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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서 있게 하는 것은 다리가 아닌 영혼입니다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박찬이 옮김 / 열음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순탄한 삶에서는 결코 깨닫지 못할 자각이 그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깟 깨달음이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무에 그리 대단하냐고. 그러나 하나의 깨달음은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죽음 직전에 회한 하나는 덜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살아가면서의 실수는 생명이 지속되는 한 바로잡을 수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후회는 영원 속에 묻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죽음을 경험했고, 구사일생으로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 한동안 알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는 것, 첫키스의 떨림처럼 강렬했던 그 경험은 온 세포에 화인을 찍어 놓은 듯 실체도 없는 기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은 언제, 몇 살 때에 겪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어떤 깨달음(또는 분위기)을 던져주게 마련이고, 동일한 체험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자력장에 이끌리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열네 살에 암 판정을 받고 10년간의 투병을 거치는 동안 다리와 폐, 간 일부까지 절단해야 했던 시간을 바탕으로 그가 느끼고 체험한 진실, 유머, 따스함, 생의 깨달음 등을 쓰고 있다. 1973년 스페인 출생인 저자는 현재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기고자로서 <카탈루냐>신문의 칼럼을 쓰고 있다 한다. 저자는 자신의 투병생활에서 얻은 교훈을 통하여 이 세상이 '노란 세상'이며, 우리 개개인은 누군가의 '노랑'이며 나만의 '노랑'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자신을 믿는 방법, 그리고 저자가 발견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은 그 설계도와 같은 것이며, 자칭 공업기술자라 말하는 저자는 그 설계도의 밑그림을 그린 설계자이다.
"행복과 암, 일반적으로 이 두 단어는 공존할 수 없다. 암은 내게서 한쪽다리, 한쪽 폐, 일부의 간을 빼앗아갔지만 한편으로는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암이 내게 알려준 것이 무엇일까? 차례대로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암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다. 또한 나의 한계를 알게 해주었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P.19)
저자가 말하는 '노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발견은 스물세 가지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실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얻은 교훈들이 바로 그것인데 '잃어버린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에서부터 '가장 깊숙이 숨겨진 내면을 알아야 그 본모습이 보인다', '행복을 위한 일곱 가지 조언',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아는 방법'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을 알고 있을 때 글이나 말은 길지 않아도 결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듣는 사람도 정확한 의미를 전달받는다.
스페인어로 사랑(amor), 우정(amistad), 노랑(amarillo)은 모두 첫머리가 'am'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노랑은 그렇게 발견되었다.
"당신의 삶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노랑이라고 한다. 노랑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 노랑과는 굳이 만나거나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된다. 노랑과 교제하는 방법은 스킨십, 애정 표현, 포옹 등이다. 배우자 외에는 인간관계에서 거의 오가지 않던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P.156)
저자가 말하는 노랑은 자신을 반영하는 어떤 대상, 그 대상은 동성일 필요도 없고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일생에서 만날 수 있는 노랑은 스물세 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배우자는 아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상인 '노랑'. 저자가 꿈꾸는 노란 세상은 온 인류가 다들 누군가의 '노랑'이 되는 그런 세상일 것이다.
책을 덮으며 질문 하나를 가슴에 담는다.
"당신의 '노랑'은 몇 명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