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스러운 게 어디 봄 날씨뿐일까마는 창밖에는 여전히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잎도 나지 않은 잿빛 가지 위에 촛불을 닮은 흰 목련 봉오리가 이제나저제나 개화의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비는 그치지 않고 하마 핀 산수유꽃의 노란 그림자가 봄비 속에서 소리도 없이 지워진다. 그렇게 며칠 남지 않은 3월도 아쉽게 흐른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의 굴레 속에서 '나는 이쯤에서 작별을 고한다'며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겨울의 잔상들. 성긴 빗발의 발치에는 물웅덩이가 고이고 수면 위로 번지는 물동그라미의 파장을 따라 그리움의 물결이 너울지듯 인다.


 총선도 멀지 않았다. 현 정권 들어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의 몇몇 글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내가 야당의 당원이거나 관련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지금껏 어느 당이건 당원으로 가입한 적이 없다. 사실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비슷한 정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매우 비겁한 처신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말하길 정당에 가입하여 권리당원으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 비판할 자격도 없다고 한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던 나의 과거 행적은 어떤 해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치 성향에 있어 중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은 80%의 보수와 20% 혹은 그 이하의 진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당 역시 온건 보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현 정권은 극우 보수 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보수 축에도 속하지 않는 일베 수준의 인사들이 행정 권력을 잡고 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주변에도 정부를 지지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그들을 분류하자면 이렇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음에도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정부를 지지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 부자는 아니지만 종교적 신념에 의한 맹목적 추종자들, 박정희 시대의 세뇌와 학습에 의해 형성된 과거의 가치관을 변경하려 들지 않는 과거 회귀형 인간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지 부조화형 인간들이 그들이다. 혹여라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디에 속하는 인간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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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이면 한결같이 '드디어 한 주가 다 갔군' 하는 생각과 '벌써 한 주가 다 지나가다니' 하는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들곤 한다. 이런 상반된 생각이나 감정이 동시에 드는 경우는 우리의 경험에서 극히 예외적인 것이어서 때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이란 워낙 간사한 동물인지라 기분에 따라서 어떤 생각이든 제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지만 그래도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갖는다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주말 휴일이 시작되는 토요일 아침. 비가 갠 아침의 등산로는 적당히 부드러웠다. 젖은 낙엽에서 풍겨 오는 구수한 내음, 짙은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나무의 몸 냄새 그리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푸성귀의 비린 냄새. 양지쪽 비탈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피어나고 조팝나무의 여린 잎들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었다. 비나 눈이 유난스럽게 잦았던 지난겨울. 싱싱하게 솟아나는 여린 생명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마저도 감사할 일이지만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예년에 비해 작황이 부진하다는 어젯밤 뉴스가 불현듯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가 오름세가 한동안 또 지속되겠구나, 하는 걱정이 가슴 한켠을 저릿하게 눌러왔다.


등산로를 따라 더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길은 원래의 등산로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길도 없는 길섶으로 들어서고, 이를 목격한 다른 또 누군가가 그 뒤를 따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샛길은 지름길을 원하는 등산객들의 숱한 발길에 다져지고 다져져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길'이라는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는 하나의 길일 뿐이지만 숲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살아가는 동식물들에게 있어 길이란 인간들에 의해 자신의 동료가 죽고, 앞으로도 죽어갈 처절한 패배의 현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없이 산을 깎고, 건물을 짓고, 길을 낸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분명 철거해야 할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일 뿐인데... 그 골칫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매연을 펑펑 내뿜는 중장비를 굴리고, 자재를 지키기 위해 밤새 조명을 밝힌다.


하얀 얼룩이 진 배롱나무의 껍질이 얼마나 매끄럽고 고운지, 헤라클레스의 깊게 굴곡진 근육처럼 툭툭 불거진 참나무의 껍질이 얼마나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3월도 다 가지 않았는데 한낮에는 벌써 초여름 날씨처럼 기온이 오른다. 날씨가 정말 하루가 다르게 극과 극으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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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허수경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행간에 숨은 아픔 한 조각이 도려내듯 잘려 나오는 듯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마을이건 아이의 시체를 묻는 애장터가 있었습니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그 시기에 어른들은 아이가 삼칠일·백일· 등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지 지켜본 후에 출생신고를 하는 일이 빈번해서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에 차이가 나는 사례도 흔했습니다. 유아기에 있는 아이가 죽으면 집안의 남성이 아이의 시신을 낡은 옷이나 천으로 둘둘 싸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에 묻었습니다. 애장터·애촉·애처구덩이·아장단지·애기장 등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달랐지만, 마을마다 죽은 아이를 묻는 암묵적인 장소가 따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 어쩌면 아이의 죽음은 별것 아닌 일이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봉분도 없고, 묘지의 흔적마저 없는 애장터를 지날 때마다 마을 아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던 그 시절에.


한두 차례 봄비가 흩뿌렸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이어졌습니다. 먼지처럼 많은 기억을 안고 사는 우리는 오늘처럼 봄바람 드센 날에는 바람결에 슬픈 기억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싶어집니다. 저 봄바람 속엔 그런 기억들만 모두 모인 까닭에 창밖으론 웅웅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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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제외한 평일 새벽 5시 30분이면 나는 언제나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오래된 나만의 규칙이다. 시나브로 해가 길어지고는 있지만 그 시각의 바깥은 여전히 어둡다. 어둠이 한창인 그때에도 나는 등산용 랜턴도 없이 산을 오른다. 이따금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랜턴도 없이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걱정 어린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늘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곤 한다. 사실 내가 오르는 산의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후 캄캄한 어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숲에 사는 동식물들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 마당에 나조차 그들을 놀라게 하거나 잠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헤드 랜턴이나 가벼운 랜턴을 손에 들고 산에 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아파트 조성 공사가 시작되고, 숲의 절반이 깎여나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24시간 내내 빛의 공해에 시달리는 숲 속 생물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등산로에서 이따금 보던 너구리도, 나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펄쩍 뛰어 달아나던 고라니도, 아침이면 등산객의 발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를 찾아 나무를 오르내리던 청설모 가족들도, 몇 년에 한 번쯤 볼 수 있었던 서늘한 뱀의 자취도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그립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해만 떨어지면 마을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그때의 어둠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호기심과 상상력의 세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모험과 도전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지면서 호기심과 상상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우리 주변에서 시가 사라진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지 모른다. 시는 오롯이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둠은 신화 속의 어떤 존재를 떠올리는 모험과 도전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상상과 모험의 세계에서 만난 시어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한나절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진 요즘, 현실과 리얼리즘만 겨우 살아남았다. 모험과 상상력은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급격히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소설보다 시가 먼저 탄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 어둠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존하는 어둠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과 모험심을 자극하고, 감성과 낭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둠의 실종은 곧 편리와 생생한 현실의 세계로 이어졌지만 시의 세계를 잃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빛의 세계를 찬양하는 이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암흑천지의 어둠은 이제 우리 주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가 시를 잃었던 어느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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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3-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문단 완전 감동입니다!

꼼쥐 2024-03-15 16:38   좋아요 0 | URL
이렇게 멋진 칭찬을...
감사합니다.^^
 

볕이 잘 드는 양지쪽 산비탈에는 어린 묘목의 가녀린 가지 위로 파릇한 새순이 돋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참나무 군락과 각각의 나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진 듯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섶에서 먹이를 찾던 참새떼가 포릉포릉 날았다. 부지런한 딱따구리 한 마리가 죽은 소나무 기둥에 앉아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다. 더없이 푸른 하늘에 덩그러니 걸린 구름 한 조각이 갈 길을 몰라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영하로 떨어진 아침 기온 탓인지, 아니면 휴일 아침마저 부지런을 떨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발심 때문인지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여러 동식물이 공존하는 숲속 풍경은 다채로웠다.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도 자연을 닮아가야 한다고 나는 오늘 아침 산길을 오르며 생각했다. 다채로운 숲속 풍경을 짙푸른 하늘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생각할 때마다 '서슴없다'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한다. '서슴거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나 행동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자꾸 머뭇거리며 망설이다.'이다. 그러므로 '서슴없다'는 '말이나 행동에 망설임이나 거침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 사전>을 썼던 김소연 시인은 자신의 다른 저서 <시옷의 세계>에서 '서슴거림의 기록'이라는 소제목에 '침묵 단상'이라는 제하를 달았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침묵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패처럼 나를 방어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 있다."  (p.70 '시옷의 세계' 중에서)

"침묵 자체가 아니라, 침묵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내 입장이 바뀌게 된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에 서슴거림이란 말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나는 '서슴거리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망설임이나 흔들림 하고도 다른, 어떤 이상한 신중함 같은 게 느껴져요. 전 말도 되게 서슴거리면서 하고, 성격도 서슴거려요. 그런 모든 것들 때문에 종국엔 입을 다물고, 글을 쓰는 거겠지요."


어느 조직에서나 최종 결정권자는 말과 행동 모두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 말하자면 매사에 서슴거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매사에 서슴이 없다. 최종 결정권자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까닭에 서슴이 없다는 것은 곧 파국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경솔함이나 사사로움과는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치솟고 합계출산율 0.7이라는 극단의 시대로 가는 요즘, 다양성을 말살하기 위해 모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주요 피의자를 호주로 빼돌리는 이런 서슴없는 결정은 모두 대통령실에서 재가된 것이 아닌가. 과거 호주는 범죄자들의 유배지로 선택된 나라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낸다는 건 호주 국민들이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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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3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슴거리다... 침묵...!
좋아요~♡
배워갑니다.

꼼쥐 2024-03-15 16:40   좋아요 1 | URL
김소연 시인의 저작 ‘마음 사전‘을 읽어보면 서슴거리는 시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 단어의 적확한 의미와 쓰임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