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생은 아름다워


'혹시'라는 말을 툭 하고 내뱉고 나면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일들이 무작정 술술 풀려나갈 듯하고 없던 행운도 갑자기 생겨날 듯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는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4월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내가 기시감 멧돼지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돌아온 이후 전국의 멧돼지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시국선언이니 뭐니 하면서 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나에 대한 지지율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계 22개국 리더 멧돼지들에 대한 '아침 상담(morning consult)'의 조사에서 나는 19%로 압도적인 꼴찌를 했던 것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겉보기엔 혹은 대외적으론 대범한 척, 뒤끝이 없는 척 연기하고는 있지만 소심한 나의 성격상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병아리 오줌만도 못한 낮은 지지율이 나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상처도 크게 남고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대구를 찾곤 합니다. 이제는 젊은 멧돼지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고 나이 든 멧돼지들만 남아 폐허처럼 무너져가는 도시를 겨우 지탱하고는 있지만 대구의 멧돼지들은 언제나 나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해 주곤 합니다. 배알도 없이 말입니다. 이번에도 나는 대구를 찾아 '들판의 공(野球)' 개막을 알리는 행사에서 기분 좋게 공을 던졌고, 그곳의 한 전통시장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나는 차라리 대구 경북의 리더가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멧돼지들은 나를 싫어하는 감정이 얼굴에서 역력히 읽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리더인데 내 앞에서는 적어도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도 오죽하면 그리 하겠습니까마는.


엊그제 나는 부산의 모 횟집에서 술과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나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운' 멧돼지를 포함하여 나를 리더로 당선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던 여러 똘마니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입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뒷골목 세계의 관례에 따라 양쪽으로 도열하여 나를 맞았고, 나는 그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나라의 곳간이 무너지든 말든, 나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든 말든 나는 모처럼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뒷골목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의 지지율 하락에 일조했던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도 나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달려왔던지라 기분은 최고조로 치솟았습니다. 산불이 나서 멧돼지들이 타 죽고 있는데 골프를 치고 술을 마셨던 강원도 짱 멧돼지, 나의 친일 행각을 지지하며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고 외쳤던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 역시 산불이 번지던 그 시기에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두 나를 닮고 싶었던 탓이겠지요. 나를 지지하는 똘마니들과 술을 마셨더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습니다. 나는 이번 달 말에 세계 최강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렙니다. 역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봄꽃이 만발한 오늘의 풍경처럼 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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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오늘을 허리 위로 높이 들어 모래판에 시원하게 메다꽂는 들배지기 한판승을 기대하였지만, 비와 황사를 핑계로 모처럼 아침운동을 거른 나는 아침부터 헤롱헤롱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들배지기 한판승은 커녕 경기 개시도 전에 GG를 선언하고 만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일본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대통령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다고 나는 폭탄주로 러브샷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에 찬 질문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르쳐야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사 과목은 그저 수능이나 취업을 위한 귀찮고 어려운 암기 과목 정도로만 생각했던 어른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뻘짓 덕분(?)에 우리부터 반성하고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결기를 보이는 것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한국사 바로 알기 동호회(가칭)'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순히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중요 포인트만 달달 외우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잊어버리는 그와 같은 헛된 공부를 지양하고 하나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취지는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봄비가 그친 뒤의 청량한 공기를 기대했는데 황사의 습격으로 목이 칼칼하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시간이 마냥 더디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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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의 외교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정부의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16일 오전에 숙소인 임페리얼 호텔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 있던 일본인 몇 분이 박수를 쳤고, … 17일 대통령 일행이 숙소 떠나 공항으로 갈 때 호텔의 모든 직원이 일렬로 도열해서 대통령 일행이 떠난 후까지 계속 박수를 쳤다. 일본 주민도 박수를 보냈다. 공항 직원도 박수를 보내줬다”면서 “이 정도면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데 어느정도 성공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된다”고도 했다.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을 일 많지 않은 요즘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해 보라. 예컨대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원하는 모든 것을 싸 들고 방한하여 생각지도 못한 선물 보따리를 펼쳐 놓았을 때,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당연히 미국 대통령을 환영하며 박수를 칠 게 아닌가.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자신들의 외교 성과로 발표할 일이지 우리나라의 관계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외교 성과를 한국어로 말하는 줄 알았다.


월요일이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월요병을 앓고 있을 테다. 물론 개인별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중증의 월요병을 앓을 때가 더러 있다. 휴일에 너무 과격한 운동을 했다거나 밀린 업무를 보느라 쉬지를 못해서가 아니다. 해외 여러 나라의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느라 온종일 휴대폰과 씨름한 날이면 다음날 맞는 월요일은 거의 초주검 상태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차가 서로 다른 여러 나라의 외국 친구들이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은 일주일 중 일요일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화가 많은 날은 일요일 새벽부터 전화를 받기 시작해서 밤 늦은 시각까지 통화를 하게 된다. 물론 한 명이 아닌 여러 나라의 여러 친구들과.


최근에 친구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코로나 시국에는 전 세계를 선도하던 대한민국이 지금은 어떻게 경제와 안보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나? 더구나 한 국가의 환경이 이렇게나 빠르게 급변할 수 있나?" 외국 언론의 경제면이나 정치면에 우리나라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친구들도 대한민국의 사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주로 대통령의 교체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의 대답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대한민국과 같은 경제 대국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아무리 여러 번 반복적으로 말해줘도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의존도가 그렇게 막강하다면 그게 독재국가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나는 분단국가라는 우리나라의 사정상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그런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정치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낮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정치는 확실히 기형적이다. '조선은 원래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침략론자의 발언을 일본 대학생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인용하고 있으니 오죽하겠나. 중증의 월요병 탓인지 몇 자 쓰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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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쓰기&글쓰기 2023-03-2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은 임기가 너무 기네요...

꼼쥐 2023-03-22 14:59   좋아요 1 | URL
참으로 긴 시간이 남아 있지요. 아까운 시간인데 말이죠.
 

13. 목련꽃 그늘 아래 서면


아파트 화단에는 벌써 산수유꽃이 노르스름한 배경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계절이 가고 오는 자연의 순리를 결코 막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완연한 봄! 리더 멧돼지가 된 지 만 1년이 되는 이봄에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왔습니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상석에 앉아 술을 먹는 게 소원'이라고 공언해 왔던 나는 리더 멧돼지로 당선된 이후 상석에 앉아 세계 여러 나라의 술을 원 없이 마셔 보았습니다. 물론 남은 임기 동안의 술 약속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 편 멧돼지 무리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내가 밀었던 기연 멧돼지가 겨우 당선되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나는 그와 2주에 한 번씩 만나 술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사실 그는 나의 1년 선배이지만 내 앞에서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겸손을 떨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지금의 대표 자리도 주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앞의 일기에서도 썼지만 우리 멧돼지들은 11월에서 1월이 발정기인 탓에 봄이 되면 오히려 원기가 떨어지곤 합니다. 이런 까닭에 수컷 멧돼지들은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비빔목에 몸을 비벼대거나 습지를 찾아 진흙 목욕을 즐기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눈에 비친 수컷 멧돼지들의 이런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던지 봄만 되면 암컷 멧돼지들의 잔소리가 늘어나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생기가 돋는 암컷 멧돼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보면 잔소리를 할 새도 없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부터 일본을 좋아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일본의 은혜를 받고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히토쓰바시 대학이 있던 자리가 눈에 선합니다.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너 아버지 멧돼지를 만나러 갔을 때 일본은 선진국답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일본 멧돼지들은 미개한 한국 멧돼지들과 달리 무슨 일이든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가 허락만 해준다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일본에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선일체, 아니 '내한일체'가 나의 바람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 멧돼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동을 시켰다거나 군인 멧돼지들을 만족시키는 종군 위안부로 써먹었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지나간 과거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나의 선조들은 피해는커녕 은혜를 받은 처지이니 그들에게 은혜를 갚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였고 그는 나를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초청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충복이 되겠다는 나의 생각과 리더 멧돼지의 자격으로 가는 일본 여행, 그리고 아내 멧돼지의 잔소리도 없앨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띵호와(挺好啊)!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멧돼지들은 나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시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사실 일본에서 쭉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아무튼 나는 1박 2일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모든 게 기시감 멧돼지의 뜻대로 되는 듯한 나의 행보는 국내의 많은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조만간 뒷골목 똘마니들을 시켜  그들 모두를 잡아넣을 계획입니다. 그나저나 아내 멧돼지는 집을 잘 짓기로 유명한 일본의 다다미 멧돼지로부터 옷을 선물로 받았다며 좋아했습니다. 목련꽃그늘 아래 서니 술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내 멧돼지와 술 한 잔 해야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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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의 냉기가 채 여물지 않은 성긴 봄기운의 틈새로 스민 탓인지 새벽 등산로는 여전히 겨울과 같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갈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별빛도 없는 하늘엔 살 오른 반달이 홀로 쓸쓸했다.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 탓인지 새벽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인근의 아파트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한 집 두 집 연이어 불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또 그렇게 분주한 하루를 준비하는 듯했다. 한강 작가의 시 '새벽에 들은 노래 3'이 생각나 옮겨 적는다.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 편의  시를 나직나직 읊어보는 일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저녁을 몰래 꺼내 보는 것처럼 운치가 있는 일이지만 갈수록 메말라가는 정서는 시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시나브로 멀어지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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