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가령 쿨하다거나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하다거나 하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면 당신은 적어도 어리거나 젊은 나이임에 틀림없다. 물론 연배가 들어 뵈는 사람 중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요만큼도 피해를 입고 싶지 않고 나 역시 상대방에게 눈곱 만치의 피해도 주지 않겠다는 심보, 너와는 구질구질하게 얽히지 않겠다는 다짐, 이런저런 문제로 다투느니 차라리 안 만나는 게 서로를 위해 좋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 뭐 이런 생각들이 나의 내면을 채우지 않았었나 싶다. 그 당시의 나는 인생을 이해하기에는 한참이나 어린 나이였으니까 이해하자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

 

이런 얘기를 꺼내 놓고 보니 내 고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이해도 못하면서, 단순히 친구들에게 우쭐대려는 목적으로 틈만 나면 철학책을 읽어댔었다. 그야말로 읽어댔던 것이다. 플라톤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대부분을 읽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시험 전날에도 나는 책상 서랍에 책을 넣어두고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들켜 혼쭐이 났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되바라진 아이였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무렵의 어느 날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가 내 주위에 앉아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가져 간 책을 꺼내 읽었다. 내가 탔던 역으로부터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멀뚱멀뚱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자니 무료했던지 그 중 한 아저씨가 내게 무슨 책을 읽느냐 물었다. 나는 대답도 없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들고 간 책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내 기억에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게 물었던 아저씨 왈, "인생이란 말이야..."로 시작된 장광설에 나는 몹시도 기분이 상했었던 듯하다. "아저씨가 인생에 대해 뭘 알아요?"로 시작된 나의 반격에 주변의 아줌마 아저씨들 눈이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래졌다. "어려운 수학 문제도 여러 번 되물었던 사람이 정답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인생이 무엇인지 반복하여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던 사람만이 인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저 아무런 의심 없이 세월만 보낸 사람이라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인생을 알 수는 없는 거겠죠."

 

나는 그때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이런저런 조언과 함께.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마뜩잖게 생각했던 내가 귀기울여 들었을 리 만무하다. 나는 그렇게 까칠한 성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곁을 내어주면 줄수록 번잡한 일이 수도 없이 늘어나는 게 사실이다. 때로는 구질구질해 보이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아하고 고고한 자세로 혼자 지내는 게 훨씬 더 좋아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내 인생 내 맘대로 사는 것이니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그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도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있다. 인생의 숨은 비밀, 보석과도 같은 삶의 교훈은 항상 진흙탕처럼 여겨지는 그 구질구질한 관계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흔히 나쁜 남자로 분류되는 그런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면에는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잘 알고 있다. 쿨한 관계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대개 번잡함을 회피하려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산다 한들 별반 잃을 것도 없겠지만 인생 전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보석같은 삶의 교훈은 절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주된 목적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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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0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19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1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잡함을 회피하려는 이기심... 얻을 수 있는 보석같은 삶의 교훈... 명심해보기로
감사합니다

꼼쥐 2014-09-20 15:00   좋아요 0 | URL
비 님 반갑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그렇더군요. 자신의 시간을 타인으로 인해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바로 그런 경우죠.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계절의 순환에 나는 이유도 없이 아득해지곤 한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과 나도 모르게 이불을 여미게 되는 밤 기온과 더없이 맑은 하늘.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오곤 한다.

 

지금이야 '여행'하면 으레 자가용이나 버스가 먼저 떠오르지만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기차'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단조로운 연속음으로 덜컹대는 비둘기호의 느린 기차바퀴 소리, 서 있는 승객들을 우악스럽게 밀어부치며 지나가는 홍익회 아저씨의 특유의 목소리 "심심풀이 땅콩이나 오징어 있어요.", 그런 소음과는 무관하게 차창으로 비껴드는 나른한 가을 햇살, 혼잡한 객실을 유령처럼 떠돌던 매캐한 석유 냄새, 그리고 기차의 더딘 발걸음에 아슴아슴 밀려오는 졸음.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 생활을 했던 나는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곤 했다. 대학에서 MT를 갈 때도,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도 언제나 기차를 탔다. 열에 두서너 번은 자리에 앉아 졸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석유 냄새에 이따금 멀미를 했고, 볼이 미어지도록 삶은 계란을 한 입에 밀어넣는 앞 좌석 꼬마를 부러워했다.

 

열차의 진동에 맞춰 대여섯 시간 흔들리다가 도착지를 알리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기 일쑤였고, 플랫폼을 휩쓸고 지나가는 건조한 바람에 남은 잠을 털어냈고, 멀어져가는 열차 꽁무니를 멀거니 쳐다보곤 했다. 역에서 내린 승객들이 개찰구를 향해 밭은 걸음을 옮겨갈 즈음,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개찰구를 열고 검표를 했다. 나는 그 무리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승객의 무리 속으로 섞여들곤 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역무원 앞에서는 언제나 주눅이 들었고, 역사를 멀찌기 벗어나서야 마음을 놓곤 했다.

 

가을이면 지금도 나는 문득문득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떠올리곤 한다. 지금은 사라져 아스라한 추억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 열차를 말이다. 여전히 나는 그때의 아날로그식 풍경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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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뜨거웠어요.

벌써 가을이라고 불러도 되나 불안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더군요. 천하장사라도 제 눈꺼풀은 들어올리지 못한다잖아요? 명절 연휴라지만 그저 조용하기만 합니다. 밖에서는 한껏 들뜬 아이들의 초롱한 웃음소리만 들려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매년 이맘때쯤의 아이들은 다들 시장에 간 엄마를 적당히 기다렸고, 적당히 배고팠고, 적당히 즐거웠고, 더러는 적당히 바빴었어요. 해거름에도 오지 않는 엄마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기나긴 그리움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일 즈음, 강가에는 은빛 억새의 서걱거림이 흐르는 강물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었죠. 밤이 늦어 돌아온 엄마와 늦도록 취한 아버지의 말다툼에 밤새 잠을 설쳤고, 없는 살림에도 젯상을 차리시는 엄마의 바쁜 손놀림에 부스스 잠이 깨곤 했었습니다. 물안개 걷히는 강가에서 겨우 고양이 세수를 마친 우리는 추석빔으로 받은 양말 한 켤레를 기쁘게 갈아 신고는 젯상 앞에 올망졸망 모여 추석 차례를 지내곤 했었죠.

 

이제 그런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겠지요. 아이들은 제각각 흩어져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카톡을 하거나, 텔레비전 화면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사람의 말소리가 사라진 집 안에 온갖 기계음만 가득합니다. 결핍이 풍요로 변하는 동안 우리가 잃었던 것이 비단 사람의 말소리뿐은 아니겠지요.

 

명절 연휴만 되면 이상하게 잠이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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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이 코앞이다.

이맘때면 당연히 느껴야 할, 또는 그렇다고 믿는 '여유로움'과는 사뭇 동떨어진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연휴가 주는 푸근함보다는 피곤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마저 들게 마련이다.  명절은 그저 의례적인 것, 어쩔 수 없는 행사쯤으로 사고의 폭이 한없이 좁아진다.  내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독서가 아닐까 싶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책이 <인생의 목적어>였다.  카피라이터 하면 으레 떠오른 것이 기발한 발상과 말장난에 가까운 유희가 아닐 수 없지만 나는 그 책을 읽고 '정철'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저변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씨와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인에서 오는 묘한 느낌은 글을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 '정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반갑기 그지없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언제나 말랑말랑한 감성을 자극한다.  피곤하고 무기력한 시간이 계속될 때 그녀의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왠지 모를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인간답지 않게 살아가는 나에게 '인간다움'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 모르핀을 맞고 몇 달쯤 거뜬히 살아내곤 한다.

 

 

 

 

 

 

 

 

주말부부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았다.  학창시절에 나는 그림에는 그야말로 젬병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림을 배우고 연습한다는 사실에 아내는 놀라워했다.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림에는 젬병이지만 아무튼 나는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얼마 전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입장표명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이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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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두 가지 대비되는 원색이 혼합되어 원래의 색을 구분할 수 없는 파스텔톤의 색깔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예컨대 허공을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새도 없이 불시착한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식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이 바로 그것이다. 느낌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우리는 두 감정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비록 여러 감정이 혼재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충격에 버금가는 두 감정이 느닷없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 감정의 출처를 오래도록 의식하곤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 보름쯤 지나는 동안 나는 두 감정의 경계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오늘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아, 돌아가셨지' 하고는 이내 무기력한 현실로 되돌아오기를 수차례. 또는 화장을 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는 과정을 또렷이 지켜봤음에도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이었던 듯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가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시도 때도 없이 선명하게 각인되곤 하였다.

 

근 이십여년을 병원에서 지냈던 아버지로 인해 가족 모두의 뇌리에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나 보았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토록 혼란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비기 오락가락 했던 오늘, 하릴없이 창밖을 보며 우울한 상념에 젖었었다. 궂은 날 찾아오는 오래된 지병처럼 가슴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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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9-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혈연이란 그래서 진하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음대로 이을수도 끊을수도 없는.
여긴 이제 비가 그쳤어요. 내일은 말간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꼼쥐 2014-09-05 19:47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시작된 추석연휴 탓인지 거리에는 차가 넘쳐나네요. 하늘은 맑고 연휴 내내 비도 오지 않는다 하니 hnine 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