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생각하지 않는 연습 - 지는 멘탈에서 이기는 멘탈로
김미선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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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열대야에 시달리다 보니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게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아침이면 도통 잠을 잔 것 같지 않다며 피곤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게다가 보고 싶은 올림픽 중계라도 있는 날이면 피곤은 배가 된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휴가자가 많아 업무가 가중되는 요즘, 만사 제쳐두고 농땡이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을 찾아 꾸역꾸역 처리하다 보면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만 흐르고 풀릴 새 없는 피곤은 쌓여만 간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풀어진 몸으로 귀가를 하여서도 쉽게 잠들 수 없는 조건은 이어진다. 아침까지 이어지는 열대야와 올림픽 중계. 나는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요즘처럼 떠오르는 생각을 곱씹어볼 만한 여력도, 행동에 앞서 이것저것 되짚어볼 만한 여유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갈 때에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생각들은 바닥난 체력으로 인해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토막토막 끊어져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스러진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내가 지금 인생을 이렇게 허비해도 될 나이인가?' 등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시간의 유속을 따라 자맥질하듯 구르며 떠내려간다.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우리는 종종 휴식을 잊고 삽니다. 성공하려면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면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고 착각하는데, 이는 큰 오해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양의 휴식을 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휴식은 마라톤으로 치면 숨고르기와 같습니다. 호흡이지요. 휴식은 숨과 같은 존재입니다. 들이쉬고, 내쉬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쉬어야 우리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p.259)


국내 최고의 스포츠심리상담사 김미선이 쓴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 연습>은 올림픽이 한창인 지금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일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에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경쟁에 나서는 선수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실패에 대한 불안감도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감을 안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터, 그들의 이면에는 김미선 스포츠심리상담사와 같은 이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은 1장 '시작하는 마음', 2장 '행동하는 마음', 3장 '실패하는 마음', 4장 '도약하는 마음', 5장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누구나가 강철 멘탈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 어떤 일이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조금쯤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만 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약점을 개선하고,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실패는 마침표가 아닙니다. 성장의 기회입니다. 또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며, 잠재력을 끌어내고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지요. 그들은 쉽게 상실감에 빠지지 않으며, 외부의 잡음보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승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불안으로 성장하고, 실패로 성장해 마침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도전의 이유고, 삶의 목적이지요."  (p.18 '프롤로그' 중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경기나 인터뷰를 모두 시청한 건 아니지만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김예지 선수의 인터뷰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속사권총에서 시간초과로 0점을 받고 예선탈락했지만 그녀는 "한 발을 놓쳤다고 울지는 않았다. 인생은 계속되고 이건 하나의 대회일뿐, 사격은 내게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0점 쐈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이 났음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일에서 생각지도 못한 좋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행운이 날아들 수도 있다. 삶은 그렇게 성공과 실패의 반복으로 꾸려지는 홀짝 게임일지도 모른다.


"가끔 보면 산다는 건 참 억울하지요.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내가 원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고, 타이밍은 항상 어긋나고, 그러나 삶은 원래 억울한 것이고 불공평한 것입니다. 꿈의 여정은 직선으로만 쭉 뻗어나가지 않아요. 울퉁불퉁 굽이치면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날아오르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임계점을 넘어서 다른 존재가 되는 순간 말이지요."  (p.175~p.176)


우리는 종종 올림픽 경기의 승패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선수들이 했던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태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선수들 개개인에게도 올핌픽은 단지 하나의 이벤트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실패를 자주 경험하라는 건 아니지만 실패 역시 삶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역시 독자들에게 바라는 바는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다. 입추가 지났는데도 폭염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척이나 더웠던 2024년의 여름도 결국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올림픽 폐막일이 멀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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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으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의 문구가 누군가에게는 지금도 익숙할지 모르겠다. 손바닥을 맞아 가며 달달 외우도록 교육받았던 게 아마도 초등학교(그 시절에는 국민학교) 시기였지 싶다. 뜻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한자투성이의 문장을 어리디어린 초등학생이 외운다는 건 무리가 있는 일이었지만 군부 독재의 험악한 시절에 이러한 사정은 결코 용인되지 않았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군대식 교육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던지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한 학생은 방과후에 남아서 다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여 담임 선생님께 확인을 받아야 했다.


내가 기억도 흐릿한 '국민교육헌장'을, 한 세기 전의 추억을,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까닭은 그 시절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른 건 몰라도 국사 교육에는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로 보면 분명 그 시절에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분명한데 국사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듯한, 어쩌면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시절의 종군 위안부가 강제냐 자발적이냐는 질문에 대해 논쟁적인 사안이라 답변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있어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 문제를 삭제하는 데 우리나라 외교부 직원들이 동의해 주는 등 현 정부의 요직을 담당하는 자들이 국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 국가의 요직을 맡고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국사 교육은 전혀 받은 바 없는 듯한 사람들의 행보는 예서 그치지 않는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일컬어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오염수가 아닌 처리수로 정정하기도 하고, 대한민국 군대를 자위대의 꼬붕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추진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고생을 했던 우리 선조들에 대한 일본의 배상 판결도 무위로 돌리려고 부단히 노력 중에 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총독부라고 해도 믿을 판이다.


연일 폭염 경보와 주의보로 한반도가 들끓고 있다. 가뜩이나 불쾌지수가 높은 이 시점에 한 마리의 바퀴벌레와 같은 자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들 모두를 한 배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버렸으면 싶다. 물론 약아빠진 일본 정부가 그런 얼빠진 사람들을 받아줄 리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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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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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메모란 지극히 사적이면서 다분히 비밀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수첩이나 노트에 수기로 작성하던 메모의 장소 혹은 영역이 스마트폰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그러나 글씨 쓰는 일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대인에게 있어 메모 장소의 변화는 단순한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감각에서 사각거리는 손글씨의 느낌마저 사라지게 했다. 건조한 종이 위를 연필 혹은 볼펜의 검은 선이 '글자'라는 추상적 문양을 그리며 미끄러져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태인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붉은색 혹은 파란색 선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라져 가는 듯 보였던 메모의 풍경이 최근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책을 한 장소에 여럿이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물론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모임으로써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고, 필사에 좋은 여러 아이디어를 취합할 수도 있고, 필사를 핑계로 친목 모임도 이어갈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자신의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고 자신이 기록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본다는 건 디지털 전환의 시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는, 이른바 시대를 역행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35~p.36)


CBS 라디오 피디이자 작가인 정혜윤 피디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책장을 덮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동안 몇 권의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 보았지만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게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어울리는 제목을 뽑아 친구에게 수다를 떨듯 가볍게 풀어가는 게 일반적인지라 책이 출간될 때를 기다려 모두 읽어왔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정혜윤 피디가 쓴 <아무튼, 메모>를 꼭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꽤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혜윤 작가의 열혈 애독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내가.


"인생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떨까? '말과 몸'이 협력해서 빚어내는 이야기. 몸은 여러 모로 신비한 요소가 있다. 몸은 노화를 겪으며 낡는데 그 낡은 몸이 겨로 낡을 수 없는 기억을 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몸을 가리켜 피를 담는 자루가 시간을 담는다고 했다. 시간은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는 공간은 자신의 몸이다. 쿤데라의 말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몸과 단둘만이 남겨진 시간을 마주한다. 몸에 관한 한 우리는 시작과 끝을 먼저 알고 중간 부분을 나중에 아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p.115)


사람들이 메모를 하는 데는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전제가 모든 메모의 동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메모를 하는 모든 주체의 동기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가 될지도 모른다. 밤낮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동기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미래, 그 간절한 소망이 지난한 작업의 동기였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메모는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메모에 실린 간절함의 무게는 기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면 좋겠다. 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더 좋다. 그 안에서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곧 잊힐 상처와 결코 잊히지 않을 슬픔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알게 되고, 나를 살피고 설득하고 돌보고 더 나아지려 애쓴다. 반대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언제 심장이 뛰는지도 알게 된다."  (p.162~p.163 '에필로그' 중에서)


지금 불행한 사람들은 훗날의 행복을 기약하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온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에 갖는 필사 모임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비록 허위에 그칠지라도 우리의 몸 어느 구석에는 그때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필사를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런 모임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은 처음이니까.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다가 문득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호사스러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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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흔한 농담 중 하나는 "양심이 밥 먹여주냐?"라는 말이다. 예컨대 친구 몇몇이 어울려 밥을 먹거나 술을 먹고 계산을 해야 할 때, 미리 자신이 사겠다고 큰소리쳤던 친구 왈, "이런, 어쩌지. 지갑을 놓고 왔네."라고 할라치면 다른 친구가 슬쩍 나서서 대신 계산을 마친 후 "야, 너는 양심 좀 있어라."농을 섞은 타박을 하게 된다. 지갑을 놓고 왔다는 친구는 이에 지지 않고 "양심이 밥 먹여주냐?"며 싱긋 웃는 것으로 멋쩍은 상황은 종료되고 만다. 양심.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양심은 적어도 인간 누구에게나 삶의 밑천으로 깔고 있는, 아무리 나쁜 인간도 회개만 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하느님이 부여한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 정권의 길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되돌려보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인의 양심이란 인류 보편의 산물이 아니며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나쁜 양심의 소유자가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결코 선한 양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이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다. 종교에 감화되어 조변석개하거나 없던 선함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하나의 동호회가 갖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양심은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상식에 기초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과 자부심을 증가하며, 결과적으로 구성원 개개인이 삶의 가치를 음미하면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양심에 기초한 도덕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 양심이 악한 인간들에게 있어 도덕이란 지킬 필요조차 없는,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것도 아닌, 어찌 보면 결코 지켜서는 안 되는 허망한 구호이자 장식용의 표어일 뿐이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게 법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문에 있는 법 조항만 지키면 우리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라는 의미였음을 현 정권의 수뇌부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명백한 주가조작과 명품백 수수가 사실로 입증되었음에도 어떠한 사과의 말도,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과 법인카드를 사적 용도로 마구 사용하였음에도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적반하장식 뻔뻔함을 드러내는 사람, 한 해 상속세 최고세율 적용 대상자가 2980명 선에 그치는 고액 자산가를 돌보기 위해 상속세 인하가 마치 국민 전체를 위한 정책인 양 포장하는 사람, 아빠가 빌려준 돈으로 주식을 사서 아빠가 다시 비싼 값으로 그 주식을 구매하는 수법을 통하여 편법 상속을 하였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돌반지 대신 주식을 사줬을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 등 현 정권의 수뇌부는 우리가 믿어왔던 양심을 전면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 정권이 집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MB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시절만 하더라도 정권의 수뇌부에 오르려는 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그것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했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혹은 법적으로 기소가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는 식의 뻔뻔함을 그들 전체의 무기인 양 한결같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라게 된다. '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종일 맴돈다. 5.18 민주화운동 폄훼 글에 좋아요를 누른 당사자에게 비난이 이어지자 앞으로는 손가락 운동에 신경을 쓰겠다고 말한 후안무치의 인간에게 인간의 보편적 양심이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장마가 그친 대기는 그저 무덥다. 무더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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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7-26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사에서 정의와 부정의 비율은 어느 시대든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부정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자정작용을 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 자정작용이 무너져 구더기 끓듯 마구 올라오고 있네요.

꼼쥐 2024-07-27 15:05   좋아요 1 | URL
암튼 요즘은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싫어서 눈 감고 귀 닫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이런 생활을 앞으로 3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기도 하고 말이죠. 어떻게 현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걸까요. 그 뻔뻔함이란 정말...ㅜㅜ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
이토 히데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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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상쇄되지 않는다. 더구나 가족을 잃은 극단의 슬픔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압도한다. 결국 적절한 애도의 과정과 시간의 경과만이 그 거대한 슬픔의 회오리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그렇다고 슬픔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토 히데노리가 쓴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와 같은 상실의 고통과 애도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잊었던 슬픔이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몰려오곤 한다. 물론 이 책은 사람이 아닌 반려견이나 반려묘 등 반려동물과의 영원한 이별, 말하자면 펫 로스를 경험한 이들에 대한 설문 조사와 그들의 특별했던 경험담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빠른 치유와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를 돕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가족이나 친인척 등 가까웠던 사람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을 애도하고 그들을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안내하는 책은 무수히 많이 나왔지만 펫 로스와 상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동등한 무게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펫 로스를 경험한 반려인들의 슬픔이 사회 구성원 전반의 지지와 위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를 처리하는 제반 시설 역시 체계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환경에서 펫 로스를 경험한 반려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사랑했던 반려동물의 죽음을 수용하고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필요했음을 절감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생각해 볼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정작 '그날'을 맞고 나서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 여겼던 충격에 실제로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7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구성은 꽤나 길고 복잡하다. 프롤로그에 이어 제1장 ''펫 로스'란 무엇인가?', 제2장 '첫 준비는 '좋은 홈닥터'', 제3장 '실록-나의 펫 로스', 제4장 '펫 로스에 관한 설문 조사 45인의 이야기', 제5장 '마지막 '준비'는 '이별의 의식'', 제6장 '반려동물을 잃으면 꽃으로 장식하자', 제7장 '미국 '펫 로스'의 최전선' 제8장 '탤런트 가미누마 에미코 씨의 경우', 제9장 '배우 단 미쓰 씨의 경우', 제10장 '슬픔을 다독일 방법은 있는가?', 제11장 '새로운 반려동물을 맞는다'를 끝으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8장과 9장에서 연예인의 펫 로스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늘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연예인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던 반려동물의 죽음에서조차 마음껏 슬퍼하지 못한다는 건 다른 일반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다.


"가미누마 씨는 '새로운 개를 키우는' 것을 '치사한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펫 로스에 관한 취재를 계속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펫 로스로 고생하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은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했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았으며 온 힘을 다해 행복하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p.213)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개나 고양이는 주로 목줄을 하지 않은 채 풀어놓고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동물을 키우는 용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개는 주로 가족이 남긴 음식물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 성장한 후에는 식용으로 팔기 위한 목적이었고, 고양이는 무엇보다도 집 안팎에 들끓는 쥐를 퇴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지금처럼 온전히 사람과 동물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길에서 개의 배설물을 밟는 일은 다반사였고, 우리 집 개와 다른 집 개가 길에서 흘레붙는 장면을 보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가구의 소득이 증가하는 것과 비례하여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급격히 증가했다. 애견인, 애묘인이 증가하면서 동물의 권리도 빠르게 신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인간에 비해 수명이 짧은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필연적으로 펫 로스로 인한 상심과 그리프 워크 과정 및 그에 필요한 제반 시설과 제도 정비가 절실한 시점에 이르고 말았다. 그것은 이제 일부 반려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를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민트의 죽음을 계기로 3년에 걸쳐 펫 로스에 대해 취재했는데, 지금 뜻하지 않은 곳에 착지한 기분이다. 처음에는 펫 로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애당초 펫 로스는 '극복'해야 할 것, 즉 끝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쿠뇨의 말대로, 오히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으로 파악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펫 로스는 극복되지 않는다. 펫 로스와 공존하면서 그 슬픔까지 자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 그것이 반려동물과 행복한 인생을 산 주인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p.277 '에필로그' 중에서)


비가 갠 하늘엔 잠자리 몇 마리가 날고 있다. 무더위를 예감하려는 듯 말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 식물까지도 생명이 있는 한 서로서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그러나 습관처럼 주고받던 어떤 행위가 멈추고, 감정의 교류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상심과 우울은 대체할 수 없는 좌절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땅속에서 6~7년 동안 유충으로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2~3주일의 번식활동 후 죽음을 맞는 매미에 비하면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주는가. 곧 있으면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겠지. 우리의 깊은 상심을 이해한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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