내던 배추적의 맛에 필적할 요리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나는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추억의 맛인 동시에 깊어가는 겨울밤에 맛보던 불혹의 맛이었다. 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목 넘김이 있기 전에 아주 잠깐 속게 되는 '얕은 맛'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 웅숭깊은 '불혹의 맛'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맛 속에 별의별 것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무와 콩을 길러낸 척박한 땅에 비치던 은은한 햇볕과, 땅속 깊이 인색하나 달디달게 숨어 있던 지하수와, 눈물이 돌 것 같은 겸허와, 수도승같이 맑은 인내와, 텅 빈 밭이랑 위로 불어오는 바람결 같은 가난과, 그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슴슴한 익지 맛 안에 모조리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p.121)


남들이 들으면 '잘났어 정말' 하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지만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엔 오히려 사람들이 맛을 잃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맛 저 맛이 한데 섞여서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땅속에 묻어두었던 무를 꺼내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시원하고 상큼한 단맛은 무가 품었던 원래의 맛, 어떤 것에 의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순수의 맛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가 갈수록 각각의 식재료가 갖는 순수의 맛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를 시리게 했던 청정 계곡물의 물맛을 잃은 우리가 수돗물의 염소 소독제 냄새를 원래의 물맛인 양 기억하는 것처럼.


"제삿날 어스름 저녁이면 엄마는 마루 밑 밤 구덩이에서 밤을 한 바가지 캐냈어요. 흙속에서 적절한 수분과 온도가 유지된 밤은 갓 따낸 듯 싱싱해요. 아, 밤이 그토록 여러 겹의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었던 건 바로 이것, 제 몸을 보관에 용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어요. 감이 곶감이란 형태로 가공되어 겨울을 나고, 대추가 쪼글쪼글 마른 채 겨울을 난다면 밤은 수분이 사라지면 존재 이유까지 위협받잖아요. 겨우내 제사상에 올라가려면 몸을 보늬로, 야문 껍데기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매사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니깐요. 그래야 세상의 전체 구도가 보이지 않겠어요?'  (p.253)


한 차례 가을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급변하고 있다. 가을빛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풍요로운 계절에 서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만 있다. 2kg 토마토 가격이 25000원을 호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사과, 배추에 이어 토마토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이제 우리는 뭘 먹으며 겨울의 허기를 달래야 할까? 썩은속을 달래주던 배추적의 밍밍한 맛은 이제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일까? 우리의 속은 더욱 썩어 문드러져가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풍이 물드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노란 웃음이 배시시 피어나는 듯도 하고, 감격에 겨운 붉은 울음이 우렁우렁 계곡을 흔들 것도 같다. 삶을 견뎌온 진득한 땀방울이 비로소 스며드는 계절. 우리는 어쩌면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한 해의 절반을 소진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치듯 가을이 가고, 익숙하던 네 자리 숫자와 결별하기 위해 송년 모임을 계획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남한과 북한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은 지지율 바닥을 보이는 남한의 정부 여당에게도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전면전으로 확대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휴전선 일대에서 국지전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것을 핑계로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할 수 있고, 야당을 비롯한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같은 긴장 사태 조성은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주가 하락과 환율 급등 및 수출 타격 등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인적, 물적 손해가 미미한 수준에서 그칠 수만 있다면 정부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추문에 시달리는 영부인에 대한 여론도 서서히 반전시킬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할지 모른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부로서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뉴스가 터져나오고 있다. 명 모 씨로부터 불거진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 김 모 행정관의 녹취 파문 등 자고 일어나면 굵직굵직한 뉴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 상태와 긴장 국면에도 국민들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은 이보다 더 큰 뉴스는 없을 텐데도 말이다. 국민의 안전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이 상황, 정부가 북한을 이용하여 국면 전환을 꾀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국민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짧은 계절 가을이 우리 곁을 스치듯 흘러가고 있다. 노란 웃음이 배시시 피어나는 듯도 하고, 감격에 겨운 붉은 울음이 우렁우렁 계곡을 흔들 것 같은 가을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ingri 2024-10-1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자 19 %
이제 멀지 않았겠죠?;;;

꼼쥐 2024-10-19 14:27   좋아요 1 | URL
그 정도 지지율이면 스스로 물러나야 하지 않나요? 하긴 그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평하길 ‘무식해서‘, ‘지가 뭘 안다고‘라는 말까지 듣는 판이니...쩝.
 
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스칼의 『팡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지만 그들 중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책의 두께도 상당하지만 경구와 같은 그의 문장이 마치 성경을 본뜬 것처럼 빼곡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61-95 정의. 유행이 매력을 만드는 것처럼 정의도 만들어 낸다.'는 식으로 그의 생각이 숫자와 함께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장이 비록 짧다고는 하나 문장에 담긴 확실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깊은 사유와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까닭에 책을 끝까지 읽고 그 대강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난관 때문인지 과감하게 책을 펼쳤던 사람들도 완독은커녕 책의 반도 채 읽지 못하고 GG를 선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문학자 김태현이 쓴 <파스칼 인생 공부>와 같은 책은 『팡세를 완독하지 못한, 혹은 완독을 목전에 두고 GG를 선언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재도전의 의욕을 불태우게 할 좋은 책이자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스칼 사후 1670년 출간된 초역 『팡세(Pensées)』라는 원문에서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여 "인간은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인간 불행의 대부분은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왔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4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팡세』의 불어 원문과 함께 인간의 심리를 해부할 수 있는 쉬운 해설을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꼭지에 대해서는 "사례" 형태로 서두에 설명을 추가하였습니다."  (p.9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가 선별한 67개의 대표 구절만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저자의 설명과 사례 덕분에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넘기는 경우는 없거나 매우 드물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책을 읽을 때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은 눈으로만 읽어서는 독서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경구나 잠언 등은 사실 한두 문장은 쉽게 외워 기억에 오래 남길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쉬이 잊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므로 독서와 함께 필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책에 손글씨로 꾹꾹 눌러쓰다 보면 그 구절의 의미도 명확해지지만 문장도 기억 속에 오래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선정한 대표 구절 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모든 인류의 문제는 사람들이 혼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문장을 썼을 때의 파스칼 역시 인간의 분주함과 맹목적인 관계를 지적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피게 된다. 그러나 그 살핌의 대상이 주로 외적인 것, 이를테면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 등 제 또래의 지인들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들에 국한된다. 그것만으로는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하여 나를 찾는 게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은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며, 깊은 통찰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을 갖지 못하면, 하루가 멀게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 자극에 노출되어 타인에게 휘둘리고, 스스로와 마주할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다양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p.129)


이 책에는 없지만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문장 중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다. 문체에 관한 파스칼의 생각을 정리한 문장이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만날 때 우리는 매우 놀라고 기뻐한다. 왜냐하면 한 작가를 본다고 기대했는데 한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책을 보면서 인간을 발견한다고 믿다가 작가를 발견하여 매우 놀란다.'는 문장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 '한강'이라는 작가를 만나는 게 아니라 소년 동호와 정대를 통하여 국가 공권력의 폭력 앞에 선 나약한 인간 군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더 높은 존재로서 존경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사유하며,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고, 자아를 찾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p.222)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전 세계의 지성인들이 한강 작가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400여 년 전에 살았던 프랑스의 위대한 영혼 블레즈 파스칼을 기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한강 작가의 작품을 폄훼하고 깎아내리려는 불쌍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파스칼이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 불쌍한 영혼들을 버리지 마실지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39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파스칼이 남긴 마지막 말은 '신은 영원히 저를 버리지 마실지어다'였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오래전부터 한강 작가의 팬이었던 나는 초기작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어보았지만 나는 사실 작가의 시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지금도 여전히 즐겨 읽는 시집 중 한 권이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다루는 첫 번째 방법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직접 접촉하거나 뭐가 문제인지 묻고 간섭하려 들지 않은 채, 그 고통의 실상을 그저 많은 대중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예컨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방식이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겪는 아픔은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당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봅시다, 하고 응원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아픔을 겪는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전후 사정을 듣고 상대방에게 지속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것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하는 방식이다. 심리 상담가나 정치인(독재자나 권위주의 정권이 대부분이지만) 혹은 대부분의 종교가 취하는 방식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고통에 처한 인간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나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오직 나만이 당신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입함으로써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심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뇌일 수도 있는 이 방식은 알게 모르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고, 고통의 당사자로 하여금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된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보도되는 어느 교회의 목사의 성폭행 범죄나 정신과 의사에 의한 범죄 혹은 일반인의 가스라이팅 범죄 등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사실 문학이나 영화, 종교나 심리 상담 등은 모두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성장한다. 그 방법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영화 등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와 접촉하지 않는 까닭에 피해가 전혀 없지만, 종교나 정치 등은 개인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그 내막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에 종교인이나 정치인은 그들의 도덕성이 매우 중요해진다. 예컨대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IS 무장대원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자살 폭탄 테러에 나서거나 이스라엘 병사가 민간인을 향해 총을 난사하거나 어느 교회의 목사처럼 자신의 여성 신도에게 수십 년 동안 성폭행을 가하는 행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인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자는 그 고통을 매개로 타인을 지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한강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가 교회의 목사나 심리 치료사가 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작가처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어느 교회의 목사가 되어 혹여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신도들을 홀린다면 그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듯하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사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종교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얄팍한 신념 체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에 종속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의지는 반쯤 날아가고 그의 삶은 이전의 삶과 180도 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나 문학과 같은 예술 분야에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얼마나 건전한가. 나약함을 인지한 인간 군상이 서로 어깨를 곁고 '으쌰으쌰' 앞으로 나아가자고 독려할 수 있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웹소설로 대박나고 싶어요 - 성공적인 출간 데뷔를 위한 웹소설 작법 입문서
한윤설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제목 치고는 다소 촌스럽고 원색적이다. 잭팟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면 웹소설을 써서 성공하고 싶은 저자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막 웹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반 독자를 부추기는 선동 구호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성공 스토리를 웹소설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두 여기 여기 모이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책을 읽기만 해도 성공에 반쯤 발을 걸친 듯한 환상에 빠져들게도 한다. 내가 그렇게 읽었다면 제목을 선정한 출판사나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웹소설이란 게 바로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이나 정서를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를 통해 구현하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난 첫 출간 당시 '억대 수익을 찍는 거 아니야?'라며 설렜었다. 작가가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출간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내 첫 출간작은 억대 연봉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경험을 발판 삼아 다음 작품을 준비했고 지금은 몇 년째 억대 연봉을 버는 웹소설 전업 작가가 되었다."  (p.6 'Prologue' 중에서)


'성공적인 출간 데뷔를 위한 웹소설 작법 입문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현직 웹소설 작가인 한윤설이 들려주는 웹소설 작가 입문자를 위한 A to Z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웹소설을 읽는 독자가 주변에서 많아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변변한 웹소설 작법서 한 권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무척이나 반갑다. 현직에 있는 웹소설 작가가 웹소설 작가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를 세상에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1장 '독자를 부르는 웹소설의 시작', 2장 '성공을 부르는 웹소설을 쓰자', 3장 '출간을 부르는 웹소설을 기획하자', 4장 '돈을 부르는 웹소설을 출간하자', 5장 '평생 웹소설 작가로 생존하기', 마지막 '당신의 시작', 부록 '웹소설의 모든 용어를 모았다!'로 구성된 이 책은 웹소설 작가 입문자가 아니더라도 웹소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캐릭터의 성격을 잘 설정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건 캐릭터의 서사다.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보려면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보게 되고 그걸 이해시키려면 서사, 즉 캐릭터가 살아온 삶이 필요하다. 캐릭터의 서사와 함께 성격을 설정해 보도록 하자. 캐릭터의 서사는 구체적일 필요는 없지만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에 따라 현재의 성격이 나타나게 되니, 한 문장으로라도 정리해 두는 편이 좋다."  (p.97)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웹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어쩌다가 인기를 끌었던 웹소설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면 혹시 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마트폰을 통해 웹브라우저로 소설을 읽어 본 적은 없다는 얘기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었던 데는 까닭이 있다.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는 개체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나이기에 현재 유행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의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마트폰 속에는 흥미로운 영상이나 사진 등 독자를 유혹하는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는데 그런 여타의 유혹을 뿌리치고 웹소설, 즉 문자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존재한다는 건 나로서도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웹소설 작가를 굉장히 쉽게 생각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모든 직업에는 그만한 고충이 있다. 학교 다닐 때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있다. 전단지만 붙이면 돈을 준다고 하니 소위 요즘 말하는 '꿀알바'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함께 신이 나서 달려갔지만, 결국 한 시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돌아섰다. 쉬운 일이라는 건 없었다. 내가 쉽게 얕잡아 본 일만 있을 뿐이었다."  (p.268)


한여름 뙤약볕에도 없던 모기가 요 며칠 비가 내리면서 활동이 왕성해졌다.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난 지도 한참인 것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소소리바람이 부는 요즘 모기 입이 비뚤어지기는커녕 더없이 쌩쌩하기만 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모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웹소설을 쓴다면 대박일까? 아니면 쪽박일까? 모르긴 몰라도 후자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가 우리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우리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뒤엎는 반전 드라마를 쓰게 될지... 언제 어디서나 반전 드라마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날을 기다려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