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역시 추워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추운 건 역시 싫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율배반. 생각과 실천이 늘 같을 수야 없겠지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율배반의 태도 앞에서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표리부동을 지향하는 양심이 발동하는 까닭에.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한낮의 조막만 한 겨울 햇살 속에서도 손이 금세 얼어붙는 듯했다. 추위 탓인지 몸을 한껏 옹송그린 채 잰걸음을 놓는 사람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꽁꽁 언 세밑 풍경을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인들은 동장군의 기세에도 그닥 감흥이 없는지 뜸한 손님을 기다리듯 그저 물끄럼하였다. 나는 집 근처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 후 동네 서점에 들러 소일했다. 손님도 없는 책방에는 이문도 없는 훈기가 미안스레 뱅뱅 돌았고 나처럼 게으른 고객 몇몇이 눈치도 없이 거닐었다. 겨우 책 한 권을 골라 서점 주인에게 내밀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나른한 피곤이 서려 있었다. 산다는 게 이렇듯 피곤을 더하는 일일 줄이야...

 

야당의 어느 대선 후보는 말하기를 "극빈한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유가 제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는 걸 오늘처럼 날씨가 추운 날이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의 처지가 극빈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추운 날씨로 인한 행동의 제약도 이렇게 답답하고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어떤 힘 있는 자에 의한 억압이나 부당한 제재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다면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이를 간과한 채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그의 말인 즉 자신은 그동안 자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향유했던 자유를 좀 나누어주고 싶다는 취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옛다, 자유"라는 의미로.

 

오늘 그 후보의 부인이 자신의 허위 이력 논란에 대한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하는 자리가 있었다. 잘 보이려고 자신의 경력을 부풀렸으며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라는 게 요지였다. 그러나 극빈한 사람들은 사과문 낭독만으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어려운 게 사실,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부과받는 형식으로 법적 처벌을 받을 뿐이다. 극빈한 사람들이 보기에 부유한 사람들은 온갖 죄를 저질러도 달랑 사과문 한 장 들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는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는 용서를 구할 자유가, 극빈한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게 아닐까. 날씨가 무척이나 춥다. 응어리진 설움이 시퍼렇게 물든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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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2-2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다, 자유 ˝ 이 말이 핵심이네요.
˝ 옛다, 사과문 ˝

꼼쥐 2021-12-29 20:52   좋아요 0 | URL
그렇게 툭 던져놓으면 자신이 국민들을 향해 선심이라도 쓴 듯 느끼나 봅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1984
조지 오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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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익숙하여 그의 삶이나 업적 혹은 그가 쓴 작품 전반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도 유명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잘 아는 듯 행동하는 자기기만이 합쳐져 스스로도 그럴 것이라고 내심 안심하는 처지에 이르는 게 인간의 보편적 인식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의 인식 체계에 심한 과장이나 오류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급작스레 허를 찔린 것처럼.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의 명성과 더불어 너무나 유명해진 작품.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감시자로 지칭되는 '빅 브라더'가 더 널리 회자되어 소설의 제목보다 소설 속 인물이 더 유명세를 타게 된 기이한 작품. 그럼에도 우리는 소설 『1984』에 대해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숫제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 하더라도 스토리 전개만 대충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 『1984』를 손에 잡는 순간 우리는 조지 오웰이라는 탁월한 재능의 소설가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의 치밀한 구성과 생생한 묘사, 도래하지 않은 미래 사회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 등은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조지 오웰'이라는 소설가를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갇힌 '조지 오웰'은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짧은 생을 살았던 기괴한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전부였지만 막상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그의 천부적 재능에 대해 무엇보다 놀라워한다. 길게 갈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설의 첫 도입부부터.


"맑고 쌀쌀한 4월 어느 날, 시계들이 열세 차례 치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가슴팍 깊숙이 턱을 묻은 채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지나갔지만 한 줄기 모래 먼지 소용돌이가 딸려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p.7)


그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서늘한 느낌과 함께 숨 가쁘게 진행된다. 13이라는 불길한 숫자가 상징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전체주의 경찰국가들에 의해 세계가 지배된다는 가상적 미래를 설정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의 중앙부처인 '진리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각종 기록물을 당의 입맛에 맞게 수정, 조작하는 일을 맡고 있는 그는 일을 계속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과 당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일기에 기록한다. 당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기를 쓰기도 하고 골동품 상점에서 몰래 물건을 구입하기도 하던 그는 어느 날 진리부의 한 여인으로부터 쪽지를 건네받는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사랑 고백을 담은...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한동안 그는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엄청난 환각에 휩싸였다. 그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내부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살갗을 뚫고 들어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는 그들이 함께 자유롭게 있었을 때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가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p.428~p.429)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된 윈스턴은 계속되는 투옥·고문·재교육으로 인해 육체는 물론 영혼의 존엄성마저 파괴된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증오하던 '빅 브라더'를 사랑할 때까지 계속된다. 권력지향과 타인에 대한 지배는 결국 끊임없는 감시와 부정직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인간의 미덕은 서서히 소멸하게 된다는 사실을 소설은 윈스턴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콧수염 아래 숨겨진 미소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아, 모질고도 부질없는 오해였다! 아, 저 애정 어린 품속을 벗어나 고집스럽고 아집에 찬 유형의 삶을 살았다니! 술 냄새가 배인 두 줄의 눈물이 콧날 양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만사가 다 괜찮았다. 이제 투쟁의 시간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p.457)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체계에 반하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대개 불같이 화를 내게 되지만 자신의 잘못된 인식이나 지적 오류를 감지하는 순간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내적으로 심한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본 척한다거나, 읽지 못했던 책을 읽은 체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고 자신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의 경험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라는 가사의 어느 캐럴처럼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빅 브라더'의 눈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 온다면 아이들이 산타를 좋아하는 것만큼 빅 브라더를 좋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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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7년의 국민의힘(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다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물론 이명박-박근혜를 제외하면 다른 후보들은 눈에도 띄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후보자들 간 네거티브 공세도 치열하였는데 도곡동 땅 실 소유주 의혹 등에 대해 이 후보는 "도곡동 땅이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이라고 일축하며 관련 의혹이 자신과 무관함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 모든 게 '네거티브 공세'일뿐이라는 것이었죠. 덧붙여서 그는 "누구도 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라면서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는 지금 불행하게도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의 야당 대선 후보는 입만 열면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던 인물입니다. 그의 아내와 장모, 혹은 본인의 온갖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게 여당의 공작이라거나 무리한 수사, 혹은 기획 수사라고 치부해 왔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고, 자신과 그의 가족 모두가 떳떳하다는 주장이었죠. 말하자면 "모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이라고 외쳤던 MB의 재판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말한 바는 없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 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아내에 대한 허위 이력 보도가 곳곳에서 쏟아지자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이 꽤나 머쓱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화도 내보고 설명도 해보려 했지만 국민 여론은 이미 싸늘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국민 대다수가 돌을 던질 듯한 분위기인 셈이지요.

 

지금 시점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공정과 상식'을 회복하려면 아내를 버리거나 대선 후보에서 물러나는 게 합당하겠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또 아내를 버린 비열한 인간이 되고 말 테니까 말이죠. 진퇴양난은 아마도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말이 되면서 따뜻했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눈도 조금 내려 추운 날씨에 한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작금의 대선 정국은 올해의 날씨만큼이나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변덕 심하던 이 날씨도,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선 정국도 제 자리를 잡고 잠잠해지겠지요. 그때까지 국민 모두가 잘 견디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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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1-12-17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사람들은 자기 내면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 같습니다. ‘공정과 정의‘는 애초 기득권을 오랜동안 향유하고 있는자가 입에 담을 언어가 아니죠. 영웅주의라는 힘에 도취해 주변 진실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을 겁니다. 꼼쥐님이 지적하신 반복되는 거짓말이 수구진영에서 거듭되는 이유에 공감합니다. 아마 그에게는 지금 이순간에도 타인은 보이지 않을겁니다.

꼼쥐 2021-12-25 16:46   좋아요 0 | URL
기득권을 향유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순간에만 정의롭거나 공정하다고 보이고 싶어 할 뿐이죠. 그 외의 일상에서는 어떻게 행동하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듯합니다. 토끼가 수궁에 갈 때 간을 빼놓고 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2021-12-1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5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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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경험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개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상처를 치유해 주는 집단적 감정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파괴한다. 집단적 감정 속에서는 우리 개개의 자아들이 서로 뭉뚱그려지면서 개성이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문학을 읽으면 나는 천의 인물이 되면서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도 무수한 눈으로 보지만, 보는 주체는 여전히 나다. 예배할 때나 사랑할 때, 또 도덕적 행위를 할 때나 지식을 얻는 순간처럼, 독서를 통해서도 나는 나를 초월하되 이때처럼 나다운 때는 없다."  (p.22)

 

책을 읽는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불가사의한 경험'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을 넘어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장면을 상상하고, 때로는 춥거나 무덥거나 습하거나 건조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도 하며, 기쁘고 슬픈 감정을 현실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보조장치의 도움도 없이 순전히 자신의 독자적인 인식 체계만으로 구동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과 구별되며, 그 어떤 가상현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세밀하게 구현된다는 점에서 현대의 과학기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가상현실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고 하겠다.

 

독서의 이점은 사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하나의 문장으로 말하기는 또 쉽지 않다. <나니아 연대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C.S.루이스 역시 '당대에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 무엇이든 읽고, 읽은 것은 전부 기억한 사람'으로 평가될 정도로 독서가 몸에 배어 있었던 사람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독서의 이점을 설파하였던 것을 보면 그 역시 독서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는 게 쉽지 않았던 듯하다.

 

"요컨대 시 예술 전반에서 최고 경지는 결국 일종의 물러남이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전체가 그의 뇌리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시인은 길을 비켜나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산들이 잎을 흔들고, 빛이 비쳐 들고, 천체가 회전한다. 이 모두가 시를 짓는 데 필요한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다."  (p.157)

 

나는 사실 이 책, C.S.루이스의 <책 읽는 삶>을 두 번째 읽고 있다. 시간이 날 때 일부분을 읽었던 것까지 포함하면 여러 번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군데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발견하기도 하고,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독서라는 한정된 행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제한된 것일 테지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육체에 갇힌 나를 잊은 채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유영했던 것이다.

 

"여기 충격적 사실이 있다. 진실하지 않고는 글을 잘 쓰기가 치명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실성 자체는 누구에게도 좋은 작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진실성은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도덕적 덕목이다. 진실성에 대한 보상을 바랄 곳은 내세이지 문단이 아니다."  (p.130)

 

단지 한 권의 책만 갖고 하루를 이토록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건 소위 '가성비'의 측면에서 단연 '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덮쳐 순식간에 나를 날려 보낸다고 할지라도 나는 두려움 없이 그 직전까지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 사이에 바깥 기온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보일러 온도를 높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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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하지 않다는 것은 곧 신기하다거나 독특하다는 느낌을 넘어 때로는 이상한 혹은 싫은 등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발전하기 쉽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만큼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대중이 혐오하는 대상도 얼마든지 친숙하다거나 옳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일반 대중이 옳다고 믿는 어떤 사건이나 대상도 이상한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신념이나 가치 체계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아니라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학습 환경이나 언론의 다양성을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 한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얼마 전 야당의 선대위에 가담했던 한 젊은이(라고 말하기는 나이가 꽤나 들었지만)의 독선적인 자기 주장 내지는 지나친 편견에 대해 연일 이어지던 언론이나 대중의 지적에 대해 나는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깊은 비애를 느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부의 불평등 구조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다. 이런 까닭에 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은 아이의 인성이나 건전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소위 'SKY'로 지칭되는 명문 대학을 향한 외길에 아이를 줄 세우곤 한다. 물론 예외적인 학부모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대부분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도 다양한 책이나 영상을 통해 습득하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대물림받는 게 일반적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해 학교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인성 교육이 웬 말이냐는 투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누군가(대개는 부모님)로부터의 강제적인 세뇌나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곧 자신의 노력이나 가치 판단의 결과로 형성된 것인 양 속단하곤 한다. 인생이 불행해지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인의 생각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거나 그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사고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거나 숫제 없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구 선생에 대해 '국밥 좀 늦게 나왔다고 사람 죽인 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5·18 민주화 운동을 일컬어 폭동이라고 하거나, 긴급재난지원금을 개밥에 비유하거나, 실업급여 수급자를 향해 거지근성이라고 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이와 같은 사고를 지닌 당사자를 그저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는 다만 5·18 민주화 운동의 실상에 대해서도, 김구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해서도, 혹은 가난한 이의 삶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에 대해 그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면에 곪을 대로 곪은 병폐를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우리는 제2, 제3의 노 씨를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편견의 소유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날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제 사회의 정서와 동떨어진 일본이 끝을 알 수 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서가 그렇게 변해간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동시에 먼 나라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한 명의 지구인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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