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오래전부터 한강 작가의 팬이었던 나는 초기작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어보았지만 나는 사실 작가의 시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지금도 여전히 즐겨 읽는 시집 중 한 권이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다루는 첫 번째 방법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직접 접촉하거나 뭐가 문제인지 묻고 간섭하려 들지 않은 채, 그 고통의 실상을 그저 많은 대중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예컨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방식이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겪는 아픔은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당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봅시다, 하고 응원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아픔을 겪는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전후 사정을 듣고 상대방에게 지속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것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하는 방식이다. 심리 상담가나 정치인(독재자나 권위주의 정권이 대부분이지만) 혹은 대부분의 종교가 취하는 방식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고통에 처한 인간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크나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오직 나만이 당신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입함으로써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심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뇌일 수도 있는 이 방식은 알게 모르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고, 고통의 당사자로 하여금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된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보도되는 어느 교회의 목사의 성폭행 범죄나 정신과 의사에 의한 범죄 혹은 일반인의 가스라이팅 범죄 등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사실 문학이나 영화, 종교나 심리 상담 등은 모두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성장한다. 그 방법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영화 등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와 접촉하지 않는 까닭에 피해가 전혀 없지만, 종교나 정치 등은 개인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그 내막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에 종교인이나 정치인은 그들의 도덕성이 매우 중요해진다. 예컨대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IS 무장대원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자살 폭탄 테러에 나서거나 이스라엘 병사가 민간인을 향해 총을 난사하거나 어느 교회의 목사처럼 자신의 여성 신도에게 수십 년 동안 성폭행을 가하는 행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인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자는 그 고통을 매개로 타인을 지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한강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가 교회의 목사나 심리 치료사가 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작가처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어느 교회의 목사가 되어 혹여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신도들을 홀린다면 그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듯하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사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종교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얄팍한 신념 체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에 종속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의지는 반쯤 날아가고 그의 삶은 이전의 삶과 180도 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나 문학과 같은 예술 분야에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얼마나 건전한가. 나약함을 인지한 인간 군상이 서로 어깨를 곁고 '으쌰으쌰' 앞으로 나아가자고 독려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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