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
에크낫 이스워런 지음, 박웅희 옮김 / 바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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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머리 속으로만 알고 지내던 지식을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확연히 깨달을 때가 있다.  
좋은 책을 만나거나 누군가와 대화 도중에 듣게 된 우연한 말 한마디가 생명이 없이 묻혀 있던 지식을 한 귀절의 글, 또는 한마디의 말을 매개로 살아 숨쉬는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시간과 대상의 절묘한 조화, 나와 언어의 알 수 없는 교감으로 가능한 것인데, 이른바 ’궁합이 맞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어쩌면 그 대상은 명저서나 명강사가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 책은 내게 그런 대상이었다.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 살아온 나는 온전히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조급함,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허겁지겁 사는 것이 거의 습관으로 굳어졌었다.
이러한 습관은 나의 인간관계나 삶 전반에 있어 치명적인 악요소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속도전에 내몰리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쩌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런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고, 어떤 장애를 경험하게 되는지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결국 ’바쁘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때문에’ 또는 ’왜?’라는 질문은 현대사회의 틀 속에서 금기시되었고, 반박의 여지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는 중요하거나 하찮은 갖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더 빨리, 더 빠리, 더 빨리 가도록 압박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루를 설계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지나친 압력을 가하지 않는 느리고 고른 속도로 우리 일을 행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요구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되도록 빨리 평소의 침착하고 신중한 속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P.78)

저자는 이 책에서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 더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현재에 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에  ’블루마운틴 명상센터’를 설립했던 저자의 생각은 인도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를 서로 비교하고 어느 것이 더 좋다는 단순 평가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컴퓨터나 그밖의 현대적 이기(利器)를 사용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비심, 친절, 호의, 용서 등이야말로 진정한 생활필수품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 존재로 사는 데 필수적인 것은 이런 미덕들입니다.  그리고 이 분야야말로 우리 시대가 크게 뒤쳐져 있는 부분입니다." (P.208)

저자가 제안하는 효율적인 삶을 위한 8단계 프로그램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1.늦추기  
   하루를 일찍 시작할 것, 자신이 빨라지려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만트람을 외울 것, TV 시청 시간을 줄이고 인간관계를 함양할 것, 느림을 나태와 혼동하지 말 것.
2.주의 집중 
   한 번에 둘 이상의 일을 하지 말 것. 어떤 활동이 사소해 보이더라도 마음을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3.감각 기르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견해나 취향에서 벗어날 것.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히지 말고 몸에 좋은 먹거리를 선택하 듯 마음을 위해 읽고 보는 것을 신중하게 선택할 것.
4.남을 먼저 생각하기
   자기만의 욕구, 자기만의 바람, 자기만의 계획, 자기만의 생각에 골몰하지 말 것.서로 경쟁하지 말고 서로를 완성하는 길을 찾을 것.
5.영적 교제
   함께 있으면 자신이 향상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 것.
6.영적 독서
  
매일 30분 정도 할애해 성구(聖句)나 종교에 상관없이 위대한 신비가들의 글을 읽을 것.
7.만트람 외기
  
만트람, 즉 ’성스러운 이름’(예를 들면 ’라마 라마’나 ’아베 마리아’ 등)을 조용히 반복하여 외울 것.
8.명상
  
매일 아침 되도록 이른 시간에 30분 동안 명상할 것.

생애분석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친 반목과 오해 그리고 공격의 근원을 그가 고안한 <그림자>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며 설명하고 있다. 
그림자는 나의 어두운 면이다. 그래서 의식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엄연히 나의 의식 기저에
존재하며, 나를 사로잡는다. 나를 사로잡는 방식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그림자의 투사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이처럼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긴 시간을 두고 본다면 그림자를 표면에 내놓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특수한 상황에서 그림자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친구를 시험해 보기를 원한다면 그와 함께 만취하도록 술을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한 마리의 짐승을 보게 될 것입니다."
  (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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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서 있게 하는 것은 다리가 아닌 영혼입니다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박찬이 옮김 / 열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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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순탄한 삶에서는 결코 깨닫지 못할 자각이 그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깟 깨달음이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무에 그리 대단하냐고.  그러나 하나의 깨달음은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죽음 직전에 회한 하나는 덜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살아가면서의 실수는 생명이 지속되는 한 바로잡을 수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후회는 영원 속에 묻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죽음을 경험했고, 구사일생으로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 한동안 알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는 것, 첫키스의 떨림처럼 강렬했던 그 경험은 온 세포에 화인을 찍어 놓은 듯 실체도 없는 기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은 언제, 몇 살 때에 겪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어떤 깨달음(또는 분위기)을 던져주게 마련이고, 동일한 체험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자력장에 이끌리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열네 살에 암 판정을 받고 10년간의 투병을 거치는 동안 다리와 폐, 간 일부까지 절단해야 했던 시간을 바탕으로 그가 느끼고 체험한 진실, 유머, 따스함, 생의 깨달음 등을 쓰고 있다.  1973년 스페인 출생인 저자는 현재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기고자로서 <카탈루냐>신문의 칼럼을 쓰고 있다 한다.  저자는 자신의 투병생활에서 얻은 교훈을 통하여 이 세상이 '노란 세상'이며, 우리 개개인은 누군가의 '노랑'이며 나만의 '노랑'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자신을 믿는 방법, 그리고 저자가 발견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은 그 설계도와 같은 것이며, 자칭 공업기술자라 말하는 저자는 그 설계도의 밑그림을 그린 설계자이다.

"행복과 암, 일반적으로 이 두 단어는 공존할 수 없다.  암은 내게서 한쪽다리, 한쪽 폐, 일부의 간을 빼앗아갔지만 한편으로는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암이 내게 알려준 것이 무엇일까? 차례대로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암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다.  또한 나의 한계를 알게 해주었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P.19)

저자가 말하는 '노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발견은 스물세 가지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실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얻은 교훈들이 바로 그것인데 '잃어버린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에서부터 '가장 깊숙이 숨겨진 내면을 알아야 그 본모습이 보인다', '행복을 위한 일곱 가지 조언',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아는 방법'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을 알고 있을 때 글이나 말은 길지 않아도 결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듣는 사람도 정확한 의미를 전달받는다.

스페인어로 사랑(amor), 우정(amistad), 노랑(amarillo)은 모두 첫머리가 'am'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노랑은 그렇게 발견되었다. 

"당신의 삶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노랑이라고 한다.  노랑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  노랑과는 굳이 만나거나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된다.  노랑과 교제하는 방법은 스킨십, 애정 표현, 포옹 등이다.  배우자 외에는 인간관계에서 거의 오가지 않던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P.156)

저자가 말하는 노랑은 자신을 반영하는 어떤 대상, 그 대상은 동성일 필요도 없고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일생에서 만날 수 있는 노랑은 스물세 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배우자는 아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상인 '노랑'.  저자가 꿈꾸는 노란 세상은 온 인류가 다들 누군가의 '노랑'이 되는 그런 세상일 것이다.
책을 덮으며 질문 하나를 가슴에 담는다.
 "당신의 '노랑'은 몇 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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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 -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월드비전 희망의 기록
최민석 지음, 유별남 사진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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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갈고 닦아도 향상되지 않는 것이 있다.
슬픔에 대한 저항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지금도 슬픈 영화를 보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보노라면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게 된다.
가끔씩 이런 슬픔에 의연히 또는 담담하게 대처했으면 싶을 때가 있지만 마음으로만 그럴 뿐 나는 금세 분별력을 잃고 만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보지 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처음 알게 된 사실인 양 슬픔이 가슴 한가득 몰려왔다.
퇴근 후에 가르치는 아이들 얼굴이 오버랩되어 짠한 마음이 더했나 보다. 

이 책은 작가가 월드비전 홍보팀에서 근무했던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글이다.
월드비전 창립 60주년을 맞아 월드비전 사업장이 있는 전 대륙(아프리카, 중남미, 동유럽, 아시아)을 두 달에 한 번씩 직접 가서 취재하고, 사진을 찍어 온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학생 때 시집을 출판했다가 보기 좋게 망했던 경험이 있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었다던 작가는 자신의 냉소적인 문체로는 독자에게 그 감동을 생생히 전할 수 없을 것같아 출판을 고심했었나 보다.
그러나 작가도 서문에서 밝히듯이 결국 책은 발간되었고 그 과정에서 작가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지구촌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게 되었고, 사람에게 질문을 할 때 좀 더 고민하게 되었으며,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좀 더 배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내 생활 속으로 하나둘씩 가져왔다.  점점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감을 느꼈고,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되어감을 느꼈다." (P.13)

때로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원죄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우리는 몇 번이나 뿌리쳤던가.  단지 용기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내가 더 잘살게 되면 그때는 돕겠다는 둥 이러저러한 핑계로 그들의 간절한 눈길을 얼마나 외면했던가.  나는 이제 그런 핑계를 대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함도 아니요, 존경이나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 양심을 억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나의 작은 숙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좀 더 자유로워졌다.  아이들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구속당하면서도 전보다 더 자유롭다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학교를 짓고 보건소를 짓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이렇게 많은 힘을 쏟는 이유는, 진짜 희망은 보이는 곳이 아닌,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 밭에서 일궈낸 보이지 않는 배움과 고민의 시간은 결국 어떠한 사고나 자연재해도 앗아갈 수 없는 희망을 키워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P.131)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는 내 양심의 돌덩이를 걷어내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끈끈한 유대감은 세상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한다.
한줌의 사랑을 줌으로써 한아름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분명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터, 우리는 줌으로써 받는다고 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2010년의 말미에야 비로소 이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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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행복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는 게 참 행복하다 - 10년의 시골 라이프
조중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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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던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는 이런 귀절이 씌어 있다.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할 여건을 상정해 놓고서 행복을 기대하는 겁니다.  사실상 그건 우리의 친구나 우리의 하느님, 혹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너는 나의 행복이다.  만일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한다면 나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라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나 역시 신부님이 상정한 그런 부류에 속하는 평범한 사람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혹은 저렇게 된다면 하고 시도때도 없이 조건을 만드는데 분주할뿐 정작 행복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수없이 만든 나의 조건이 충족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릴뿐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는 농촌생활의 수많은 불편함을 하나하나 따지고 되짚어 그 불편함을 개선할 자신이 있었기에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무작정 결심하고 떠난 것인지...
모르긴 몰라도 그는 후자였기에 도시생활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2010년의 어느 봄날, 나는 쓰지 신이치의 <슬로 라이프>를 읽었었다.  무엇엔가 홀린 기분으로 단숨에 읽어내려간 그 책은 조중의님의 책처럼 시골 생활을 담은 일기였다.  나는 그때의 느낌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도시에 살면서 마냥 그리워만 하는 순수 자연, 그 닿을 수 없는 동경, 그리고 그리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에게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간절함의 대상이었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현재 CBS 보도제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작가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의 글에서는 시골생활의 소소한 일상이, 그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하루하루가 감사함으로 채워질 수 있음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리라.

"나는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가 몰아서 내쉰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고 쓸쓸해하고 그리워하는 일이 이와 같다.  그러나 나는 만사가 이와 같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낮달은 밤의 마술에 빠졌다가도 낮이 되면 깨어나는 불멸이니까.  내일이면 하늘의 선물처럼 새로운 낮달이 다시 나올 테니까.  사는 건 이처럼 행복한 일이다." (P.237)

그렇다.
행복은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지 어느 날 ’뚝’하고 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가끔 내가 머리로만 알던 상식이 환경이 바뀌었을 때 가슴으로 절절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머릿속 상식이라는 것이 하찮고 무의미하다고 깨달을 때가 있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라고 했던 어느 여행 서적의 제목처럼 떠나지 않고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변하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바로 그곳에 행복은 늘 존재한다.  언제까지나.

내 삶의 반을 도시에서 보냈으니 나머지 반은 시골에서 지내도 좋겠다고 말하는 작가.
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증을 딴 셈이다.  진심으로 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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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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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는 더더욱 조심스럽다.
대개 이제 막 등단한 신인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작품의 창의성이나 표현의 적확성, 또는 신선한 소재에 치중하게 되고, 부족한 자신의 경험을 메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전적 소설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과 연륜이 쌓여 대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작가는 오직 창작열에 의지하여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 돈과 명예를 얻게 되면 자신의 이름만 믿고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조금 편하게 작품활동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세상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적인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을 지키지 못할 때 작가는 삼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예술정신을 불태우는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고, 독자의 입장에서 후대에 남을만한 그런 대작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문학의 거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황석영의 신작 '강남몽'을 읽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의 부의 상징이자 모든 물욕의 중심인 '강남'이라는 한정적 공간을 배경으로 해방 이후의 시대 흐름과 다양한 군상의 흥망성쇠를 담아내려 했던 작가의 의도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소설은 주제와 더불어 '재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작품을 썼던 작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각각의 인물은 주제를 숨기고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작품의 주제는 희석되게 마련이다.  주제를 전면에 드러내면 그것은 자칫 한낱 역사서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  그럼에도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이름만 바꾼 소설적 인물에 짊어 지운다.  작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주요 인물들은 로봇처럼 움직인다.  끔찍하다.  소설 속 인물에 동화되지 못한 독자는 얼마나 불행한가.

모두 다섯 개 장으로 이루어진 ’강남몽’을 각 장별로 나눠 살펴보면 그는 1장(백화점이 무너지다)에서 부동산 재벌인 김진의 첩이자 룸쌀롱 업주인 박선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을 무시하고 오직 돈만 향해 달려온 여자치고는 너무나 평범해서 독자는 맹물을 마시는듯 밋밋하게 느껴진다.   이어 2장(’생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의 주인공 김진을 중심으로 한 생동하는 인물들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격변의 근 현대사를 주저리주저리 나열하여 지루하고 따분하다.  실리와 처신에 밝은 김진의 인물적 특색은 서사에 눌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3장(길 가는 데 땅이 있다)은 부동산 업자 심남수를 위주로 전개되는데, 부동산 투기가 극성이던 당시의 상황을 작가는 치밀하게 그리지 못한다.  이상하리만치 이 장에서 작가는 스토리에 치중하고, 심남수라는 낭만적 인물을 구실로 두루뭉실 넘어간다.
이어 4장(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작가는 돌연 우리가 흔히 보았던 조폭의 이야기들을 흥미 위주로 다루고 있다.  현대의 긴박한 액션 영화를 낡은 무성영화로 보는 듯했다.  5장(여기 사람 있어요)에서는 백화점 점원인 임정아의 삶이 그려진다.  결국 백화점은 붕괴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 그때의 상황이 무덤덤하게 그려지고 있다.

강남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각 인물의 삶을 적절히 배치하고 그들 상호간의 연계성을 자연스레 묶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에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은 그 인물들이 살아 움직일 때 가능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독자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인물은 서로 다르지만, 구별되지 않는 욕망의 스펙트럼을 서사에 담음으로써 작가는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제 훨훨 타오르는 장작의 내음이 아닌, 옹색하기 그지없는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난다.  "토지"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고 박경리 작가에 비하면 황석영 작가는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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