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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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멤버였던 한 친구의 결혼 후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막 제대하여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였고,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거나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사실 우리 동아리는 동아리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작은 모임에 불과했었지만 대학 시절 우리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곤 했었다.  여자 셋에 남자 하나인 우리 모임은 비록 인원은 단출했지만 다니는 학교가 다 달랐기에 약속 시간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임의 청일점이었던 내가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모임 장소는 언제나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의 어느 카페로 정해졌었고,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한참이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었고,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배꼽이 빠지도록 웃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형제자매인 양 몰려다녔고 이따금 그것도 시큰둥해지면 응암동의 단독주택에 살던 한 친구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가곤 했었다.  서울에서 건축 설계 사무소를 하던 그 친구의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셨던 까닭에 우리 멤버들도 언제나 환영을 받았었다.

 

그녀의 집은 복잡한 서울 시내에 위치한 집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했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과 잘 가꾸어진 정원, 식구 세 명이 살기에는 턱없이 넓었던 3층 건물, 그리고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끝없이 내오던 음식과 과일.  그럼에도 그때는 누구 하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같은 대학생이라는 약하디 약한 동질감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내가 갑작스레 군입대를 하면서 깨질 줄 알았던 모임은 단지 모임의 장소만 바뀌어 계속 이어졌다.  내가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군생활을 했던 것도 모임이 이어진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들은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했던 불편을 감수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면회를 오곤 했었다.  내무반의 막내사절부터 줄기차게 면회를 오는 그녀들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혹시 고참들로부터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무반의 고참들은 오히려 나를 통하여 여자 친구를 한 명쯤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더 컸었던 듯했다.

 

내가 제대를 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녀들은 졸업을 했다.  둘은 취직을 했고 응암동에 살던 그녀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도서관에 나와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이따금 영화를 보거나 전공이 국문과였으니만큼 적당히 글을 쓰면서 지냈다.  한마디로 무위도식의 삶을 굳건히 살았던 셈이다.  그러던 중 취직을 했던 한 명이 결혼을 했고 서울 외곽의 신시가지에 터를 잡고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33평의 깨끗한 아파트와 모든 게 새것인 신혼살림.  비록 전세라고는 했지만 사회 초년생인 그녀에게는 과분한 것이엇는지도 몰랐고,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신혼집과 자신의 남편을, 행복에 취한 자신을 한껏 자랑하고 싶어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신혼집 집들이에서 응암동 그녀가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곳저곳 한참을 둘러보던 그녀는 소파에 풀썩 몸을 내던지며 새댁이던 다른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몇 평이야?" 묻자 새댁이었던 그녀는 "응, 삼십삼 평.  그래도 꽤 넓어 보이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응암동 그녀의 대답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응암동 그녀의 대답은 "그래?  답답하겠다." 였다.  우리를 초대했던 신혼부부는 물론 나와 같이 갔던 또 다른 그녀마저 일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응암동 그녀뿐이었다.

 

그때 응암동 그녀는 신혼이었던 그녀를 놀려주려는 의도도, 일찍 결혼한 그녀를 시샘해서 나온 말도 아니었음을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와 만나기 전에는 지하철을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고 했던 응암동 그녀의 고백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우리가 자주 몰려다니던 그때 인기리에 방영되던 '전원일기'에 대해 우리 중 누군가가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도 그녀는 '그거 그냥 설정 아니야?"하고 되물었었다.  그녀는 다만 자신 밖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를 읽으면서 문득 응암동 그녀를 떠올렸던 것은 작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느꼈기 때문이다.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는 소제목의 글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예를 들어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재벌집 아들 김주원(현빈)은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에게 친절한 얼굴로 이렇게 묻는다.  "이봐, 길라임씨.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뭐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하면 오랫동안 저축도 하고 마음도 졸이고, 뭐 그러는 거야?"    (p.25)

 

그런가 하면 자신의 중학교 시절 체험에서,

 

"어느 날 우리 둘은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놀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가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  그의 말에는 그 어떤 공격성이나 비아냥의 기운도 없었다.  그의 의문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천진함이야말로 그가 가난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28)

 

산문집 <보다>에서 작가는 자신의 체험, 보았던 영화, 읽었던 책 등에서 작가 자신이 느꼈던 점과 생각나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작가는 여러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산문집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글은 나와 생각이 달라서, 어떤 글은 재미가 없어서, 어떤 글은 너무나 현학적이어서...  그렇게 읽다 보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머릿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느낌만 전해질 뿐.

 

응암동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빈둥대다가, 또는 이따금 나를 귀찮게 하다가 불쑥 결혼을 했고, 얼마 안 가 이혼을 했고, 한동안 나에게 밤마다 슬픈 전화를 하다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연락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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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11 10:36   좋아요 0 | URL
호호호 꼼쥐님의 스토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녀 1남도 모임이 되는군요^^

시크릿가든의 김주원 대사 들으며 참 서글펐는데....
그래도 현빈은 여전히 좋아요^^

꼼쥐 2014-11-14 10:13   좋아요 0 | URL
어떤 모임에서든 모임의 성패는 인적구성의 성비가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소통이 얼마만큼 잘 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조금 특이한 구성이었지만 유대관계는 상당히 좋았던 것 같아요.

시크릿가든, 저도 자주 보던 드라마였었죠. 저는 현빈보다는 하지원이 맘에 들어서. ㅎㅎ

[그장소] 2014-12-22 08:23   좋아요 0 | URL
확실히 글쓰시는게 단정하게 뭔가 자주 해왔던 익숙함이 느껴져 편안해요.
역시 혼자만 보기위한 글을 쓰는건 좋진 못한것 같아요.꼼쥐님 글을 보니 제가
얼마나 대화라는 것을 잊었나를 알겠어요..슬퍼요..

그치만 글은 재미있었고 좋아요..^^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자주뵙겠습니다.

꼼쥐 2014-12-27 12:38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다른 블로거의 글을 읽고 소통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겠지요.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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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웃음을 참는다는 것은 집 앞 건너편의 신설교회가 주민의 화합을 도모코져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춰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뻥을 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최근에 컴백한 MC몽의 '내일 더 힘들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책을 읽다가 그만 병원에 삼 일쯤 입원할 뻔했다. 병명은 '웃음 방어기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급발성 호흡곤란 및 복통'.

 

병원에 가는 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나는 참았던 웃음을 시원하게 터트렸고, 내 웃음 소리에 놀란 옆집의 불임 부부는 한밤중의 난데없는 소음에 놀라 잠에서 깨는 바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며 좋아했고, 어쩌면 일흔을 넘긴 윗집의 노부부도 조만간 늦둥이 소식을 전해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무렵에 이르러서야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나는 '나의 웃음을 이웃에게 알리지 말라!'고 외칠 뻔했으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압력밥솥의 추를 흔들며 새어 나온 김 같은 것이, 뜨겁게, 입술을 빠져나왔다." (p.180)

 

그런가 하면 나는 다음날 닞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키득대고 웃는 바람에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사람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림으로써 대한민국의 노동 생상성을 0.001%쯤 감소시켰으며, '뭐가 그리 우습느냐?'는 짜증 섞인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고 얼버무렸으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막 깨닫는 중이라고 덧붙여 말해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과연 이와 같은 나의 노력이 대한민국의 건보재정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생각하며 산술적이고도 논리적인 방식으로 계산하기 위하여 옆에 놓인 계산기를 어찌나 눌러댔던지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였다.

 

급기야 나는 '너 요즘 아무도 몰래 엑스터시를 하는 거 아니냐'는 엉뚱하고도 해괴모닉한 질문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수능특강 윤리와 사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마약 중독자로 내몰릴 뻔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신종 마약에 취하겠는가.

 

"지구의 모든 것들을 대표해 - 삼미는 최후까지 자신의 질량을 보존해주었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기가 종료된 후 삼미의 선수 전원이 그라운드로 올라왔다. 고별의 안내 방송과 함께 슈퍼스타즈가 연고지의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올렸고, 떡 떡 떡,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팬들은 뜨끈뜨끈한 박수와 환호를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82년 2월 5일 창단에서 85년 6월 21일의 마지막 경기까지 - 3년 6개월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통산 120승 4무 211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흐르는 별 삼미 슈퍼스타즈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p.117)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믈럽 회원이었던 작중 화자와 친구는 짧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운명처럼 그보다 더 짧은 사춘기를 보냈고, 찝찔한 눈물을 흘리며 각오를 다졌고. 과연 일류대에 합격했다. '빨간 옷에 청바지 입고 산에 갈 생각'을 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고군분투했던 팀의 선수들과 함께 했던 작중 화자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 - 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199)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 이후 이렇게 실컷 웃어본 적도 없는 듯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웃음 속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블랙코미디와도 같은 책이다. 무방비로 똥침을 맞았을 때의 화끈한 충격처럼 우리는 누구나 운명이라는 다부진 엉덩이에 깊숙한 똥침을 날릴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요나라, 갱들이여>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처럼 '다 그렇게 가는 거지.' 우리의 삶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서태지의 '소격동'에서)

 

지나온 삶의 궤적이 타원 방정식의 두 초점처럼 분명하지 않은 어떤 중심을 향해 이끌려지고, 생명을 다한 시간들이 늦가을의 살비늘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또 다른 생명의 세포들이 그 자리를 다시 꿰차는 것처럼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회원은 지금도 어디선가 회원 가입서에 사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팔십 년대의 소년은 이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IMF의 긴 터널 속에서 이혼을 하고, 프로의 세계가 된 돈벌이에 힘겨워했고, 급기야 실직을 했고, 여러 번 직장을 옮겼고, 아내와 재결합을 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견지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회원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고, 각자의 위치에서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으며' 산다.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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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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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가 바라다보이는 암스테르담의 멋진 식당에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앉아 있어요. 음, 연인이거나 방금 전 첫눈에 반한 사람이거나. 아무튼 당신 앞의 그 사람으로부터 '나는 아직 당신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숨긴 채 도도한 척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커플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아닌 말기 암을 앓고 있는 한 소녀와 골육종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대화라면, 운하 위로 미끄러지듯 석양이 흐르고 있다면...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 스토리를 다룬,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십대의 시각에서, 고통 속에서 남들보다 먼저 수동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그들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소설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노력'이라고 썼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소아암을 앓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죽음이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 꼴은 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깨달았거나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삶의 비의를 그들을 통하여 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지 않을까 봐 두려워." (p.178)

 

소설에 등장하는 헤이즐은 열세 살에 4기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상태입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헤이즐이 걱정이 되었던 헤이즐의 엄마는 그녀에게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합니다. 그 모임은 암을 앓고 있는 십대들의 모임이었죠. 그곳에서 헤이즐은 맘에 드는 남자 아이를 만납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어거스터스 워터스. 그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헥틱 글로우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듣는 열일곱 살의 소년으로서 여느 십대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요. 농구 선수였던 그는 골육종을 앓는 바람에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을 닮았다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헤이즐에게 비디오 게임을 소설화한 <새벽의 대가>를 빌려주고 자신도 헤이즐이 좋아하는 <장엄한 고뇌>를 빌려 읽게 됩니다.

 

"제 이름은 헤이즐이에요.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제 인생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저희의 사랑은 웅장한 러브 스토리였고 아마 그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한다면 여기가 온통 눈물바다가 될 거예요. 거스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죠. 전 저희들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짜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이건 저희와 함께 사라질 거고,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전 그가 절 위해 추모사를 읽어 주길 바랐어요. 왜냐하면 달리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p.272)

 

위에 인용한 문장은 헤이즐이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에서 읊었던 추모사입니다. 그들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은 아마도 은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쓴 <장엄한 고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미완성으로 끝난 <장엄한 고뇌>를 헤이즐이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헤이즐은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거스(어거스터스의 애칭)는 작가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여행을 성사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피터 반 호텐은 술에 의지하여 사는 배뷸뚝이 아저씨에 불과했고, 그로부터 소설의 뒷이야기는 결코 들을 수 없었지요.

 

"물론 나도 피터 반 호텐이 제정신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세상은 소원을 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다. 중요한 건 문이 열렸다는 거고 내가『장엄한 고뇌 』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지방을 넘어섰다는 거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p.193)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사실 거스는 골육종이 재발한 상태였습니다. 같이 동행했던 헤이즐의 엄마와 집에 남아 있던 헤이즐의 아빠는 이미 거스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헤이즐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스는 자신의 병을 숨긴 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헤이즐과의 특별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암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도 그런 용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몇 년이나 바늘로 찔리고 칼로 찢기고 약물을 투여당하면서 어떻게든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매우, 대단히 기쁘게 죽어 버리고 싶었다." (p.114)

 

소설의 결말은 누구나 에측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스는 죽고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헤이즐을 위해 거스는 자신이 상상한 글을 작가 피터 반 호텐에게 보냅니다. 헤이즐의 추도문으로 말이죠. 죽어가면서도 거스는 홀로 남겨지게 될 헤이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칙칙할 듯한 소아암 환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제가 조금 특별하게 읽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 내내 십대들의 언어와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에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군데군데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가령 헤이즐의 아빠가 헤이즐에게 들려 준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런 예이겠지요.

 

"대학 시절 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단다. 작고 나이 든 여교수님이 가르치시는 굉장히 훌륭한 수학 수업이었지. 선생님께서는 푸리에 변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말하던 중에 갑자기 멈추시고는 그러셨지. '가끔 우주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곤 하는 것 같아.' 그게 내가 믿는 거란다. 난 우주가 자신을 알아채 주길 바란다고 믿는다. 우주가 의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지성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다고 생각한단다. 우주는 그 우아함을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도대체 뭐라고 우주가, 최소한 내가 본 우주가 일시적인 거라고 말하겠니?" (p.236)

 

남들은 평생을 두고(대략 칠,팔십 년은 되겠지만) 천천히 배워가는 삶의 의미를 소아암 환자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압축해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마음이겠지요. 어쩌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어른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피터 반 호텐처럼 뭔가 상처를 줄 만한 존재를 찾아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비참한 생명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처럼 좀비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계속 걷기 위한 모든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어른들도 있다. 둘 중 어떤 미래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세상의 모든 순수하고 좋은 것들을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령 죽음이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 해도 어거스터스와 내가 나눈 것 같은 종류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p.289)

 

가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군요. 괜스레 쓸쓸해집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삶마저 파괴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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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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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과 다듬고 매만져 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매끈해진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현실감있게 느껴지나요?  나는 어떤 작품을 읽든,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현실감'이라는 단어를 늘 생각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린 작품이 더 현실감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착각이죠.  실상 현실을 조금만 섞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듬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썽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부끄러운 현실, 더럽고 추잡한 인간 군상, 그날이 그날 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누군가의 작품 속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욕구가 투영된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그닥 아름답지 못한 소설을 만나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늘 보고 듣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조차 또 마주한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입니다.  지겨운 생각마저 들겠지요.  그런 게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약간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즐겨 찾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나 리 차일드, 때로는 빌 브라이슨의 작품이 그것입니다.  감 잡으셨겠지만 오쿠다 히데오나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위트와 유머를 적절히 사용하는 작가이고 리 차일드는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있고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로 유명한 작가죠.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일종의 기분전환용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들 작가의 책에서 읽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도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는 작가 본인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그런 작품입니다.  위트와 유머를 걷어낸, 간결한 스토리에 문학적 수사를 배제한, 오직 작중 인물들을 통하여 현실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다소 엉뚱하고도 지루한, 그러면서도 6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만 읽을까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읽은 게 아까워서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3개 읍이 합병한 인구 12만의 지방 신도시 ‘유메노’시 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통합시라는 게 여간 문제가 많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시라며 거창하게 출발했던 창원시도 얼마 전 회의석상에서 시장이 계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통합을 통하여 지역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얄팍한 잇속을 버리고  통합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며 조용히 살았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메노'시는 시의 탄생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외부 인구의 유입과 상권의 변화, 그에 따른 범죄의 증가와 빈부 격차 등 긍정적 변화보다는 부정적 변화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이, 직업, 주변 환경,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섯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청 생활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는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한 후 현청으로 옮겨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내는 인물입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유메노를 떠나고 싶은 여고 2학년생 구보 후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게임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에게 납치됩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엄청난 돈을 받아 사기를 치는 세일즈맨 가토 유야는 선배가 벌인 살인 사건에 본의 아니게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보안 요원이자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중년의 이혼녀 호리베 다에코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유메노 시의원 야마모토 준이치는 그의 조력자로 친분이 있었던 야쿠자 조직에 의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무의미한 듯 보입니다.  소설의 끝부분에 발생하는 고통사고에 대부분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조금 황당해 보이구요.  작가는 소설의 구성이나 문학적 완성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작가는 오직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균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의 문제점은 물론, 가정 폭력, 은둔형 외톨이, 사이비 신흥 종교, 정치권의 세습, 사기 세일즈,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유부녀의 원조 교제 등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후미에를 납치했던 노부히코는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게임 속의 가상현실을 사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그의 부모에게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한 말은 가슴이 아픕니다.

 

"학교라는 데는 공부 잘하는 놈 아니면 싸움 잘하는 깡패 같은 놈의 전용 놀이터야.  그 밖의 학생들에게는 교도소하고 전혀 다를 게 없어.  날마다 학교에 갇혀서 듣기도 싫은 수업을 듣는 게 무슨 얼어죽을 의무교육이야?  난 이 학교 진짜 죽도록 싫었어.  수학여행 때는 어땠는 줄 알아?  나를 깡패새끼들하고 한 팀에 몰아넣었지.  여행하는 사흘 내내 짐꾼 노릇만 했어.  애초에 수학여행 같은 거 가고 싶지도 않았어.  일주일 전부터 배탈이 났었다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냔 말이야."    (p.590)

 

기분전환 삼아 자신있게 선택했던 책들도 간혹 원래의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책으로 귀결될 때가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의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라고 내가 굳게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낭패도 경험하면서 살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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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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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령 베스트셀러라거나, 추천도서라거나, 제목이 맘에 들었다거나, 한 작가를 유독 좋아한다거나,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 갑자기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지라 내가 과연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기는 한건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기준이나 원칙을 워낙 싫어해야지요.  나의 그런 성격이 독서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 나는 남들이 보면 까탈스런 성격이겠거니 오해할 정도로 책 선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죠.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입니다.  나는 저자가 아닌 역자(譯者)가 누구냐에 따라 책을 고르기도 하고 미련없이 내던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심지요?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는 역자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와 김화영 작가가 고작입니다.  프랑스 문학은 김화영 작가가 번역한 책이라면 무조건 고르고, 영미권 문학은 이윤기 작가의 번역서를 고르곤 했습니다.

 

일종의 강박증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번역가라면 적어도 작품을 보는 안목과 한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지 언어에 능통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좋은 번역서를 내놓는다고 믿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읽게 된 책이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습니다.  번역은 물론 김화영 작가가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몇 년 뒤에 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리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역자의 이름에 김.화.영. 세 글자만 눈에 띄었을 뿐이니까요. 나는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작품의 첫 문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7)

 

멋진 문장이지요?  프랑스 소설이 대개 그렇듯 열린 결말과 스토리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여 한 권을 읽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약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일이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모디아노는 소설의 곳곳에 멋진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와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선물하고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어라고는 철자만 겨우 아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물론 그 공이 순전히 좋은 번역 덕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입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약간의 힌트라도 줄 만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언진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지냈던 시간과 대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한다."    (p.71)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모든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란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을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새로 보태기도 하고 빠뜨리기도 하면서 자신을 구축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건 읽은 지 오래된 소설처럼 기억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내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온 기억의 총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p.241)

 

작중화자는 묻고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만 들었지 그동안의 기억, 그가 살아온 삶의 축적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참담하고 막막할지 공감하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밀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우리들 주위의 성당 지붕 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 위에, 골짜기를 뚫고 뻗은 긋고 있는 더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8~p.229)

 

과거에 내가 살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장소이건만 기억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작중화자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타자를 찾는 노력, 언젠가 우리도 그 길 위에 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 삶의 기억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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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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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