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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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직장 후배와 함께 같은 차를 타고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주말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농사일을 거드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지라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그에게도 겁나고 두려운 게 있었던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자신은 귀신이 무섭다는 고백을 해왔을 때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잠을 자는 데 규칙적으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후 밤새 한잠도 못 잔 적도 있었다며 나이가 들어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고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절대 못하겠는데?" 하고 내가 묻자 그는 "에이, 절대 못해요."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신이나 유령을 실제로 목격하거나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이 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그들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까닭에 이런 초자연적인 대상이나 현상에 더욱 집착하고 관심을 갖게 되며 진위를 궁금해한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거나 깊은 산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갑작스러운 대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등골이 오싹해지거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불쾌한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변조되거나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기자 출신의 프랑스 최고 추리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였던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을 배경으로 인간 심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사랑과 질투를 텍스트의 서사로 엮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이라는 크고 어둡고 일반인이 모르는 비밀 공간이 산재할 것 같은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긴장감.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에릭과 라울 간의 질투.

 

"나는 이제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에릭 자신이 매우 바뀌었으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을 받게 된 날부터(이 말은 곧바로 나를 소름끼칠 정도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었다고 매우 엄숙하게 선언했지만, 그 괴물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에릭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용모가 그를 인간의 세상에서 추방시켰다. 에릭이 자신의 추악한 외모 때문에 인간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p.431)

 

천재적인 음악성과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지닌 에릭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잘 알려진 극장 내의 숨은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에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크리스틴 다에는 극장가의 주목을 받는 스타로 성장한다. 그러나 흉측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에릭은 줄곧 극장의 지하에서 생활하며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공연을 본 라울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불타는 사랑을 늒게 되는데...

 

"만일 그녀의 목소리가 사랑의 날개를 타고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며, 크리스틴은 오프터딩겐이라는 전설 속의 시인처럼 악마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p.44)

 

극적인 만남으로 라울과의 사랑을 키워가던 크리스틴은 공연 직후 에릭의 눈을 피해 라울과 함께 달아나자는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크리스틴을 찾아 헤매던 라울은 페르시아인의 도움을 받아 에릭을 찾게 되고...

 

"이보게, 다로가, 잘 들어 보게. 내가 그녀 발밑에 엎드리고 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네. '가엾고 불쌍한 에릭!'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았어. 그때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한 마리 불쌍한 개에 지나지 않았어. 다로가, 그건 사실이야."  (p.526)

 

에릭은 자신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기는 크리스틴의 눈물에 감화되어 크리스틴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포기한 채 그녀가 라울과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어쩌면 에릭은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 낸 가장 흉측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성이야 어떠하든, 얼굴이나 겉모습이 어떠하든 능력과 재능만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되는 현대판 에릭의 모습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에릭의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크리스틴의 눈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오페라의 유령을 읽거나 오페라로 감상할 때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작품 '피에타'를 떠올리게 되는 건 아마도 나만의 습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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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그린 사람 -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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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의 팬이 된 독자들 대부분은 출판사의 대대적인 광고나 어떤 이벤트를 통하지 않고, 블로그와 같은 개인 SNS에서 작가에 대한 호평 일색의 글을 읽고 궁금증 해소 차원에서 은유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은유 작가에 대한 유명세(?)는 입소문을 통한 조용한 광고 덕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을 직접적으로 증명한 작가라고나 할까. 암튼 게으른 독서가인 나 역시 이웃 블로그에서 읽었던 은유 작가의 매력에 이끌려 지금껏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책을 사랑하는 열혈 독서가들에게 은유 작가는 이미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지 않았을까. 사족이지만 내가 읽었던 은유 작가의 첫 작품은 <글쓰기의 최전선>이었다.

 

"이야기는 힘이 세서 견고한 관념을 부순다. 내가 듣는 이야기는 감각과 정신의 속성을 천천히 바꾼다.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인터뷰를 꼭 과제로 내어주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해진 시간에 집중해서 듣는 일보다 더 좋은 글쓰기 공부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보다 더 깊은 쾌락을 나는 모른다. 지배는 단절과 분열의 문화 속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결'은 억압을 벗어나고 해방에 이르는 시작이자 원리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크게 그린 사람> 역시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이다. 책에 등장하는 18명의 인터뷰이 역시 독자들에게 '연결'하고픈 은유 작가의 선택임을 생각할 때, 그들 각자의 인생관이나 신념 혹은 추구하는 세계관이 은유 작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감지하고 있을 터,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썼던 중국 작가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떠올렸던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연결이었지 싶다.

 

1부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에서는 평범한 길을 마다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묶었다. 사범대를 다니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이기지 않고' 교사가 되었음은 물론 지금은 인권기록활동가로 살고 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아픈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조기현은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투쟁을 시작했으며, 경찰 신분으로 자신이 겪은 '민생을 기록하는 원도, 평생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자연인 씨돌 김용현, 직업의 틀을 벗어던진 채 아나운서의 외연을 확장한 임현주, 자식을 잃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변인이 된 김용균의 엄마 김미숙이 그들이다.

 

2부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에서는 코로나 시국에 직접 관객을 찾아 나선 시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소설가 김중미,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장, 소설가 김혜진, 지구인컴퍼니 대표 민금채, 신영대 한양대 의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3부 '사는 일 자체로 누군가의 해방을 돕는 사람'에서는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37년간의 복직투쟁을 이어 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기 위해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수신지, 한국성폭력상담소장 김혜정, 비선출직 정치인 박선민, 청년 노동자 고 김태규의 누나 김도현, 소수자의 일상을 시로 그려 내는 시인 김현이 그들이다.

 

"인터뷰는 짧은 연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찾아온 느낌들, 생각들, 마음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마치 재물을 지키듯이 지켜내고 사는 사람들은 조용히 빛난다. 내가 만난 인터뷰이들은 그걸 삶으로 가만가만 해내는 분들이었고, 그들 앞에서 나는 자주 뜨거워졌다."  (p.300 '에필로그' 중에서)

 

찰랑이는 감정의 기복들이 마냥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한결같고 변수가 없는 이성의 결함으로만 이루어졌더라면 괜한 갈등이나 불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쏟아야 하는 쓸데없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고, 표리부동의 일관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은 어찌하여 자신의 모습을 본뜬 모형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서 정신이나 영혼만큼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원망이 나도 모르게 자라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완전성으로 인해 이 세상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모험과 가변성으로 가득 차고, 너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결합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협력과 연결의 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수많은 감정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예측불가의 다채로운 조화로 인해 각자의 삶에 재미를 더할 수 있다. 그곳에 너와 나의 다름이 있다. 인터뷰집을 읽는다는 건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아가 다름의 위대함을 깨닫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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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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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에는 언제나 그리움과 회한이 존재하지만, 현재의 내가 있기 위해서는 아스라한 기억의 잿더미 속에 산재하는 수많은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나를 일으켜 세웠던 용기의 순간들 또한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건 시간을 들쳐업고 나만의 외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슴아슴 멀어져 가는 용기의 순간들을 들먹인다는 건 우리가 습관처럼 되뇌는 '언젠가'에 숨겨진 일상성의 회복과 그 옅은 희망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다짐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행복한 순간에도 '언젠가 다시 하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멋진 풍광을 보면서도 '언젠가 꼭 다시 오자'라는 다짐을 구호처럼 내뱉기도 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도 '반드시 극복하여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서로의 가슴에 꼭꼭 눌러 새기듯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 습관에 포함된 '언젠가'에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몸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 가장 오랜 기억까지 되짚어봐도 나는 언제나 삼무호 안에 있었다. 할망들이 배경처럼 깔린 지구를 가리키며 파란 게 바다라고 말해줘도, 바다가 나오는 영상을 보아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이 구형으로 둥둥 떠다니거나 용기 안에 있지 않고 넓고 깊이 웅덩이져 있다니, 물이 밀려와서 발을 간질이고 사라진다니, 그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p.22 '루나' 중에서)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서윤빈 작가의 '루나'는 과거의 기억을 미래에 접목시킨 독특한 작품이다. 단편소설에서 무학적 완성도를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으나, 제주 해녀들이 바다가 아닌 우주공간에서 '물질'을 한다는 상상력은 쉽게 연결지을 수 없는 기발한 착상임에 틀림없다. '삼무호'라는 우주기지를 근거지로 모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제주 해녀들이 바다 대신 위성 사이를 유영하면서 광물을 캔다는 착상. 소설의 주인공인 '루나'는 할머니 해녀들과 또래의 어린 해녀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신이 구출한 우주 조난자 '켈빈'으로 인해 거대한 삶의 변화에 직면한다.

 

"켈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동기들은 입을 모아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만약 지구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돌아올 방법이 있을 테니, 한번 가봐서 나쁠 게 뭐가 있겠냐는 이유였다. 켈빈은 한술 더 떠서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서약서까지 써주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정말 돌아올 수 있는지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망설이는 건 스스로 뭘 원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p.43 '루나' 중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몹시 궁금해하던 차에 켈빈이 나타났고, 자신과 함께 지구에 가자고 루나를 부추겼던 것이다. 삼무호에 남을 거이냐, 아니면 켈빈과 함께 지구에 갈 것이냐 결정을 하지 못하던 루나에게 해녀 중급 시험일이 다가왔다. 친구인 ;이오'와 함께 50m 명줄을 달고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환영을 보게 되고 결국 '이오'는 환영에 이끌려 실종되고 만다. '삼무호'로 돌아온 루나와 우주 속으로 사라진 이오. 그리고 내일 지구를 향해 떠나게 되는 켈빈.

 

과거의 기억은 이따금 우리를 달무리처럼 유혹하기도 하고, 깊은 좌절의 순간을 딛고 일어섰던 용기의 발원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런 까닭에 과거는 미처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 손잡기도 하고, 선택에 놓인 현재의 우리를 흔들기도 한다. 서윤빈 작가의 단편소설 '루나'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바로 그 지점이다. 과거(제주 해녀의 물질)의 기억이 미래(우주공간에서의 물질)와 맞닿아 있고, 바로 그 경계에 흔들리는 현재(선택을 하지 못하는 루나)가 존재한다는 구성.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언제나 삶이 내미는 시험지를 앞에 둔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거기에 루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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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성공의 인사이트, 유대인 탈무드 명언 - 5천 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부와 성공을 얻었나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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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신의 그릇에 맞는 부의 크기도 가늠하게 된다. 말하자면 주제 파악이랄까, 지나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는 사회 초년생들이 보기에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여러 번 신중하게 두들겨 본 돌다리도 이따금 금이 가거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일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배포는 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사람을 믿는 일도, 앞으로의 경제 전망이나 전문가의 투자 전략도 도통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상에는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는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이 있다.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때 보는 눈이란, 외모만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눈이다. 겉은 소박할지라도 내면이 깊고 가치 있는 사람이 있고, 겉은 화려한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전자인 사람들을 일찍이 알아보고 관계를 잘 꾸려 나가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p.42)

 

인문학자이자 지식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현 역시 부와 성공의 원천을 탈무드에서 찾고 있다.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한 1901년부터 2021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943명 중 유대인은 210명(22%),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 민족이 일궈낸 결과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더구나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비롯해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투자가 조지 소로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 등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인사 중 다수가 유대인이고 보면, 5000년간에 걸쳐 유대인을 지탱해 온 생활 규범이자 '유대인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탈무드에서 우리들 개개인의 부와 성공에 대한 가르침을 배워 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탈무드에서는 지식을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교육은 도덕과 지혜의 두 기반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도덕은 미덕을 받들기 위해서이고, 지혜는 남의 악덕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도덕에만 중점을 두면 성인군자나 순교자밖에 나오지 않고, 지혜에만 중점을 두면 타산적인 이기주의자가 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덕과 지혜의 두 기반 위에 교육이 있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p.124)

 

김태현의 저서 ‘부와 성공의 인사이트, 유대인 탈무드 명언’은 유대인의 지혜를 담고 있는 탈무드와 전 세계 상위 1% 유대인 위인들의 명언 중 770개를 엄선했다. 저자는 “탈무드에는 인생의 순리를 따르면서도 가난을 싫어하고, 무엇보다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인생철학이 잘 담겨 있다."고 하면서 “어려서부터 탈무드를 통해 자부심과 정체성을 교육받은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힘이다.”라는 말로 탈무드를 통한 부와 성공의 인사이트를 강조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김만덕과 임상옥과 같은 두 거상이 있었고,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안타깝게도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의 인물이었기에 사료로 남겨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유대인들의 굴곡진 삶을 통한 통찰과 인생을 가로지르는 삶의 기술을『탈무드』로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인생의 순리를 따르면서도 가난을 싫어하고, 무엇보다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는 그들의 인생철학이 잘 담겨 있다. 특히 공동체 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돕는 자선과 구제를 당연한 의무이자 자신이 복을 받는 비결로 받아들였다"  (p.254 '나오며' 중에서)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 재앙 속에서 암울한 시간을 보냈던 지난 2년여의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소프트파워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방역 모범국으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다. 그와 같은 성과로 인해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는 한껏 높아진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 뉴스에 대한 언론 신뢰도가 46개 국가 중 40위 등 부끄러운 기록들도 함께 갖고 있다. 이는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갈라놓기에 바쁜)고 극단적 갈등을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들의 농간 때문이다. 유대인의 성공은 자선과 구제를 통한 강한 결속과 공동체 의식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정치인들에 의한 분열과 퇴보만 남았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가뜩이나 세계 경제가 어렵다. 통합과 협치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분열과 증오를 획책하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법대로 하자는 말은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말이지 이쯤에서 멈추고 서로 화해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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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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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확실한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다수가 동물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이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찬사를 받고,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는 데는 '조지 오웰'이라는 저자의 명성 하나만으로는 부족했으리라. 그보다는 오히려 권력과 인간 속성에 대한 저자의 철저한 탐구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감탄과 공감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을 터이다. 권력지향적인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국가 제도가 지속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나는 사실 조지 오웰의 소설보다는 르포 작품에 더 매력을 느끼는 독자 중 한 사람이다. 현장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그의 탁월한 작품들은 화려한 문체와 더불어 날카로운 문제의식, 그리고 체험과 검증에서 비롯된 현실 감각 등은 독자로 하여금 르포란 이런 것이다 하는 자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르포에 비해 그의 소설 작품들이 격이 떨어진다거나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관적인 느낌상 그의 르포 작품이 더 좋다고 말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같은 탁월한 르포 작품이 있었기에 <동물농장>과 같은 완성체의 소설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동무들이여, 절대로 이런 결심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에도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과 동물들이 서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번영이 곧 동물들의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에 절대로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생물의 이익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물들은 모두 일치단결하여 철저한 동지애를 가지고 인간과 투쟁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적이고,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들입니다."  (p.33)

 

소설은 매너 농장의 주인인 존스 씨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동물들은 결국 주인인 존스 씨를 몰아내고 동물들의 세상인 동물농장을 만든다. 여기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지도자의 지나친 음주는 항상 문제가 된다. 그래서인지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은 애주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과 함께 술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대통령이 술에 취해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면 대통령의 궐위 상태와 진배없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현재의 대통령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술에 취해 꾸알라가 된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켰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휴전 상태에 있는 국가의 대통령이...

 

"매너 농장의 존스 씨는 밤이 깊어지자 닭장 열쇠를 채우기는 했는데,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문을 닫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둥그런 등불 빛을 앞세우고 비틀거리면서 뜰을 가로질러 가서는, 뒷문에다 장화를 휙 차 버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술통에서 맥주 한 잔을 따라 마지막으로 들이켜고 난 후에야, 한참 코를 골며 곯아떨어져 있는 존스 부인 옆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p.25)

 

주인인 존스 씨를 몰아낸 동물들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동물들인 나폴레옹(돼지), 스노우볼(돼지), 스퀼러(돼지)의 지도 아래 동물농장의 7계명을 만들고 모든 동물들을 평등하게 살게 하는 데 뜻을 모은다. 그러나 각종 사건들로 인해 동물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하고, 결국 나폴레옹(돼지)이 무력으로 동물농장을 지배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을 독재와 공포정치로 통솔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동물들 사회에서도 계급과 서열이 생겨나고, 급기야 나폴레옹은 인간처럼 2발로 걸어다니며 채찍을 휘두르기에 이른다.

 

"그리고『동물농장』에서 오웰은, 다음번의 선거가 빠짐없이 다가오듯이 늘 새롭게 나타나기 마련인 정치적인 폭력과 그에 대한 공포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p.19 '러셀 베이커(Russell Baker)의 서문' 중에서)

 

유행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정치적 유형도 되풀이되는 듯 보인다. 군부 독재가 사라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독재 시대에 대한 향수가 불꽃처럼 타올랐고, 급기야 검찰 권력에 의한 독재가 시작된 느낌이다. 과거의 교훈을 쉽게 망각하는 인간의 철없음, 혹은 타인의 감언이설에 쉽게 현혹되는 대중의 얕은 지조에 의해 역사는 비슷한 과오를 끝없이 양산한다. 대중은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는 존스 씨를 자신의 지도자로 선출하고야 만다. 오늘도 그리고 어쩌면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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