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조지 오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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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익숙하여 그의 삶이나 업적 혹은 그가 쓴 작품 전반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도 유명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잘 아는 듯 행동하는 자기기만이 합쳐져 스스로도 그럴 것이라고 내심 안심하는 처지에 이르는 게 인간의 보편적 인식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의 인식 체계에 심한 과장이나 오류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급작스레 허를 찔린 것처럼.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의 명성과 더불어 너무나 유명해진 작품.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감시자로 지칭되는 '빅 브라더'가 더 널리 회자되어 소설의 제목보다 소설 속 인물이 더 유명세를 타게 된 기이한 작품. 그럼에도 우리는 소설 『1984』에 대해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숫제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 하더라도 스토리 전개만 대충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 『1984』를 손에 잡는 순간 우리는 조지 오웰이라는 탁월한 재능의 소설가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의 치밀한 구성과 생생한 묘사, 도래하지 않은 미래 사회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 등은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조지 오웰'이라는 소설가를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갇힌 '조지 오웰'은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짧은 생을 살았던 기괴한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전부였지만 막상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그의 천부적 재능에 대해 무엇보다 놀라워한다. 길게 갈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설의 첫 도입부부터.


"맑고 쌀쌀한 4월 어느 날, 시계들이 열세 차례 치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가슴팍 깊숙이 턱을 묻은 채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지나갔지만 한 줄기 모래 먼지 소용돌이가 딸려 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p.7)


그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서늘한 느낌과 함께 숨 가쁘게 진행된다. 13이라는 불길한 숫자가 상징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전체주의 경찰국가들에 의해 세계가 지배된다는 가상적 미래를 설정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의 중앙부처인 '진리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각종 기록물을 당의 입맛에 맞게 수정, 조작하는 일을 맡고 있는 그는 일을 계속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과 당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일기에 기록한다. 당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기를 쓰기도 하고 골동품 상점에서 몰래 물건을 구입하기도 하던 그는 어느 날 진리부의 한 여인으로부터 쪽지를 건네받는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사랑 고백을 담은...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한동안 그는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엄청난 환각에 휩싸였다. 그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내부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살갗을 뚫고 들어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는 그들이 함께 자유롭게 있었을 때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가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p.428~p.429)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된 윈스턴은 계속되는 투옥·고문·재교육으로 인해 육체는 물론 영혼의 존엄성마저 파괴된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증오하던 '빅 브라더'를 사랑할 때까지 계속된다. 권력지향과 타인에 대한 지배는 결국 끊임없는 감시와 부정직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인간의 미덕은 서서히 소멸하게 된다는 사실을 소설은 윈스턴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콧수염 아래 숨겨진 미소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아, 모질고도 부질없는 오해였다! 아, 저 애정 어린 품속을 벗어나 고집스럽고 아집에 찬 유형의 삶을 살았다니! 술 냄새가 배인 두 줄의 눈물이 콧날 양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만사가 다 괜찮았다. 이제 투쟁의 시간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p.457)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체계에 반하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대개 불같이 화를 내게 되지만 자신의 잘못된 인식이나 지적 오류를 감지하는 순간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내적으로 심한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본 척한다거나, 읽지 못했던 책을 읽은 체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고 자신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의 경험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라는 가사의 어느 캐럴처럼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빅 브라더'의 눈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 온다면 아이들이 산타를 좋아하는 것만큼 빅 브라더를 좋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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