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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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꿉니다.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기나긴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꿈을 꾸는 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세월은 마치 내가 아닌, 나를 대신했던 어느 유령의 삶이었던 듯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에 따라, 나의 의지대로 살지 못했다고 누구에게 항변하거나 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925년에 태어나 1975년에 생을 마감한 그의 이름은 '김이섭'입니다.


그렇습니다.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은 주인공 이섭의 육십 평생을 더듬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일제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이섭.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일 뿐 한국전쟁 이후에 출생한 우리들의 삶과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섭의 파란만장한 삶을 당연하다는 듯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환갑 이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이섭이었기에 그 정도의 대가는 마땅하다는 듯 말입니다.


"갑자기 60년이라는 시간이 한없이 멀고 아득해 보였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저 자서전을 완성하고 읽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속엔 지형이 모르는 아버지의 45년 삶이 들어 있을까. 아니 나머지 15년에 대해서도 지형이 아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일 것이다. 지형은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고지 한 권을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했다."  (p.265)


일제강점기 시절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이섭은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입신양명의 의지를 버리고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합니다. 해방 후 그가 속한 조직과 그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의 부인과 젖먹이 막내딸이 끌려가게 됩니다. 그 틈을 타 이섭은 월북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직접 확인한 이섭은 크게 실망하여 다시 돌아오지만 부인과 아이들은 이미 이섭을 찾아 북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5년간의 교도소 생활 후 옛집에서 시체처럼 가족을 기다리던 이섭. 자신에게 헌신했던 부인 진과 세 자녀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던 이섭은 혹여라도 그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헛된 시간만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전쟁통에 형님이 죽는 바람에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해야 했던 이섭은 그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린 미자와 반강제로 재혼을 하게 됩니다. 미자 역시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처지였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두 사람의 기구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신원조회 때문에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이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사람은 전처인 진의 아버지, 말하자면 이섭의 전 장인이었습니다. 맏딸이었던 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장인은 이섭을 사위가 아닌 맏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인의 도움으로 서해안의 한 마을에서 새우 양식을 하며 살아가게 된 이섭의 가족. 거실에 가족사진도 한 장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이상한 가족의 맏딸로 태어난 지형은 누구보다도 아는 게 많고, 가족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자신의 아버지가 새우 양식이나 하며 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척지를 임대하여 새우 양식을 하며 서해안 바닷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섭의 가족. 지형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어머니 미자로부터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이섭의 사정과 재혼의 내막을 듣게 됩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지형은 자신을 비롯한 사 남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신뢰를 잃지 않았던 아버지를 보면서 '저렇게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생각합니다. 새우 양식장이 사라지면서 이섭과 그의 가족은 결국 서울로 이사합니다. 이섭에게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전 부인과 삼 남매에 대한 회한과 추억이 어린 곳이라 결코 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 장인의 도움으로 가구점 영업사원이 된 이섭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결국 사회안전법이 공포되고 말았다. 법조계와 학계에서 논란이 거세게 일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권은 남북 화해라는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더니 바로 얼굴을 바꾸고 시퍼런 총칼을 드러냈다. 아니 화해의 제스처야말로 총칼을 꺼내기 위한 명분이었는지도 몰랐다."  (p.251)


작가와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유령의 시간>은 맏딸 지형과 아버지 이섭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전개됩니다. 게다가 소설을 여는 프롤로그와 소설을 닫는 에필로그에서는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지형이 평양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있다는 이복 오빠 지용에게 쓴 편지가 등장합니다.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이섭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 유령이 되었던, 호흡이 멈춘 유령의 시간을 지형은 가만가만 들려줍니다. 소설에서 이섭이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았던 동창 최와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결국 몽상가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이섭에게 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자네 같은 몽상가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나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잖는가. 자네는 늘 어딘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지만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생각만 하지. 무엇보다 안전한 곳이거든."  (p.215~p.216)


환갑이란 나이가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가 일 년 같고, 일 년이 마치 십 년처럼 느껴지던 고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30년, 40년 전의 일도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의 우리는 환갑이란 나이는 아무나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이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처럼 환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흔하디흔한 나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 혹은 조부모 세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햇수로는 불과 4,50년 전의 일이니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쉽게 변하고 있는지요.


어느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돌이켜보면 그 꿈의 향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유령의 시간을 좇느라 지금 이 순간의 아까운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간순간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불쑥 환갑이 찾아오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도래하는 까닭입니다. 소설 속 이섭이 깨어난다면 꿈이 아닌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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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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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나는 '고통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블로그에 업데이트했었다. 부끄럽지만 많은 이들이 나의 글에 공감을 표했다. 정제되거나 잘 쓴 글도 아닌데 말이다. 의외의 반응에 나조차도 놀란 게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나의 글이 아닌 나의 생각에 공감을 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직업군에 대한 나의 생각, 그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도덕적 책무나 소명의식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일차적으로 인간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더없이 진지하고 경건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 의견 일치를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저는 심리치료사로 일하는 것이 제게 있어서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을 넘어서 저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것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심리상담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방식,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죠."  (p.248)


저명한 임상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메리 파이퍼의 저서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어디에나 있는 인류 보편의 고통, 그 고통을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심리치료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책의 저자인 메리 파이퍼가 30여 년 동안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얻은 심리치료의 본질,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삶의 진실을 젊은 심리치료사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지속하는 한 우리 모두는 삶에서 비롯되는 숱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와 같은 고통에 대해 경중을 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과 아픔을 함께 느껴야 함은 물론이다.


"저는 특정 연령이 지나고 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중증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오만한 태도입니다. 저는 내담자들에게 과거를 복잡한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권유합니다. 그러고선 과거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슬픔이 자신의 의무들로부터 달아날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p.16)


저자인 메리 파이퍼는 이 책에서 '작가와 심리치료사는 모두 줄타기곡예를 한다'고 썼다. 자신의 일에 전부를 쏟아부어야 하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분야에서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확연하게 다르다. 글쓰기에서 타인의 고통은 구체적일 필요가 없고, 오히려 개인의 특정 고통을 통해 인류 보편의 고통을 추출하는 한편 심리상담에서 개인의 고통은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고통 중 일부로서가 아니라 상담이나 치료 과정의 전부로 다루어질 뿐이다. 결국 우리는 특정 개인의 고통을 다룬 책을 통해 인류 보편의 고통을 깨닫게 되고,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을 통해서는 오직 나만의 고통에 천착하게 된다.


"글쓰기와 심리치료에서 마음에 드는 안내인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빌 모이어스 메리 올리버, 몰리 이빈스와 함께라면 재활용 센터에 구경을 가도 즐겁기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따분하고 아무 매력 없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파리 여행을 간다 해도 끔찍하기만 하겠죠. 훌륭한 안내인들은 겸손하고, 유능하고, 친절하고, 차분합니다. 이들은 천진함과 세련미가 조화된 특별한 아우라를 내뿜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안내인들은 신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p.189)


우리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나 대상이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권력자나 극우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나 '행복'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자유나 행복을 의미할 뿐 공동체의 자유나 행복은 아니다. 자유는 누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누리는 권리이지 그럴 만한 자격이나 위치에 있지 않는 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면 그는 곧 반국가세력이거나 반자유·반통일세력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그 대상이나 사용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한없이 축소되기도 하고 왜곡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 '고통'도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향해 조롱과 악담을 퍼붓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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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들판엔 바람이 일렁입니다. 어제와 확연히 달라진 오늘은 비단 날씨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제보다 몇 배 더 높아져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은 누군가의 꿈을 닮은 듯했습니다. 부쩍 쌀쌀해진 아침을 맞는 우리는 여전한 가을을 보며 안심하는 한편 가까워지는 겨울을 걱정합니다.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크고 작은 걱정을 끝없이 소비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어 주눅이 들고 같은 실수를 끝없이 반복하는 까닭에 우리의 걱정 또한 나날이 커져만 가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의 불안과 걱정은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걱정이 많은 우리는 매사에 조심하고 경거망동을 경계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우리는 항상 리셋 버튼을 눌러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러나 자비가 없는 시간은 우리의 실수와 어설픔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거리에는 바람에 떨어진 나무 이파리들과 비닐봉지, 종이 쪼가리들이 뒤섞입니다. 그 출처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두툼한 외투를 걸쳐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애완견의 목줄을 잡고 걸어갑니다. 외로움 때문인지 갑자기 찾아온 추위 때문인지 옹송그린 어깨가 펴질 줄을 모릅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는 애완견은 발걸음마저 가볍습니다. 제 주인의 사정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방침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다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범죄를 수사하고 범죄자를 잡아야 할 검찰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못 본 척 눈을 감아버린다면 대한민국은 철저히 계급 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중대 기로에 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권력기관은 모두 권력에 기생하는 하부 구조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권력에서 제외된 대다수 국민들은 더이상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일 테지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따위 책을 읽은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열패감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나를 붙들고 소리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미국을 사랑한다는 말은 미국이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사실, 즉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를 너무도 오랫동안 실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포괄적인 다인종 민주주의를 건설함으로써 그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중에서)


바람이 차갑습니다. 유난히 길었던 올해 여름 탓인지 가을을 건너뛰고 여름에서 훌쩍 겨울로 건너온 느낌입니다. 민주주의는 어쩌면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원칙을 지키고 정해진 절차를 밟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나아가듯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을에 머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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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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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배추 한 포기의 가격이 2만 원을 넘나드는 바람에 장을 보는 주부들의 한숨이 깊어졌던 적이 있었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근래의 일이다. 그렇다고 배추 가격이 뚝 떨어져 지금은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배추의 가격이 이렇게 고공행진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다들 '김치'를 일러 '금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이토록 싸고 질 좋은 식재료인 배추를 얼마나 무시하고 천대했던가 하는 반성이 절로 들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서리가 내린 밭에서 지난가을 일손이 모자라 마저 수확하지 못한 배추가 하얗게 얼어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겉이 얼어 흐물흐물해진 배춧잎을 몇 겹 걷어내고 나면 아직 얼지 않은 싱싱하고 노란 고갱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뚝뚝 끊어 흐르는 냇물에 대충 씻은 후 한입에 우적 씹었을 때의 입안 가득 퍼지던 알싸한 단맛을 나는 몇십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기름을 조금 두른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던 연한 배춧잎의 슴슴한 맛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날것일 땐 달았던 배추도 밀가루를 묻혀 구워놓으면 밍밍하고 싱거워졌다. 생속을 가진 사람은 배추적의 맛을 몰랐다. 배추적을 입에 넣어 "에이 뭔 맛이 이래? 싱겁고 물맛만 나네!" 하면 자기 속이 생속이라는 고백이었다. 곱게 자란 처녀들이 그랬고 남자들도 대개는 그랬다. 하긴 남자들 상엔 배추적 같은 허드렛 음식은 아예 올리지도 않았다."  (p.17)


김서령의 에세이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뭉클한 마음도 들었다가,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가, 손에 닿을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과거의 어떤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들게도 된다. 유튜브에선 시시각각 먹방이 올라오고 어느 OTT 플랫폼의 예능 프로그램에선 요리 대결이 인기를 끌고 있다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순식간에 부쳐내던 배추적의 맛에 필적할 요리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나는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추억의 맛인 동시에 깊어가는 겨울밤에 맛보던 불혹의 맛이었다. 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목 넘김이 있기 전에 아주 잠깐 속게 되는 '얕은 맛'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 웅숭깊은 '불혹의 맛'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맛 속에 별의별 것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무와 콩을 길러낸 척박한 땅에 비치던 은은한 햇볕과, 땅속 깊이 인색하나 달디달게 숨어 있던 지하수와, 눈물이 돌 것 같은 겸허와, 수도승같이 맑은 인내와, 텅 빈 밭이랑 위로 불어오는 바람결 같은 가난과, 그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슴슴한 익지 맛 안에 모조리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p.121)


남들이 들으면 '잘났어 정말' 하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지만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엔 오히려 사람들이 맛을 잃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맛 저 맛이 한데 섞여서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땅속에 묻어두었던 무를 꺼내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시원하고 상큼한 단맛은 무가 품었던 원래의 맛, 어떤 것에 의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순수의 맛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가 갈수록 각각의 식재료가 갖는 순수의 맛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를 시리게 했던 청정 계곡물의 물맛을 잃은 우리가 수돗물의 염소 소독제 냄새를 원래의 물맛인 양 기억하는 것처럼.


"제삿날 어스름 저녁이면 엄마는 마루 밑 밤 구덩이에서 밤을 한 바가지 캐냈어요. 흙속에서 적절한 수분과 온도가 유지된 밤은 갓 따낸 듯 싱싱해요. 아, 밤이 그토록 여러 겹의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었던 건 바로 이것, 제 몸을 보관에 용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어요. 감이 곶감이란 형태로 가공되어 겨울을 나고, 대추가 쪼글쪼글 마른 채 겨울을 난다면 밤은 수분이 사라지면 존재 이유까지 위협받잖아요. 겨우내 제사상에 올라가려면 몸을 보늬로, 야문 껍데기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매사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니깐요. 그래야 세상의 전체 구도가 보이지 않겠어요?'  (p.253)


한 차례 가을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급변하고 있다. 가을빛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풍요로운 계절에 서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만 있다. 2kg 토마토 가격이 25000원을 호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사과, 배추에 이어 토마토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이제 우리는 뭘 먹으며 겨울의 허기를 달래야 할까? 썩은속을 달래주던 배추적의 밍밍한 맛은 이제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일까? 우리의 속은 더욱 썩어 문드러져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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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물드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노란 웃음이 배시시 피어나는 듯도 하고, 감격에 겨운 붉은 울음이 우렁우렁 계곡을 흔들 것도 같다. 삶을 견뎌온 진득한 땀방울이 비로소 스며드는 계절. 우리는 어쩌면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한 해의 절반을 소진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치듯 가을이 가고, 익숙하던 네 자리 숫자와 결별하기 위해 송년 모임을 계획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남한과 북한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은 지지율 바닥을 보이는 남한의 정부 여당에게도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전면전으로 확대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휴전선 일대에서 국지전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것을 핑계로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할 수 있고, 야당을 비롯한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같은 긴장 사태 조성은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주가 하락과 환율 급등 및 수출 타격 등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인적, 물적 손해가 미미한 수준에서 그칠 수만 있다면 정부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추문에 시달리는 영부인에 대한 여론도 서서히 반전시킬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할지 모른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부로서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뉴스가 터져나오고 있다. 명 모 씨로부터 불거진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 김 모 행정관의 녹취 파문 등 자고 일어나면 굵직굵직한 뉴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 상태와 긴장 국면에도 국민들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은 이보다 더 큰 뉴스는 없을 텐데도 말이다. 국민의 안전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이 상황, 정부가 북한을 이용하여 국면 전환을 꾀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국민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짧은 계절 가을이 우리 곁을 스치듯 흘러가고 있다. 노란 웃음이 배시시 피어나는 듯도 하고, 감격에 겨운 붉은 울음이 우렁우렁 계곡을 흔들 것 같은 가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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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4-10-1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자 19 %
이제 멀지 않았겠죠?;;;

꼼쥐 2024-10-19 14:27   좋아요 1 | URL
그 정도 지지율이면 스스로 물러나야 하지 않나요? 하긴 그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평하길 ‘무식해서‘, ‘지가 뭘 안다고‘라는 말까지 듣는 판이니...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