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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운 날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춥다는 말을 먼저 하더군요.  입춘이라는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냐구 말이죠.  마치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보냈던 터라 어지간한 추위쯤이야 그럭저럭 잘 견딘다고 자신하지만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때보다 더한 추위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저의 생각도 한낱 인간의 오만함에 불과한 것일지도요.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뭇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나 봅니다.  어찌나 추웠던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손과 발에 동상을 달고 살았었고, 손등이 터서 쩍쩍 갈라지곤 했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지냈었는데 그날은 추워도 너무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꽁꽁 언 손과 발을 넣었을 때 어찌나 아리고 아프던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요즘은 저도 이따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무작정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이른 나이여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이 더 행복한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을 하기 어렵지만 제게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엄정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오늘 저는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 <눈물>을 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그 고통을 같이 할 수 없겠지요.  그 절대 고독의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것인지, 허망한 인간 삶을 손에서 놓고나면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한 채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인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작가의 <산중일기>를 읽고 리뷰를 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작가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의 유고집을 읽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한 것이겠지요.  2008년에 침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웠던 고 최인호 작가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인간이 갖는 숙명적인 나약함 앞에서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p.13)

 

그렇습니다.  작가는 1987년 6월에 세례성사를 받았고 2013년 9월에 세상을 마치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을 의지하여  살았던 듯합니다.  '최인호 베드로'로서 말입니다.  5년여의 투병기간을 작가는 '고통의 축제'라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작가는 그 축제를 온전히 즐겼다고 저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미약하고, 너무도 쉽게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는 그가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먼저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들을 말이죠.

 

끝없이 이어지는 신앙고백에 읽는 독자에 따라 혹 불편하다 느끼실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닌 것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작가처럼 죽음을 맞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 우리들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신앙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자책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그렇게 대물림하듯 배우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이런 구절에서 저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용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발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이 햇빛을 받는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있어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너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0)

 

참으로 재주가 많은 작가였습니다.  살아서의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질시와 원망을 듣기도 했을 터이고, 인간으로서의 잘못도 많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들도 서서히 잊혀지겠지요.  다만 그의 작품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읽히고 또 읽혀질 것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부여받은 재능을 다 펼치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요?

 

입춘이라는데 봄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셨나요?  바람이 휩쓸고 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구름 한 점 없었던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봄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듯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을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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