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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던 국무총리가 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자신의 직책을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나는 갑자기 나른해졌습니다. 때아닌 춘곤증이 마구 밀려오는 듯했어요.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던 건 물론 어젯밤이었지만 내가 그 소식을 접했던 건 아침이었지요. 하여, 내가 그런 나른한 느낌을 가졌던 것도 물론 아침 무렵이었구요. 상황에도 맞지 않는 그런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던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화가 난다거나, 분노를 느꼈다거나, 차라리 잘 되었다 안도하거나, 안타깝다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국정 공백이 우려된다거나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야 할 텐데 나는 왜 뜬금없이 나른함을 느꼈을 까요? 내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묻는 것도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금방이라도 풀썩 다리가 꺾일 것처럼 온 몸에 기운이 빠지고 나른한 피곤이 몰려왔던 것이지요.

 

어젯밤에 잠을 못자서 그런 게 아니냐구요? 물론 아닙니다. 19금 답변입니다만 주말부부로 지내는 나로서는 평일날 잠을 못 잘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아, 간혹 밤이 늦도록 책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웬 잘난 체냐구요? 또 대답이 그렇게 되는군요. 가물에 콩 나듯 아주 가끔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침 뉴스에서 국무총리가 어젯밤 사퇴 표명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지, 다짐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아침부터 나른한 피곤을 두 눈에 걸게 되었지요.

 

아무튼 이번 정권에 들어서 총리의 수난사는 끝이 없는 것 같군요. 그 무한반복의 권태가 나로 하여금 나른함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영원회귀의 시간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르는군요.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우주와 인생은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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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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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달달한 사랑 이야기에 끌리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지금껏 그런 사랑을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이미 경험은 해보았으되, 그게 언젯적 얘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사람들로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판타지 소설이나 삼류 성애소설을 탐닉하는 청소년들을 이따금 볼라치면 '나도 예전에는 저랬을까?', 생각하게 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플레이보이'지를 펼쳐 놓고 머릿속으로는 19금의 낯 뜨거운 장면을 상상하던 소년은 이제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그저 시큰둥할 뿐이다. 어느새 나는 소설 속 사랑조차 마냥 부러웠던 그 나이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것이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2년도 넘는 기간 동안 국방부 시계만 보며 잠이 들고, 기상 나팔 소리에 잠이 깨던 나는 초침 소리마저 미약한 사제 시계의 부드러운 구령에 적응하지 못한 채 매일 밤 뒤척이고 있었다. 뭔가 얼떨떨한 상태였을 것이다. 나사가 반쯤 풀린 듯한 세상에 나도 모르게 내동댕이 쳐진 듯한 느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나는 그 얼떨떨한 시기에 그에 걸맞는 어정쩡한 신분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 여자 동창 한 명과 사흘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만났더랬다.

 

아, 나는 지금 황경신의 소설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읽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쓰는 중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딱히 밝혀야 할 이유도, 기어코 리뷰를 완성해야 할 필요도 크게 없지만 아무튼 나는 내 행동이 목적이 있는 어떤 행위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사랑의 구분에 대해 작가를 대신하여 약간의 해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랬다. 그 어정쩡한 시기에 나는 국민학교 여자 동창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만났고, 자주 만나다 보니 '혹시...' 하는, 뻔한 스토리를 상상하기도 했고, 사제 시계의 미약한 소리에도 적당히 길들여져갔다. 그렇게 석 달쯤 만났을까, 그녀는 대뜸 '다음달에 결혼하노라' 풀기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갓 상경한 그녀와 국방부 관할지에서 갓 벗어난 내가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을 미처 밝히기도 전에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제 세상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일시적 사회부적응자의 엉뚱한 상상이자 눈먼 사랑에 헛물만 켠 사랑 결핍자의 흔한 에피소드였는지도 모른다.

 

"어젯밤, 나는 문득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그 여름밤이 떠올랐고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 기다리고 기다릴 때는 오지 않다가 방심하고 있을 때 문득 떨어지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 덜어졌구나, 라고밖에." (p.32)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에이(연하의 남자)와 그녀가 사랑하는 비가 등장한다. 친오빠의 친구인 비는 어려서부터 같이 성장한 친자매와 같은 사이다.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반복하였지만 비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머물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몸은 에이를 만나면서도 마음은 항상 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그녀의 곁을 떠난다. 다른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비와 그를 기억에서 지우겠다고 약속하는 그녀.

 

"하지만 우리의 잘못도 있지. 우린 겁 많은 어린아이들이었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헤어져 있던 거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거야." (p.197)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이와 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세월만 낭비한다. 시간이 지난 후, 취재차 방문했던 한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쓴 소설을 읽고 인터뷰에 응했던 그 예술가. 비에 대한 예술가의 이야기에서 결혼 전의 비도 그녀를 깊이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비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그녀와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에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그 예술가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누구나 각자의 가슴엔 세 개의 사랑을 품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가깝거나 먼 과거의 사랑과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의 사랑과 지금 이 순간의 사랑. 누구에게나 기억 속의 사랑은 선명한 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에 애달프다. 그에 비하면 지금 막 시작한 현재의 사랑은 얼마나 낯설고 어색한 것인지... 그러나 오지 않은 사랑은 더없이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오직 기대와 환상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까닭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우리가 모르는 미래 사이에서 살고 있다. 현재는 그래서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중간." (p.44)

 

과거의 사랑인 비와 미래의 사랑인 에이, 그리고 현재의 사랑인 예술가. 그녀에게는 에이가 현재의 사랑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비록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 에이를 만나면서도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에이와의 만남을, 어쩌면 에이의 사랑마저도 현실로서 인식하지 못했을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 한 차례 만난 예술가를 현재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 예술가는 과거의 사랑 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현재의 사랑에서 평화를 찾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완연한 봄이다. 봄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에는 지나간 사랑 한토막 문득 떠올려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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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4-28 23:25   좋아요 0 | URL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요?

꼼쥐 2015-05-01 13:33   좋아요 0 | URL
옛 사랑에 무한정 기대는 것도, 미래의 사랑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것도 모두에게는 불행이죠. 그런 면에서 현실의 사랑을 직시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자 언해피를 막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ㅎ
 

어제 저녁에는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친구 A와 모 신문사의 기자인 친구 B를 만나 늦은 시각까지 함께 있었다.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만남을 제안한 사람은 친구 B였는데 정작 약속 장소에는 가장 늦게 도착했다. 금요일 밤의 맥주집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젊은이들의 활기와 들뜬 분위기로 인해 콘크리트 건물은 금방이라도 통째 하늘 높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옆사람과의 대화도 어려운 그런 시끄러운 분위기의 술집을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개중에는 내가 술도 마시지 않으니 숫제 술집 자체를 싫어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술집에 가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끔 즐길 때도 있다. 비록 술은 입에도 대지 않지만 그저 분위기에 빠져들어 스스럼없이 즐기곤 하는 편이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술집은 평상시라면 결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머리가 흔들려 머릿속에서는 윙윙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러나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친구 B의 음주 습관은 독특하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그는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마신다. 젊어서부터 그랬다. 깡소주로 낮술을 하면서도 기사 마감 시간은 지켜야만 했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강박이 그를 그렇게 버릇 들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친구 A는 느긋하기 이를 데 없다. 맥주 500cc 한 잔을 들고 종일이라도 버틸 기세다. 친구 B는 뭔가 우리에게 할 말이라도 있었던지 급하게 맥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친구 A의 맥주는 아직 반도 비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 시작된 대화는 두서도 없이 흐르다가 어느 순간 우리 대화의 주제는 마치 오래된 습관인 양 '책'으로 이어졌다. 책이 예전처럼 잘 팔리지 않는다거나 주변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둥의 시시껄렁한 이야기에서부터 리처드 도킨스나 알랭 드 보통, 움베르토 에코 등의 다소 철학적인 작가들로 옮겨갔다가 마지막에는 우리나라 신진작가들 중에는 딱히 눈에 띄는 작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흘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 쪽이었는데 말인 즉슨 신진 작가들은 대체로 문장력이 쓸만하면 정서가 메말랐거나, 머릿속에 들은 게 많다 싶으면 문장력이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작기는 자신의 글이 문학인지 비문학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듣다 못하여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쓰라고 했더니 두 사람 다 멋적게 웃었다. 덧붙여 말하기를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은 딱 두 종류란다. 문장력만 좋고 알맹이는 없는 '겉껍데기 글'과 문장력은 별 볼 일 없으나 내용은 그럭저럭 쓸 만한 '속 알맹이 글'로 나뉜다고 했다.

 

그 원인으로 그들이 꼽았던 말은 헤어져 곱씹어봐도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어려서 자연을 접하지 못한 채 자라는 게 주원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작가의 느낌이나 정서는 누구로부터 배워지는 게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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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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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했던 말 때문에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있습니다. 최근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종종 있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닥 유쾌한 일도 아닐 텐데 어쩜 그리 해맑게 말할 수 있냐구요? 세상사라는 게 다 오해와 용서의 결합체이니까요. 누군가를 끝없이 오해하고 또 끝없이 용서하다 보면 우리 인생도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오해하고 또 많이 화해하라고 말입니다. 칼부림이 날 정도의 깊은 오해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오해를 푸는 것도 좋은 경험일 테지요. 우리는 어차피 내가 아닌 너가 될 수 없는 까닭에 완전한 이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같은 화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신문에서 자주 목격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극단적인 대립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불필요한 논쟁처럼 읽히지만 지구상의 두 세력은 이미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웃자고 쓴 글인데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빚어지는 크고 작은 오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올바른 대처 방법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고 (만약 있다면)약간의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용서는커녕 내 목숨까지 요구한다면? 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자신의 운명을 탓하는 것 외에는.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은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극단적인 오해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1947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열세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고, 1975년에 '그리스머'로 문단에 데뷔합니다. 1981년에 쓴 '한밤의 아이들'은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잘 나가는 소설가에서 도피자의 신세로 전락한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그가 발표한 '악마의 시'로 인하여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는 전 세계의 무슬림을 향해 그를 처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수백명의 무슬림이 모여 ‘악마의 시’를 불태우고 폭력시위를 벌이며 살해 위협을 가했습니다. 작가가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었죠. 그로부터 작가는 13년간의 기난긴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이 책 <조지프 앤턴>에서 자신의 도피생활 중에 겪었던 여러 일들을 독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지프 앤턴>은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입니다. 뜻밖의 결과에 당혹해 하면서도 작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인 듯 보입니다.

 

"방송이 시작되고 호메이니의 위협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루슈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더 비판적으로 쓸 걸 그랬어요."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겻다. 그 말은 진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 이슬람교에 특별히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p.17)

 

연도별로 기술된 그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은 그가 태어난 1947년에서 '악마의 시'가 출간된 1988년까지의 기록인 1부 '파우스트의 계약'을 제외하면 모두 1년 단위로 부를 나누어 2002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2년은 작가가 무장 경찰의 보호 속에서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은신처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끔찍했던 시절에 종지부를 찍었던 해였습니다. 2001년 9ㆍ11 테러로 자신에 대한 처형 명령이 실질적으로 해제돼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해가 2002년이었지요. 작가는 그 해에 비로소 '조지프 앤턴'에서 다시 '살만 루슈디'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루슈디는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이것저것 조합해보았다. 블라디미르 조이스, 마르셀 베케트, 프란츠 스턴. 그런 식으로 짝을 지어 목록을 만들어보았는데 모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스꽝스럽지 않은 조합을 발견해 나란히 적어보았다. 콘래드와 체호프의 이름. 그것이 앞으로 11년 동안 쓰게 될 이름이었다. 조지프 앤턴." (p.219)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이 나에게 각별했던 까닭은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솔직해지려 했다는 점입니다. 계속되는 살해 위협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도 연쇄적 불륜과 그로 인한 네 번의 이혼, 돈과 명성을 향한 끝없는 욕망,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탐닉하는 철없음 등을 그는 자기조롱과 희화화까지 동원해가면서 대담하게 펼쳐 보입니다. 또한 작가는 자신을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인 양 다루기 위해 1인칭인 '나'를 사용하지 않고, 시종일관 ‘루슈디 씨’ 또는 '앤턴 씨'라는 3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 이유를 “자기 미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냉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작가의 도피 생활은 힘겨웠던 듯합니다. 10여 년간 앞마당에 신문이나 우편물을 집으러 나갈 수도 없었고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거나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거처를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했던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떠올렸습니다. 애인에게 던졌던 농담 한마디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루드빅이 살만 루슈디의 삶과 비슷하다 느꼈기 때문이지요.

 

"그는 벌써 죽었어야 했다. 누가 봐도 당사자인 그는 납득하지 못한 게 분명했지만, 그거야말로 모두가 기사로 내기 위해 목을 빼고 기다리는 헤드라인이었다. 부고는 이미 쓰여 있었다. 비극이든 심지어 희비극喜悲劇이든 등장인물은 초안을 고쳐 쓸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 있길 고집했고, 더 나아가 의견을 내고 변론을 하고,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믿고, 자신의 일에 매진하길 고집했으며 또한 (사람들이 그런 만용을 믿어줄지 모르겠지만)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고통스럽더라도 한 걸음씩 되찾길 고집했다." (p.539~p.540)

 

악의적인 의도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은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오해에 종종 부딪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매번 화를 내고 들어주지 않는 상대방의 귀를 하릴없이 두들겨야만 할까요? 우리는 어쩌면 탄생과 더불어 오해를 경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불편하다고 우는 아기를 서툰 엄마는 배가 고파 운다고 오해하거나 같이 놀자는 뜻으로 빼앗았던 친구의 장난감 때문에 빚어진 싸움 등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기억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오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오해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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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세상을 하나로 엮어 크고 더욱 깊어진 슬픔으로 우리를 이끌다가 질식할 듯한 심연의 슬픔에 이르게 합니다. 공유된 슬픔은 바람에 증발하지 않는 법, 힘겹고 느린 시간을 견디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길고 긴 울음으로 토해내는 듯합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운동을 나섰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세월호 참사 1주기입니다. 등산로 초입부터 들리던 까치 울음 소리도 오늘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낙엽 밟히는 소리만 새벽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지요. 우리는 종종 슬픔으로 하나되는 슬픔의 연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연대를 마뜩잖아 하는 힘센 자들의 압제 때문만은 아닐 터, 저 벚꽃이 힘없이 지는 것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름하는 팽목항 그 언저리의 어둠이 아릿한 슬픔으로 번져옵니다.

 

싸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봄인 양 환하게 말입니다. 봄비가 예보된 아침 하늘은 여전히 맑았습니다. 공유된 슬픔은 증발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싸리꽃 환한 아침의 숲을 아이들 웃음인 양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녕 기억된 슬픔을 되살리고 있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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