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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달달한 사랑 이야기에 끌리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지금껏 그런 사랑을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이미 경험은 해보았으되, 그게 언젯적 얘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사람들로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판타지 소설이나 삼류 성애소설을 탐닉하는 청소년들을 이따금 볼라치면 '나도
예전에는 저랬을까?', 생각하게 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플레이보이'지를 펼쳐 놓고 머릿속으로는 19금의 낯 뜨거운 장면을 상상하던 소년은 이제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그저 시큰둥할 뿐이다. 어느새 나는 소설 속 사랑조차 마냥 부러웠던 그 나이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것이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2년도 넘는 기간 동안 국방부 시계만 보며 잠이 들고, 기상 나팔 소리에 잠이 깨던 나는 초침
소리마저 미약한 사제 시계의 부드러운 구령에 적응하지 못한 채 매일 밤 뒤척이고 있었다. 뭔가 얼떨떨한 상태였을 것이다. 나사가 반쯤 풀린 듯한
세상에 나도 모르게 내동댕이 쳐진 듯한 느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나는 그 얼떨떨한 시기에
그에 걸맞는 어정쩡한 신분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 여자 동창 한 명과 사흘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만났더랬다.
아, 나는 지금 황경신의 소설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읽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쓰는 중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딱히 밝혀야 할 이유도, 기어코 리뷰를 완성해야 할 필요도 크게 없지만 아무튼 나는 내 행동이 목적이 있는 어떤 행위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사랑의 구분에 대해 작가를
대신하여 약간의 해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랬다. 그 어정쩡한 시기에 나는 국민학교 여자 동창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만났고, 자주 만나다 보니 '혹시...' 하는, 뻔한 스토리를
상상하기도 했고, 사제 시계의 미약한 소리에도 적당히 길들여져갔다. 그렇게 석 달쯤 만났을까, 그녀는 대뜸 '다음달에 결혼하노라' 풀기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갓 상경한 그녀와 국방부 관할지에서 갓 벗어난 내가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을 미처 밝히기도 전에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제 세상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일시적 사회부적응자의 엉뚱한 상상이자 눈먼 사랑에 헛물만
켠 사랑 결핍자의 흔한 에피소드였는지도 모른다.
"어젯밤, 나는 문득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그 여름밤이 떠올랐고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 기다리고 기다릴 때는 오지 않다가 방심하고 있을 때 문득 떨어지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 덜어졌구나, 라고밖에."
(p.32)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에이(연하의 남자)와 그녀가 사랑하는 비가 등장한다.
친오빠의 친구인 비는 어려서부터 같이 성장한 친자매와 같은 사이다.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반복하였지만 비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머물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몸은 에이를 만나면서도 마음은 항상 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그녀의 곁을 떠난다. 다른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비와 그를 기억에서 지우겠다고 약속하는 그녀.
"하지만 우리의 잘못도 있지. 우린 겁 많은 어린아이들이었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헤어져 있던 거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거야." (p.197)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이와 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세월만 낭비한다. 시간이 지난 후, 취재차
방문했던 한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쓴 소설을 읽고 인터뷰에 응했던 그 예술가. 비에 대한 예술가의 이야기에서
결혼 전의 비도 그녀를 깊이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비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그녀와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에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그 예술가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누구나 각자의 가슴엔 세 개의 사랑을 품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가깝거나 먼 과거의 사랑과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의 사랑과 지금 이 순간의 사랑. 누구에게나 기억 속의 사랑은 선명한 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에 애달프다. 그에 비하면 지금 막 시작한 현재의 사랑은 얼마나 낯설고 어색한 것인지... 그러나 오지 않은 사랑은 더없이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오직 기대와 환상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까닭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우리가 모르는 미래 사이에서 살고 있다. 현재는 그래서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중간." (p.44)
과거의 사랑인 비와 미래의 사랑인 에이, 그리고 현재의 사랑인 예술가. 그녀에게는 에이가 현재의 사랑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비록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 에이를 만나면서도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에이와의 만남을, 어쩌면 에이의 사랑마저도 현실로서 인식하지 못했을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 한 차례 만난 예술가를 현재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 예술가는 과거의 사랑 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현재의 사랑에서 평화를 찾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완연한 봄이다. 봄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에는 지나간 사랑 한토막 문득 떠올려도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