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선명하던 나뭇가지가 연녹색 봄의 물결로 차츰 흐릿하게 변해갑니다. 장한 햇살과 나날이 높아만 가는 기온이 흐릿하던 나뭇가지의 형체마저 완전히 지워버리는 날 우리는 어쩌면 짧았던 봄의 여운을 못내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산로에는 은사시나무 씨앗이 잔설처럼 쌓이고, 도로변 가로수는 이팝나무꽃으로 하얗게 물들었습니다. 그렇게 2025년의 4월이 가고 있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오가는 등산로에는 잘게 부서진 가랑잎이 마치 김가루처럼 흩날립니다. 나는 그 가랑잎의 잔해를 밟을 때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쳐야 온전하던 가랑잎이 저렇게 부서지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무거운 체중으로 눌러야 저렇게 형체도 없이 부서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런 의문은 정확한 답을 찾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삶을 지속하는 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일회성의 반성과 자책의 감정이 조금쯤 포함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강 작가의 산문집 <빛과 실>을 읽고 있습니다. 17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기에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책이라면 뭐든 일단 사놓고 보는 성마른 성격의 나이기에 구매 일자와 완독 일자는 매번 크게 차이가 나곤 합니다. 책이 발효가 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책의 출간 일자에 맞춰 일찌감치 사 두었다가 묵히고 묵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슬그머니 읽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사치라면 사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내 삶에서 누리는 가장 큰 호사는 어쩌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마음껏 사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그 기쁨에 홀려 십오 분마다 쓰기를 중지하고 마당으로 나와 거울들의 위치를 바꾼다. 더 이상 포집할 빛이 없어질 때까지 그 일을 반복한다."  (p.95~p.96)


성근 숲이 조금 더 울창해지면 나는 숲 속에서의 신비를 지금보다 더 자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뉘 때문입니다. 어두컴컴한 숲의 그늘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 어쩌면 그것은 한강 작가가 썼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신비로운 감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이팝나무 가로수의 흰색 꽃물결이 저쪽으로 밀려났다 금세 되돌아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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