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숲은 어쩌면 빛의 무인도인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그렇듯 어둠에 휩싸인 등산로를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겨놓습니다. 갑자기 닥친 추위에 사람들의 발길마저 끊긴 새벽 등산로는 괴괴한 어둠에 싸여 서늘했고, 우듬지를 훑고 지나는 바람 소리만 '쏴아 쏴' 요란했습니다. 무릇 침묵과 색깔의 계절이 가고 바야흐로 바람의 계절로 접어들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려는 듯 말입니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낙엽 밟히는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거침이 없는 바람 소리에 온통 마음이 빼앗겼던 새벽 산행이었습니다.

 

낮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산다는 게 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현듯 파도처럼 거칠어지다가도 어느 한순간 소리도 없이 잦아들어 바람이 거셌던 어느 가을날은 기억에서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 어느 코미디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순서를 정하여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는 건 분명 불행한 일일 테지요. 저 역시 기사를 읽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저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애도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의 가장 큰 병폐는 모든 일을 해석하려 든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타인의 죽음조차 해석하려 합니다. 그것은 애도와 명복의 대상은 될지언정 해석의 대상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누군가는 떠났고 또 누군가는 남겨졌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없다. 인간은 질문자가 아니라 대답해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끊임없는 삶의 물음에 대답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인간이다. 불가피한 고통이 눈앞에 있을 때 고통은 선택에 따라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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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은 제법 쌀쌀했다. 시간의 지문처럼 남은 지난여름의 선명한 기억들을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느낌만으로도 일거에 지워버릴 수 있다는 가을의 오만함에 사람들은 쉽게 굴복하고, 추앙하며, 그 길지 않은 계절의 시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어지러운 삶의 사유가 올곧은 가을빛에 곱게 빗질되어 넉넉한 겨울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올려질 것을 기대하면서...

 

고등학생인 아들은 다음 주에 있을 중간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학원으로 향했고, 조용한 실내에는 물에 젖은 책장의 얼룩무늬를 닮은 적막의 그림자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투명한 가을 햇살이 미세한 먼지 조각들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동안 이런저런 상념의 덩어리들이 부유하는 먼지 조각에 눈덩이처럼 달라붙는다.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주머니에 남들은 전혀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자존심을 넘치도록 담아두는 습성이 있어서 오늘처럼 가을 햇살에 먼지가 떠다니듯 고요마저 풍족한 그런 날이 오면 언젠가 넣어둔 주머니 속 자존심으로 인해 땅속 깊숙이 가라앉다가 끝내는 익사 직전의 빈사 상태에서 간신히 구제되곤 하는 것이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다음에 하자며 거절하고 말았다. 옆구리살이 1kg쯤 불어난 느낌이었고, 내 몸뚱어리는 그만큼의 중력으로 더 깊이 가라앉는 듯했다. 물론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널브러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세포 곳곳에 파고든 휴일의 무력감이 너무 강하고 단단해 보였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비롯된 어린아이의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시 읽었다. 1999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금은 품절되어 다른 출판사의 도서로 재출간되고 있다. 물론 번역가도 바뀌었으니 전혀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때 비는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를 보고 있으면, 비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비에는 그런 작용이 있다. 그리고 때로, 양쪽 다 그 나름의 현실성을 주장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비가 회전하는 - 너무도 완벽한 이야기지만 -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머리는 훨씬 더 혼란스러워진다." (p.149 '땅속에 묻힌 그녀의 작은 개' 중에서)

 

점심식사도 거른 채 책 한 권을 다 읽고 말았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 않았고, 책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머리는 훨씬 더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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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속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백 세 시대를 실감하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장수하는 사람들뿐이니 그마저도 속설인 듯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전두환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남에게 나쁜 짓을 하나라도 더 많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한정 오래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공기도 맑고 활동하기에 적정한 온도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몰려드는 듯합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시간부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나로서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맘때의 산길에서 부지런한 등산객을 만나는 일이 그닥 익숙한 풍경은 아니지만 근 일 년째 지속되는 코로나 정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산을 오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반려견의 배설물을 그냥 방치한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고, 조용한 새벽 산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건 없건 큰 소리로 '야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서양의 제왕학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면 동양에는 이종오의 <후흑학>이 있다는 문구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문구를 읽고 혹하여 저 역시 <후흑학>을 서둘러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책 한 권 읽는다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얼굴 뻔뻔한 사람이 될 리는 없겠지만 <후흑학>이라는 책이 있는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후흑의 고수인 양 행동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는 사람이 더 건강할까요? 아니면 포커페이스, 후흑의 뻔뻔한 인간들이 더 건강할까요?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을 떠올리면 후자가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①욕을 먹기 싫어서 매사에 완벽히 준비하고, 욕을 먹으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

②꼭 욕을 먹을 일만 골라하면서도, 욕을 먹으면 화를 내고 싫은 티를 내는 사람

③욕먹을 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 먼저 하는 사람

④“삶에서 남의 평판은 중요치 않아!” 욕을 먹든 말든 오불관언하는 사람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은 먼저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여 욕을 먹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늦게 만나고 싶어 옥황상제에게 끝없이 청원을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저승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승의 사람들은 그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나길 바랄 테지만 저승의 사람들은 그와의 대면을 하루라도 더 늦춰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이승의 삶을 남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건 어쩌면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살 나이를 더할수록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지난 삶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됩니다. 힐끔힐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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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다른 관점에서 보려 합니다. 오래 사는 건 벌 받을 게 더 남아서라고 보는 거죠.
늙어서도 뉴스에 나오고 욕을 먹는 높은? 분들을 보면 죽을 때를 놓쳤다고 보는 거예요.
편안히 잠들 죽음을 놓치고 아직까지도 받을 벌이 있어서 이승에 오래 남는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게다가 치매에 걸려 나중엔 가족에게조차 구박을 받을 처지가 된다면 그게 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20-10-11 16:30   좋아요 0 | URL
페크 님의 말씀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사는 게 마치 고통의 연속인 양 느껴져 불안하기도 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인가요? 제가 아마도 살면서 지은 죄가 많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노후를 살 만큼 살다가 잠자듯이 떠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없을 텐데 말이죠.
 

두꺼웠던 피부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얇아지는 것인지 조금만 세게 부딪혀도 상처가 나고 멍이 들거나 자주 흉이 지곤 한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상처가 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손 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쉽게 아물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한 가벼운 상처조차 예상 밖의 더딘 회복과 회복 후에 남는 볼썽사나운 흉터로 인해 이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가뜩이나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툭툭 불거진 흉터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가관이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지난여름에 시골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텃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쳐놓은 철조망 울타리를 보지 못해 그만 철조망에 바지가 걸려 바지가 찢어졌음은 물론 왼쪽 정강이 쪽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낮게 친 철조망 울타리가 콩잎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급히 걷다가 철조망에 걸린 가벼운 사고였다. 아무튼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당한 사고인지라 주인 부부는 미안함에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였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랬던 게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나 계절도 바뀌었건만 그때의 상처는 길게 그어진 흉물스러운 흉터로 남아 있다.

 

작은 충격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남은 흉터를 지켜보는 건 비단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듣게 되는 섭섭한 말 한마디에도 꽁한 매듭이 지어지고 마음의 상처가 되어 오래도록 서운한 마음을 품고 지내는 걸 보면 마음도 몸을 닮아가는 듯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천성이 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기에 딱 알맞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수록 세포의 재생 능력이 떨어져 일단 상처가 나면 회복도 더디고 흉터도 오래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중년을 지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갈수록 삶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까닭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 몸에 오래도록 흉터를 남기기도 하고, 뒤돌아서면 까맣게 잊을 듯한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꽁 하고 품은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그렇게 몸과 마음의 흉터를 통해 삶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연습은 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큰 흉터를 통해 이승의 기억을 저승의 어느 빈자리에 통째로 옮겨 놓기 위한 예행연습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우수수 흩어지는 가을바람에 가슴 한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상처를 입고 지난여름에 몸에 새긴 흉터를 보며 가물가물 잊히는 기억을 가만가만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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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7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것.
멋진 해석이십니다. 일리가 있어요.

꼼쥐 2020-10-04 12:33   좋아요 0 | URL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편협하고 속 좁은 인간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별것 아닌 사소한 말에도 토라지거나 섭섭해하기 일쑤이고...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반감과 조롱, 부패한 목사들에 대한 비난과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개신교계와 비개신교계 간의 분열과 반목 등은 보수와 진보로 대변되는 우리나라만의 극단적인 정치지형과 맞물려 불필요한 손실을 초래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 국민적 차원의 비난이나 정치권 전체의 성토가 없었던 건 대형교회의 막강한 조직 동원력이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거 당락의 열쇠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거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자 바둑판 위의 요석처럼 인식되어 왔던 것인데, 이런 까닭에 개신교계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인의 당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개신교계에 유리한 각종 세제 혜택과 정치 편향적 목사들에 대한 특권을 보장받아 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권력 누수와 불평등한 조세 구조로 인한 폐해는 모두 선량한 국민들의 몫으로 남겨졌고, 수십 년 동안 개선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보수 단체와 전현직 야당 국회의원 그리고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세력들에 의한 광화문 집회와 그로 인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규모 확산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언젠가 터질 게 터졌다는 인식이 강한 듯하다. 그리고 늦은 감은 있지만 그들의 민낯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다행스러운 사건이라고 평하는 걸 듣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국적 확산으로 인해 누가 확진자인지 알 수 없는 극도로 불안한 환경이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성이 존재하는 사람들조차 검사를 기피한다거나 방역 당국 종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확진자들조차 어떤 음모설을 주장하거나 하는 등 비상식적이고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는 개신교계와 보수 단체의 행태를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면서 교회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극단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극우적 보수단체와 일부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교회라는 단일 대상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열렬한 개신교 신자마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못 하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에 다닌다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함으로써 나에 대한 이미지가 광화문 집회에 참가했던 일부 비상식적인 교인들과 동일시되거나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인물로 여겨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생각해보면 교회의 추락이 이처럼 급격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반성이나 뉘우침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개신교계의 자각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도출할 수 있었던 것도 획기적인 일로 여겨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공고했던 세력도 결국에는 그 끝이 있게 마련이고 우리는 2020년의 대한민국 코로나 정국에서 그 사실을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오늘은 처서, 영원할 것 같은 더위도 곧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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