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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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관계없이 백만 년 전의 그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기억들 중에는 아주 최근의 것들도 있고, 희미하게 닳고 닳은 아주 오래된 기억도 물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했던 기억도 내게는 아주 먼 과거의 그것인 양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그 이상한 경험이 왜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치료제도 백신도 없이, 단지 개인의 위생과 격리를 무기로 감염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그 길었던 시간이 왜 그토록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나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시간을 내 인생의 빈 시간에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그리고 나는 또한 깨달았다.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맙소사,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다."  (p.66)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사실 연작 소설처럼 이어지는 스트라우트 식 소설 작법을 좋아한다. 주인공도, 시공간적 배경도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단행본을 선호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한다는 얘기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고 있는 시간만큼은 나의 인생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멸의 삶을 부여받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음이나 끝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롯이 소설 속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안온한 느낌 때문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물질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손을 펴 보이는 듯한 느낌이 존재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도움이 되었다."  (p.170)


<오, 윌리엄!>의 후속작이자 '루시 바턴' 시리즈의 최신작인 <바닷가의 루시>는 주인공인 루시와 그녀의 첫 남편인 윌리엄이 당시 만연했던 뉴욕의 바이러스를 피해 한적한 바닷가의 집으로 가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위험을 감지한 윌리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위험천만한 생활을 하고 있던 루시를 돌보기 위해 메인 주에 있는 밥 버지스 소유의 바닷가 주택을 임대하여 루시와 함께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 북동부 국경지대의 해안가에 위치한 메인 주는 동부 도시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이지만, 대개의 휴양지가 그렇듯 휴가철을 제외하면 인적이 끊기고 항구도시 특유의 회색빛 거친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소설 속 주인공 루시도 이곳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내가 걸어가야 하는 넓은 빙판길 같았다. 그리고 그 빙판에는 붙박인 작은 나무들과 잔가지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이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p.83)


한없이 서먹한 관계일 수 있는 두 사람(루시와 윌리엄)은 고립된 생활 속에서 지난날을 떠올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에 대해 끝없이 걱정한다. 고립된 삶이 두 사람에게 꼭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어서, 유년시절 가난과 폭력 속에서 성장했던 루시는 그녀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주인 밥 버지스를 통하여 사별한 남편 데이비드에 대한 상실감을 위로받기도 한다.


"그러자 밥이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바보 같지 않잖아요., 루시.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세상일에 바보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말을 중단했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p.117)


루시의 말처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지만 우리는 슬픔 속에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를 겪어내는 동안 우리들 각자의 나약함을 확인했고, 서로의 등에 닿는 누군가의 체온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공포에 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깨닫게 해 준 하나의 기회이자 창구였다.


"이 나라에 깊고 깊은 불안이 존재하고, 시민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곤거림이 내가 뚜렷이 느낄 수는 없어도 감지할 수 있는 미풍처럼 내 주변을 휘도는 것 같은 환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그곳을 떠났고, 내가 윌리엄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자 그가 "나도 알아" 하고 말했다. 그것이 내게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내가 받았던 그 느낌이."  (p.218)


혹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기록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묻는다.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사건도 없이 잔잔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서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작가가 구축한 소설 속의 견고한 질서와 배경, 그 속에서 펼쳐지는 반복적인 일상은 늘 크고 작은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안심과 위로를 선사하는 까닭이라고. 적어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안하지 않다고. 소설을 읽고 있는 그 시간에는 우리에게 예정된 죽음도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고. 작가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다독이고 있다. 나는 어쩌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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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어두운 구름이 깔린 스산한 날씨였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 어제와 오늘을 분명하게 구획하려는 듯 급변한 날씨. 늦여름에서 겨울로, 또는 초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온 듯한 날씨 탓에 사람들은 꽤나 당혹스러운 듯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햇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나는 올 한 해도 다 갔구나, 하는 푸념을 긴 한숨과 함께 뱉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국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국민들의 인내심이 점점 임계치에 이르고 있다는 신호가 아닌가. 모 대학의 시국 선언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나의 오랜 친구도 끼어 있지만 사실 대학 교수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가 보수적인 성향이 일반적이고, 일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직위를 걸 정도의 위험한 도박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권력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올여름의 더위가 하루아침에 급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징후를 감지하고 앞에 나설 수 있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건 한없이 가라앉던 우리나라에게도 약간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미약하지만 다시 되살릴 수 있는 희망의 불씨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그동안 붙잡아왔던 절망과 자조의 끈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시국 선언을 하는 대학 교수들의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가 경제는 나날이 기울고,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나날이 증가하고, 공정과 상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대책과 복지는 나날이 감소하고, 오직 내 편 나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이 정권의 비열함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나라가 기대고 있고 또 열심히 전파하는 창건 신화에 익숙해요. 점령한 권력에 대항한, 귀족과 교회의 압제에 대항한 영웅적 투쟁의 신화, 피를 흘려 자유라는 약한 식물을 기른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투쟁의 신화. 그러나 르낭은 그런 투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르낭은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가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 위해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또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해요. 위안을 주는 잠자리 동화를 늘 반복하듯이."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통령이 취임한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나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국민 대다수가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큰 행동과 생각에서 자신을 속여'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할 거라고.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거짓을 진실인 양 끝없이 속여 온 덕분에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건재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태위태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날씨가 종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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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17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을 읽고 먼가 울컥했었습니다! 빗속에서도 촛불을든 시민들을 보면서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절망과 자조의 끈을 놓고 새로운 희망을 실현해야 할 시간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보고 힘내서 저도 열심히 새 희망을 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

꼼쥐 2024-11-19 15:18   좋아요 1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은 조금 특별했죠.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감동적이기도 했고 말이죠.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슬프지만 안녕
황경신 지음, 김원 사진 / 지식의숲(넥서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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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력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떤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껏 내가 읽었던 책의 권수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작가의 수도 제한되는 까닭에 굳이 호불호를 나눌 필요도, 그럴 만한 이유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기본 자료의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일 뿐 나의 취향이나 선호가 전무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 그렇지만 형편없는 나의 독서 이력과 미미한 자료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글을 잘 쓴다고 인정되는 작가가 몇몇 존재하기는 한다. 멀게는 박경리 작가나 박완서 작가에서부터 조금 가깝게는 김소연 작가나 황경신 작가를 들 수 있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훈 작가를 거의 일 순위로 꼽았지만, <허송세월>을 읽고 크게 실망했던 바, 더이상 김훈 작가를 거론하지는 않기로 했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내가 감히 언급할 수조차 없는, 나의 평가 수준을 벗어난, 저세상 클래스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황경신 작가와의 인연은 그녀의 에세이 <생각이 나서>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이 나서>를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는 '타고난 글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생각이 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 자신만의 문체로 완성한, 황경신 체의 에세이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탁월하고 독특한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자주 있을 수는 없는 법, 작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천명관 체로 완성한 <고래>가 그렇고, 오쿠다 히데오 체로 완성한 <공중그네>가 그렇고, 김훈 체로 완성한 <자전거 여행>이 그랬다. 과거에 자신이 쓴 작품 수준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다시 내놓을 수 없는 작가의 심정은 오죽 답답할까마는 이를 대하는 독자의 태도 또한 혹한기의 그것처럼 냉담하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영혼을 영원히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한의 존재인 나는, 무한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수용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영원이란,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언젠가의 시간 속에서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 그것만이 영원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p.123 '슬프지만 안녕' 중에서)


<슬프지만 안녕>은 17편의 짧은 소설을 모아서 엮은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슬프지만 안녕'을 비롯하여 '녹턴', '꽃 피우는 아이', '한밤의 티파티',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1990년대 풍의 고전적인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책을 메우고 있다. 작가의 실제 체험과 허구가 교묘하게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체험담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더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작가의 글재주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황경신 작가를 아끼는 열혈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판단해보자면 소설은 왠지 어색하기만 한 게 사실이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에세이스트로서의 자유분방함이나 사색의 순수함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유교적 토양에서 자란, 관습화한 고정 관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에르노와 같은 사실적 묘사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얼룩 같은 눈들이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혹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가듯, 남자는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기며 나무 사이를 걷고 있다. 물이 오르지 않은 나무들, 아직 겨울 속에 있는 듯한 나무들이다. 그러나 나무 속에는, 땅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바쁜 마음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p.255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중에서)


작가에게는 특화된 한 분야의 재주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재주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의 마음을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일치해야 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재주를 인정하고 높이 살 만한 동시대의 독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가 쓰는 글은 언제나 탄력이 있고 힘이 넘쳐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네, 하고 고백하는 순간 작가로서의 수명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내가 김훈 작가의 글을 더이상 읽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의연함과 초연함이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있어야 한다. 글에서 풍기는 원숙함이나 노련함은 작가의 나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작가의 노쇠함을 원숙함으로 포장하곤 한다. <슬프지만 안녕>은 황경신 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통속적이고 구태의연한 느낌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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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우려했던 일이 막상 현실로 나타났을 때, 생각보다 약한 결과에 저으기 안심할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약하게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번지 점프대에 올라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느꼈던 극한의 공포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뛰어내리고 나면 '에이, 별것도 아니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렇듯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과도한 걱정과 근심을 안은 채 전전긍긍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을 얼마나 많이 겪게 되는 것일까. 우리 앞에 어차피 닥칠 불행이라면 그 결과를 미리 걱정하고 고민할 게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충실하게 즐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손에 떠밀려 번지 점프를 하게 될 테고 공중에 매달린 채 별것 아니라며 안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수능을 치른 학생들의 홀가분한 표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자신의 마음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결과로 인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의 일도 미리 알 수 없는 청맹과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우리가 이렇게 무식하고, 무례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고, 그를 찍었던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자괴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려니 하면서 말이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은 어떠한가. 절제가 불가능한 망나니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다시 뽑지 않았던가. 이렇듯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다시 또 반복적으로 일어나고야 말 테니까 말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명 박사나 천공의 예지력 덕분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속 편할지도 모른다. 장은진의 장편소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문득 떠오르는 금요일 오후. 다음주부터 기온이 떨어진다는데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말은 주말처럼 즐겨야 하지 않을까.


"거리를 걷다 문득, 나는 이게 우리의 마지막 축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광란의 축제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시끌벅적한 축제 뒤에 남는 건 쓸쓸함과 허전함이다. 축제가 끝나면 마술처럼 풀렸던 금기는 마술처럼 다시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축제의 뒤끝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 들린 자에 의해 금기의 벌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광란의 밤이 어떤 자를 광란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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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1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참 요지경입니다.

꼼쥐 2024-11-16 14:57   좋아요 0 | URL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요지경이지요. 점점 그 임계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작가살이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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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유명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라는 직업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사실이 그렇다기보다 나의 인식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와 같은 인식의 출발점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졌을까 몰라도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작가는 밥 빌어먹기도 힘들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그런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듣고 자랐던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 공포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갖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게다가 집안 형편마저 팍팍했던 나로서는 직업 선택 목록에도 오르지 않은 '작가'를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된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명함에 '작가'라는 두 글자가 이름 앞에 놓일라치면 '이 사람은 과연 제 때에 밥은 밥은 먹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설마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다. 2011년 30대 초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 모 씨는 자신이 살았던 월세방 현관문에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남긴 채 사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지병이 있었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도 지병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와 같은 글귀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비정함은 충분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렇듯 작가는 되기도 어렵지만 평생 직업으로 선택하기에도 꽤나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내에서는 말이다.


"글쓰기는 한 줄의 단어를 펼쳐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줄은 광부의 곡괭이이고 목각사의 끌이며 의사의 탐침이다. 글 쓰는 이가 휘두르는 대로 그 줄은 그에게 길을 파서 내준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땅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막다를 골목일까, 아니면 진짜 주제를 찾아낸 것일까? 그 답은 내일 나타날 수도 있고 내년 이맘때쯤 나타날 수도 있다."  (p.11)


미국 작가 애니 딜러드가 쓴 <작가살이(The writing life)>의 첫 대목은 그렇게 시작된다. 1장 '글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2장 '나는 어디에서 글을 쓰는가?', 3장 '누가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가?', 4장 '글 쓰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5장 '어떻게 나만의 글을 써낼 수 있을까?', 6장 '나의 글쓰기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7장 '글의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의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장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용 자체는 무척이나 평이하고 쉽게 쓰인 듯 여겨지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독자는 여러 생각할 거리가 넘치는 까닭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책에 머무는 그 시간만큼은 꽤나 즐거울 거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세상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한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는 세상을 놓칠 수가 없다. 햄버거를 사거나 비행기를 타면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보고한다. 그는 자신이 읽을 책을 주의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그가 쓸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울 것을 조심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자신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12)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길이 예전보다 넓어진 게 사실이다. 일인 출판이 늘고,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내놓고 있다. 말하자면 유입되는 작가의 수가 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책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감소한다. 전에도 그랬지만 출판계는 그야말로 지독한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작가를 꿈꾼다는 건 자살 행위와 진배없다. 물려받을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화강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누릴 수 있고, 작금의 혼란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재미있고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현실일 터,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글 쓰는 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매번 즉시 그것을 모두 써 버리고, 뿜어내고, 이용하고, 없애 버리라. 책의 나중 부분이나 다른 책을 위해 좋아 보이는 것을 남겨두지 말라. 나중에 더 좋은 곳을 위해 뭔가를 남겨두려는 충동은 그것을 지금 다 써먹으라는 신호이다. 나중에는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들은 샘물처럼 뒤에서부터, 아래로부터 가득 차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려는 충동은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일이기도 하다 아낌없이 공짜로 푹푹 나눠주지 않으면 결국 본인에게도 손해이다."  (p.129)


'작가'가 되겠노라 호언장담하는 이를 나는 존경한다. 그들의 용기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일개 무명의 독자로서 고통 속에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고통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생생하게 전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작가'를 꿈꾸는 당신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구비한 셈이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독자가 될 것임을 약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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