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목련꽃 그늘 아래 서면


아파트 화단에는 벌써 산수유꽃이 노르스름한 배경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계절이 가고 오는 자연의 순리를 결코 막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완연한 봄! 리더 멧돼지가 된 지 만 1년이 되는 이봄에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왔습니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상석에 앉아 술을 먹는 게 소원'이라고 공언해 왔던 나는 리더 멧돼지로 당선된 이후 상석에 앉아 세계 여러 나라의 술을 원 없이 마셔 보았습니다. 물론 남은 임기 동안의 술 약속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 편 멧돼지 무리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내가 밀었던 기연 멧돼지가 겨우 당선되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나는 그와 2주에 한 번씩 만나 술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사실 그는 나의 1년 선배이지만 내 앞에서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겸손을 떨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지금의 대표 자리도 주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앞의 일기에서도 썼지만 우리 멧돼지들은 11월에서 1월이 발정기인 탓에 봄이 되면 오히려 원기가 떨어지곤 합니다. 이런 까닭에 수컷 멧돼지들은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비빔목에 몸을 비벼대거나 습지를 찾아 진흙 목욕을 즐기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눈에 비친 수컷 멧돼지들의 이런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던지 봄만 되면 암컷 멧돼지들의 잔소리가 늘어나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생기가 돋는 암컷 멧돼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보면 잔소리를 할 새도 없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부터 일본을 좋아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일본의 은혜를 받고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히토쓰바시 대학이 있던 자리가 눈에 선합니다.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너 아버지 멧돼지를 만나러 갔을 때 일본은 선진국답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일본 멧돼지들은 미개한 한국 멧돼지들과 달리 무슨 일이든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가 허락만 해준다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일본에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선일체, 아니 '내한일체'가 나의 바람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 멧돼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동을 시켰다거나 군인 멧돼지들을 만족시키는 종군 위안부로 써먹었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지나간 과거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나의 선조들은 피해는커녕 은혜를 받은 처지이니 그들에게 은혜를 갚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였고 그는 나를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초청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충복이 되겠다는 나의 생각과 리더 멧돼지의 자격으로 가는 일본 여행, 그리고 아내 멧돼지의 잔소리도 없앨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띵호와(挺好啊)!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멧돼지들은 나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시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사실 일본에서 쭉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아무튼 나는 1박 2일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모든 게 기시감 멧돼지의 뜻대로 되는 듯한 나의 행보는 국내의 많은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조만간 뒷골목 똘마니들을 시켜  그들 모두를 잡아넣을 계획입니다. 그나저나 아내 멧돼지는 집을 잘 짓기로 유명한 일본의 다다미 멧돼지로부터 옷을 선물로 받았다며 좋아했습니다. 목련꽃그늘 아래 서니 술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내 멧돼지와 술 한 잔 해야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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