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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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메모란 지극히 사적이면서 다분히 비밀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수첩이나 노트에 수기로 작성하던 메모의 장소 혹은 영역이 스마트폰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그러나 글씨 쓰는 일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대인에게 있어 메모 장소의 변화는 단순한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감각에서 사각거리는 손글씨의 느낌마저 사라지게 했다. 건조한 종이 위를 연필 혹은 볼펜의 검은 선이 '글자'라는 추상적 문양을 그리며 미끄러져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태인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붉은색 혹은 파란색 선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라져 가는 듯 보였던 메모의 풍경이 최근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책을 한 장소에 여럿이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물론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모임으로써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고, 필사에 좋은 여러 아이디어를 취합할 수도 있고, 필사를 핑계로 친목 모임도 이어갈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자신의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고 자신이 기록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본다는 건 디지털 전환의 시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는, 이른바 시대를 역행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35~p.36)


CBS 라디오 피디이자 작가인 정혜윤 피디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책장을 덮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동안 몇 권의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 보았지만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게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어울리는 제목을 뽑아 친구에게 수다를 떨듯 가볍게 풀어가는 게 일반적인지라 책이 출간될 때를 기다려 모두 읽어왔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정혜윤 피디가 쓴 <아무튼, 메모>를 꼭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꽤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혜윤 작가의 열혈 애독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내가.


"인생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떨까? '말과 몸'이 협력해서 빚어내는 이야기. 몸은 여러 모로 신비한 요소가 있다. 몸은 노화를 겪으며 낡는데 그 낡은 몸이 겨로 낡을 수 없는 기억을 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몸을 가리켜 피를 담는 자루가 시간을 담는다고 했다. 시간은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는 공간은 자신의 몸이다. 쿤데라의 말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몸과 단둘만이 남겨진 시간을 마주한다. 몸에 관한 한 우리는 시작과 끝을 먼저 알고 중간 부분을 나중에 아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p.115)


사람들이 메모를 하는 데는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전제가 모든 메모의 동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메모를 하는 모든 주체의 동기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가 될지도 모른다. 밤낮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동기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미래, 그 간절한 소망이 지난한 작업의 동기였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메모는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메모에 실린 간절함의 무게는 기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면 좋겠다. 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더 좋다. 그 안에서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곧 잊힐 상처와 결코 잊히지 않을 슬픔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알게 되고, 나를 살피고 설득하고 돌보고 더 나아지려 애쓴다. 반대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언제 심장이 뛰는지도 알게 된다."  (p.162~p.163 '에필로그' 중에서)


지금 불행한 사람들은 훗날의 행복을 기약하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온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에 갖는 필사 모임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비록 허위에 그칠지라도 우리의 몸 어느 구석에는 그때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필사를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런 모임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은 처음이니까.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다가 문득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호사스러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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