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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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꿉니다.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기나긴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꿈을 꾸는 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세월은 마치 내가 아닌, 나를 대신했던 어느 유령의 삶이었던 듯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에 따라, 나의 의지대로 살지 못했다고 누구에게 항변하거나 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925년에 태어나 1975년에 생을 마감한 그의 이름은 '김이섭'입니다.


그렇습니다.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은 주인공 이섭의 육십 평생을 더듬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일제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이섭.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일 뿐 한국전쟁 이후에 출생한 우리들의 삶과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섭의 파란만장한 삶을 당연하다는 듯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환갑 이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이섭이었기에 그 정도의 대가는 마땅하다는 듯 말입니다.


"갑자기 60년이라는 시간이 한없이 멀고 아득해 보였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저 자서전을 완성하고 읽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속엔 지형이 모르는 아버지의 45년 삶이 들어 있을까. 아니 나머지 15년에 대해서도 지형이 아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일 것이다. 지형은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고지 한 권을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했다."  (p.265)


일제강점기 시절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이섭은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입신양명의 의지를 버리고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합니다. 해방 후 그가 속한 조직과 그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의 부인과 젖먹이 막내딸이 끌려가게 됩니다. 그 틈을 타 이섭은 월북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직접 확인한 이섭은 크게 실망하여 다시 돌아오지만 부인과 아이들은 이미 이섭을 찾아 북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5년간의 교도소 생활 후 옛집에서 시체처럼 가족을 기다리던 이섭. 자신에게 헌신했던 부인 진과 세 자녀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던 이섭은 혹여라도 그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헛된 시간만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전쟁통에 형님이 죽는 바람에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해야 했던 이섭은 그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린 미자와 반강제로 재혼을 하게 됩니다. 미자 역시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처지였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두 사람의 기구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신원조회 때문에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이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사람은 전처인 진의 아버지, 말하자면 이섭의 전 장인이었습니다. 맏딸이었던 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장인은 이섭을 사위가 아닌 맏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인의 도움으로 서해안의 한 마을에서 새우 양식을 하며 살아가게 된 이섭의 가족. 거실에 가족사진도 한 장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이상한 가족의 맏딸로 태어난 지형은 누구보다도 아는 게 많고, 가족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자신의 아버지가 새우 양식이나 하며 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척지를 임대하여 새우 양식을 하며 서해안 바닷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섭의 가족. 지형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어머니 미자로부터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이섭의 사정과 재혼의 내막을 듣게 됩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지형은 자신을 비롯한 사 남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신뢰를 잃지 않았던 아버지를 보면서 '저렇게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생각합니다. 새우 양식장이 사라지면서 이섭과 그의 가족은 결국 서울로 이사합니다. 이섭에게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전 부인과 삼 남매에 대한 회한과 추억이 어린 곳이라 결코 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 장인의 도움으로 가구점 영업사원이 된 이섭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결국 사회안전법이 공포되고 말았다. 법조계와 학계에서 논란이 거세게 일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권은 남북 화해라는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더니 바로 얼굴을 바꾸고 시퍼런 총칼을 드러냈다. 아니 화해의 제스처야말로 총칼을 꺼내기 위한 명분이었는지도 몰랐다."  (p.251)


작가와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유령의 시간>은 맏딸 지형과 아버지 이섭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전개됩니다. 게다가 소설을 여는 프롤로그와 소설을 닫는 에필로그에서는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지형이 평양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있다는 이복 오빠 지용에게 쓴 편지가 등장합니다.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이섭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 유령이 되었던, 호흡이 멈춘 유령의 시간을 지형은 가만가만 들려줍니다. 소설에서 이섭이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았던 동창 최와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결국 몽상가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이섭에게 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자네 같은 몽상가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나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잖는가. 자네는 늘 어딘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지만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생각만 하지. 무엇보다 안전한 곳이거든."  (p.215~p.216)


환갑이란 나이가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가 일 년 같고, 일 년이 마치 십 년처럼 느껴지던 고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30년, 40년 전의 일도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의 우리는 환갑이란 나이는 아무나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이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처럼 환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흔하디흔한 나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 혹은 조부모 세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햇수로는 불과 4,50년 전의 일이니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쉽게 변하고 있는지요.


어느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돌이켜보면 그 꿈의 향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유령의 시간을 좇느라 지금 이 순간의 아까운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간순간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불쑥 환갑이 찾아오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도래하는 까닭입니다. 소설 속 이섭이 깨어난다면 꿈이 아닌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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