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온은 제법 쌀쌀했다. 시간의 지문처럼 남은 지난여름의 선명한 기억들을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느낌만으로도 일거에 지워버릴 수 있다는 가을의 오만함에 사람들은 쉽게 굴복하고, 추앙하며, 그 길지 않은 계절의 시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어지러운 삶의 사유가 올곧은 가을빛에 곱게 빗질되어 넉넉한 겨울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올려질 것을 기대하면서...
고등학생인 아들은 다음 주에 있을 중간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학원으로 향했고, 조용한 실내에는 물에 젖은 책장의 얼룩무늬를 닮은 적막의 그림자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투명한 가을 햇살이 미세한 먼지 조각들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동안 이런저런 상념의 덩어리들이 부유하는 먼지 조각에 눈덩이처럼 달라붙는다.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주머니에 남들은 전혀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자존심을 넘치도록 담아두는 습성이 있어서 오늘처럼 가을 햇살에 먼지가 떠다니듯 고요마저 풍족한 그런 날이 오면 언젠가 넣어둔 주머니 속 자존심으로 인해 땅속 깊숙이 가라앉다가 끝내는 익사 직전의 빈사 상태에서 간신히 구제되곤 하는 것이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다음에 하자며 거절하고 말았다. 옆구리살이 1kg쯤 불어난 느낌이었고, 내 몸뚱어리는 그만큼의 중력으로 더 깊이 가라앉는 듯했다. 물론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널브러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세포 곳곳에 파고든 휴일의 무력감이 너무 강하고 단단해 보였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비롯된 어린아이의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시 읽었다. 1999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금은 품절되어 다른 출판사의 도서로 재출간되고 있다. 물론 번역가도 바뀌었으니 전혀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때 비는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를 보고 있으면, 비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비에는 그런 작용이 있다. 그리고 때로, 양쪽 다 그 나름의 현실성을 주장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비가 회전하는 - 너무도 완벽한 이야기지만 -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머리는 훨씬 더 혼란스러워진다." (p.149 '땅속에 묻힌 그녀의 작은 개' 중에서)
점심식사도 거른 채 책 한 권을 다 읽고 말았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 않았고, 책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머리는 훨씬 더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