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한다면 어느 누구의 공감도 받아내지 못할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적인 얘기에 누군가의 공감을 바라는 일, 그것은 마치 말도 못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 날 작열하는 태양과 그에 어울리는 풍경을 머릿속에서나마 희미하게 떠올려 봄으로써 잠시나마 추위를 잊어보려는 얄팍한 시도와 같다. 사실 오늘처럼 더운 날 겨울의 어느 모퉁이를 떠올려 본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더운 건 더운 것일 뿐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짧은 연휴의 감질나는 열기가 하룻밤 새에 푸스스 꺼져버렸는지 막상 연휴의 시작인 오늘은 초여름처럼 더운 한낮의 열기에 나른한 졸음만 몰려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6주기이기도 한 오늘. 벌써 6년? 놀라게 된다. 서거 당시에는 그저 놀랍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몸서리가 쳐졌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과연 노 전 대통령의 운명이었을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시들한 죽음에 이르고야 말겠지만 그때까지 그들의 작태를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마음이란...

 

민주주의의 퇴행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제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 또한 최정점에 있는 몇몇의 사람들에게 점차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발전'이라고 칭한다. 노인 두 명 중 한명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이 나라의 현실은, 취업절벽과도 같은 청년실업의 문제는 권력자의 욕심에 묻혀 화석처럼 굳어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바랐던 노 전 대통령의 꿈은 노란 풍선에 실려 날아갔을 뿐이다. 연휴의 첫째날이 힘없이 사그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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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의 자원외교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모 기업의 회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은 후 목을 매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사실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목표로 현 정권이 야심차게 준비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고인이 된 기업의 회장은 죽기 직전 모 신문사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돈을 건넸던 정치인들의 이름을 쪽지에 줄줄이 남김으로써 검찰의 조사를 받게 만들기도 했구요. 그 소식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더니 요즘은 조금 잠잠해진 듯합니다. 물론 그 쪽지에 적힌 인사들은 하나같이 펄쩍 뛰더군요. 자신만큼은 누구보다 결백하다고 말이지요. 심지어 어느 정치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1원이라도 받았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구요. 예전부터 써먹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저는 지금껏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정계를 떠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늘 누명만 쓰며 살았던 걸까요?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언제가 되면, 도대체 언제 국가는 그 최고의 임무가 그저 몇백만의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언제, 국가는 평화를 향해 전혀 눈에 띄진 않지만 애쓰는 많은 발걸음들이야말로 개인에게도 여러 민족들에게도 전장에서의 대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뮌헨 대학교 의대생인 한스 숄과 뜻을 함께 한 3명의 친구, 조직을 이끌었던 쿠르트 후버 철학 교수님, 뒤늦게 합류한 한스 숄의 여동생 조피 숄이 모여 만든 '백장미'단은 나치에 반대하고 히틀러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배포합니다. 그러다 1943년 2월, 대학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돼 '조국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됩니다.

 

어찌 보면 조피와 그의 동료들이 한 일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히틀러 체제에 반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삐라'를 뿌린 것뿐이었고, 조피는 이것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철저히 비폭력적이었으나 나치 시절엔 그 '소극적 저항'마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뮌헨의 '백장미단'은 여섯 번째 '삐라'를 뿌린 뒤 모두 체포되었지만, 그 삐라들은 침묵하며 나찌에 동조하던 독일인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고, 나라 바깥까지 퍼져 나갔던 것이지요.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조국의 패전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고뇌는 조피의 일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시대를 종말의 시대로 믿고 있다. 이 모든 끔찍한 징조들이 그렇게 믿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한 번이라도 이 시대에 살았다면, 영원히 이 시대와 함께 묶여 생각될 사람으로서,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신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내일도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죽는다면 내 죄는 적잖이 클 것이다. 마치 죽으면서 이 땅덩어리도 함께 파괴한 것만큼이나 말이다. 나는 오늘날 경건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자취를 좇아가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고작 칼부림과 같은 수치스런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한 듯이… 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존재만을 위한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 중에 조피는 이런 말도 남깁니다.

 

"올바른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올바름 넘치는 세상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날씨는 화창한데 나는 간다. 그러나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가. 얼마나 젊고 희망에 찬 생명이… 만약 우리가 한 행동이 많은 사람을 깨우쳤다면, 지금 죽는다고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제가 이 책을 인용한 이유는 고인이 된 기업 회장을 미화하거나 그의 행동이 정당했다 변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는 마당에 자신을 괴롭혔던 누군가에게 복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그 한을 품고 죽는다 한들 남아 있는 사람에 의해 불쌍하다 동정을 받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적어도 정의나 평화 등 우리가 '대의'라고 믿게 되는 넓은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 1주기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던 이유는 이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목숨 앞에 정의롭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이어지는 한 이 정부는 다른 어떤 변명으로도 정의를 내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아직도 믿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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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잦아든 등산로는 한적했다. 물기 머금은 등산로에는 아카시아 꽃잎이 눈처럼 깔리고 군데군데 참나무 잔가지가 떨어진 걸로 보아 간밤의 비바람이 약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멀리 멧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선잠을 깬 아기가 엄마를 찾아 보채는 것처럼 빗발은 그쳤다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다시 내리곤 했다.

 

비에 젖은 소나무 둥치를 가만가만 만져보았다. 매일 아침 같은 길, 같은 나무를 스치면서도 그날 그날의 날씨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 달라지는지... 능선에 올랐을 때 아가씨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것인지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이다. 단발머리에 볼살이 통통한 애띤 얼굴, 검은 운동복 안에 감춰진 복스러운 몸매의 아가씨는 저만치 앞서가다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말이다. 비 때문인지, 사람이 없는 산길이 무서웠던 것인지 아가씨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아카시아 꽃이 떨어진 등산로는 그야말로 꽃길이다. 뉘라서 이같은 환대를 받아 볼 것인가. 먹구름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아카시아의 달콤한 향기가 유난히 짙었던 오늘 아침,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행복은 토닥토닥 내리는 빗방울처럼 그렇게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한발짝만 비껴 서도 이토록 웃을 일이 많아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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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내게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나타날 때가 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앞에 떡 하니 펼쳐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현실로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 느닷없음에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하게 마련이지만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감안하면 도대체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났을까 궁금해진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주중 휴일을 조촐하게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성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었다. 전날 조금 피곤했었던지 버스가 출발하자 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버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벌써 도착했을 리는 만무하고, 차량 증가로 도로가 꽉 막혀 있나 싶어 밖을 내다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오직 내가 탔던 차만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어디론가 열심히 통화를 하느라 승객들에게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버스라지만 고속도로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있어도 되나 싶었다. 혹시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어느 여자 승객은 기사에게 큰소리로 항의를 했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상황을 설명했다. 버스가 고장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말이다. 곧 예비차량이 올 것이니 그 차로 옮겨 타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승객의 안전이었다. 버스가 2차선에서 20분 이상 멈춰 서 있었는데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버스 안에서 안전벨트를 맨 채 대기하는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기사는 가까스로 버스의 시동을 거는 데 성공했고 꿀렁거리는 차를 몰고 몇 백 미터를 주행하여 갓길에 정차했다. 그 불안한 주행이 시작되고 차가 꿀렁꿀렁 흔들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저씨!" 하는 짜증과 불안이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다. 차가 멈춘 지 30분 이상이 지날 즈음 같은 회사의 차량이 한 대 도착했다. 차 안에는 여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빈 자리를 찾아 앉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고가 일단락 되고 차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하여 고속도로 2차선에서 멈춘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누르고 안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간혹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질 때 일순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한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어린이날 아들은 학교에서 받아왔노라며 과학의 날 기념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주는 상장과 부상을 보여주었다. 부상이라야 나로호를 본뜬 USB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상을 받은 아들도 어떤 이유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단다.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다. 초등학생인 사내녀석들은 다 그런 건지. 아무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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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벌써 여름으로 가려는지 사람들 입에서는 '덥다. 더워!'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조급함이 계절로 옮겨간 듯하다. 이제 겨우 5월 초순. 산책을 부르는 신선한 바람이 봄의 갈피 어디쯤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 본다. 나는 아직 이 계절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음이다. 억. 울. 해!!!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읽은 후 걷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심해도 너무 심한 과장이다. 그야말로 뻥이다. 그러나 걷기에 대한 시각이 조금쯤 변한 건 사실이다. 걷기와 관련된 책을 찾다 보면 이따금 <플래닛 워커 : 아름다운 지구인> 과 같은 감동 100%의 책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이나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와 같은 재미있는 책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걸어서 남 주나?' 아니면 말고.

 

 

 

 

 

 

 

 

나는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하루키의 광팬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사심이 작동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의 여행기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여행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여행기에 빠져서 하루키 폐인이 된 사람을 나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은 말할 수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그의 시적 영역, 또는 누구보다도 깊은 사색의 영역에 이끌리듯 빨려들어가게 된다. 마치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지독한 열병처럼 '페소아적 사유'에 펄펄 끓게 된다. 그 장대한 사유의 기록은 그만큼 지독하다. 어쩌면 이 책은 그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하면 '아이, 언제 적 사람을 들먹이고 그래?' 하는 볼멘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문단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중요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반드시 접해야 할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뚜렷한 주관이 소설에서도 언뜻언뜻 비치지만 그의 산문집보다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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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5-0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신작이 아니라 `하루키의 여행법`의 개정판인 모양입니다^^

꼼쥐 2015-05-07 15:4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어쩐지 목차를 보니 알겠더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