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는 게 뭔지...


가뜩이나 살얼음판의 아슬아슬한 정치판인데 날씨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외 뉴스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나처럼 게으르고 천하태평인 멧돼지도 리더라는 자리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어떤 일처리를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크게 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크게 떨어지기도 하니 뉴스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에 대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언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를 죽여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언론사는 리더 전용 수레에 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또 다른 언론사는 회사를 통째로 나에게 우호적인 재벌 멧돼지들에게 팔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는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매일 내보낼 테니 그렇게 되는 날 비로소 술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잠도 편히 잘 수 있을 게 아닌가.


한 해를 보내는 기념으로 전임 리더 멧돼지를 풀어주기로 했다. 사실 그는 리더로 재임하던 시절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만만한 자들 여럿으로부터 삥을 뜯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한 10년쯤 더 가둬두고 싶지만 나를 보좌하는 똘마니 멧돼지들 중 상당수가 전임 리더 멧돼지의 심복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눈치를 전혀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물론 아내 멧돼지와 장모 멧돼지가 나를 대신하여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전임 리더 멧돼지를 딱히 비난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를 풀어줌으로써 나라 전체의 일반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이란 비난은 내가 다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게 좀 번거롭다는 것이다. 전임 리더 멧돼지 역시 나의 선처에 감읍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똘마니 멧돼지들과의 회의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몇 마디 섞어 썼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렸다. 나는 사실 '날리면'이 쓰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큰 뉴스거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GDP(국내총생산)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주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관여하고 개입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 금융기관의 거버넌스가 아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나는 아직도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 거버넌스, 어그레시브 등 내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최근에 아내 멧돼지는 밖으로만 나돌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 멧돼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고, 필요에 의한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이 필요하고, 나는 아내 멧돼지의 재력이 필요할 뿐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남들처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더구나 내일은 인간들이 반기는 성탄절 아니가. 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가슴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아, 사는 게 뭔지...'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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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퇴근 무렵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타이어 전문점을 들렀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 탓에 평일보다 손님들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타이어 판매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림잡아 대기 차량만 족히 예닐곱 대는 되는 듯 보였다. '이걸 어쩐다. 되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서 교체를 하고 가야 하나?'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교체하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사무실에 눌러앉았다. 다들 나처럼 날씨만 믿고 어떻게든 대기 시간을 줄여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궂은 날씨를 뚫고 예까지 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제 발등을 찍은 사람들의 면면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졌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끝도 알 수 없는 무한 대기의 긴 기다림만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 액정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과 별 내용도 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맥 놓고 바라보다 이유도 없이 채널만 돌리는 사람 등 기다림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에게 몸이 배배 꼬일 정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나 역시 딱히 할 게 없었던 건 매일반. 답답함도 풀 겸 야외에 놓인 대기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누가 피우다 불을 끄지도 않고 버린 담배꽁초에서는 가늘고 푸른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허술한 차양막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시린 눈발이 안쪽까지 들이쳤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어느 순간 웬 노인 한 분이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야당에 대한 욕을 쏟아내는 게 아닌가. 자신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라면서.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불쾌했지만 지지율 16%(모닝컨설트 조사)의 대통령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있는 것이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내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인상을 쓰며 자리를 피하는 나를  쫓아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중간중간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나보다 나이만 어리다면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하고 한마디 따끔하게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뻘의 그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16%에 해당하는 개, 돼지의 모습을 엊그제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들었던 생각은 나는 앞으로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내 주장을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본인이 싫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방하고 16%의 국민이 마치 전체 국민인 양 포장하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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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날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순하고 부드러운 날이었다. 12월도 중순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파트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날씨만큼이나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린 손자와 함께,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혹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기울어가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살의 눈부심. 누렇게 마른 잔디 위로 마른 햇살이 번진다.


사람들은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한 거부감이나 부담을 느끼곤 한다. 오늘처럼 순한 날씨에도 부담 아닌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담담한 시선에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거룩함, 그리고 공감과 애정이 빚어내는 저 진한 무념의 시선.


오늘 발표된 올해의 사자성어가 '과이불개(過而不改)'라고 보도되었다. 매년 교수신문이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뽑아 온 사자성어는 그해의 정치상황이나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올해는 유독 그런 느낌이 강했다.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교수 9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76명의 교수(전체의 50.9%)가 '과이불개'를 뽑았다고 한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등장하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는 구절에서 앞의 네 자만 딴 것이다.


어디 정치인들 뿐이랴. 소위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모든 엘리트 집단이란 집단은 모두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할 뿐 국가 전체의 안위나 서민의 삶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비근한 예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3년부터 논의되었고, 2007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이래 현재까지 제정은커녕 공청회조차 열리지 않는 '차별금지법'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의 공고한 이기심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오늘따라 겨울 햇살은 저리도 따사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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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별명 혹은 애칭


결혼 전, 수컷 멧돼지들의 술시중을 들었던 아내 멧돼지의 예명은 줄리였다. 다른 암컷 멧돼지들에 비해 마르고 여리여리한 체구를 지녔던 아내 멧돼지는 체구와는 걸맞지 않은 걸걸한 목소리와 툭 불거진 광대뼈로 인해 사납고 억세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뒷골목 똘마니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술과 암컷 멧돼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나였기에 술자리에서 처음 본 아내 멧돼지의 얼굴은 그닥 호감이 가는 인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혼기도 한참이나 지났고, 술에 절어 엉망이 된 몸으로 젊고 어여쁜 암컷 멧돼지를 차지한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주변의 다른 멧돼지들의 반복되는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별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렸을 적 나의 별명은 '꼴통'이었다. 젊은 멧돼지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아버지 멧돼지는 밖에서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엄격' 그 자체인 경우가 많았고, 이에 불만이 많았던 나로서는 아버지 멧돼지의 눈을 피해 매번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른들의 뜻에 반하여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다 보니 '꼴통'이라는 말이 내 이름처럼 따라붙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 그 별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친구 멧돼지들은 나를 '돌+아이' 혹은 '4차원'이라고 부르기 일쑤였다. 말재주도 없고 운동신경도 좋지 않았던 나는 친구 멧돼지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 나이대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개중에는 더러 기괴하고 요상한 짓거리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나의 행동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교우관계에 있어서는 왕따나 다름없었던 나의 하루는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무료했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아버지 멧돼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내가 멧돼지계에서는 가장 좋다는 대학에 진학을 하기까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래의 다른 멧돼지들이 암컷 멧돼지들과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닐 때 나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틈만 나면 진흙 목욕을 하거나 썩은 나무를 일삼아 들이받기도 했다. 성체 멧돼지가 된 내가 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뒷골목 똘마니 시험에 9번이나 떨어졌던 것도 따지고 보면 비참했던 나의 청소년기와 무관치 않았다.


뒷골목 똘마니 시험에 합격한 나는 모든 걸 내 손아귀에 쥔 듯 의기양양했다. 그렇다고 뜻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려나갔던 건 아니지만 전임 리더 멧돼지 두 마리를 감옥에 보낸 후로 나는 승승장구했고, 경쟁자였던 장관 멧돼지의 가정마저 박살냄으로써 결국 나는 리더 멧돼지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멧돼지계의 관습이나 정서에 적합했던 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비정한 멧돼지로는 남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칼을 뽑았으면 완전히 싹을 잘라야 한다는 아내 멧돼지의 조언에 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비방하는 여러 멧돼지들이 잔인무도한 나를 일컬어 '짜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더 멧돼지가 되는 과정에서도 나는 '도리도리', '무식이', '무능이', '술통', '개고기', '쩍벌이' 등 여러 별명을 함께 얻었다. 자랑스럽게도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얍삽이'로 불리는 '동운' 멧돼지나 '두꺼비'로 불리는 '상민' 멧돼지 등 내 측근 중에는 그들 각자에 어울리는 별명을 적어도 하나씩은 갖고 있는 듯하다. 별명 숫자를 셀 수도 없이 많이 갖고 있는 나에 비하면 그들은 아직 정치 새내기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남산 기슭의 음습한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동운' 멧돼지와 '상민' 멧돼지를 집으로 부르지 않았더니 섭섭하다며 난리를 치는 통에 어제는 그들을 불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더니 아침에 늦잠을 잤다. 야행성인 멧돼지가 늦잠이라니... 얼마 전 젊은 멧돼지들의 참사가 있었지만 내가 측근들을 불러 부어라 마셔라 놀고 싶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리더 멧돼지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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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젖는다는 건 움푹 팬 시간의 분지를 하염없이 걷는 일이다. 그곳에선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가 뒤섞이고, 내 것도 아닌, 누구의 것었는지도 모르는, 때로는 출처도 주인도 알 수 없는 낯선 경험들이 오가기도 한다. 눈물과 땀의 시내가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왁자한 웃음과 작게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삶이란 끝없이 고도를 높여 시간의 정점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것.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잃고 종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의 분지를 정처없이 떠도는 것.


오늘처럼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엔 상념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완벽한 날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밤중에 잠이 깨어 빗소리를 들었다. 당분간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침대에 누워 온 마음으로 빗소리에 귀 기울였다. 왜냐하면 - 우리에게 비가 내리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의 창조성으로 이루어진 극장 전체에서, 그 다섯 대륙을 통틀어서, 이 야생 세계의 장치만큼 경이로운 게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밀과 백합이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건 비에 달려 있다. 그 해에 비가 넉넉히 내리면 가을에 나무들은 고운 단풍 빛깔로 우리를 눈멀게 한다. 비의 양에 따라 연못도 신선해지거나 물이 말라 늪지로, 심지어 사막으로 변하거나 한다. 나는 마음 깊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귀 기울였다. 비는 찾아오는 장소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p.132)


누군가 자신이 듣고 있는 빗소리를 마음에 아로새긴 하나의 문장으로, 혹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로 내게 들려주면 좋겠다. 자동차 전조등의 점멸하는 불빛이 빗속에서 수채화처럼 번진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땅, 그리고 어두운 마음... 오늘의 비는 자신의 자리를 미처 내주지 못한 태만한 가을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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