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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그린 사람 -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평점 :
은유 작가의 팬이 된 독자들 대부분은 출판사의 대대적인 광고나 어떤 이벤트를 통하지 않고, 블로그와 같은 개인 SNS에서 작가에 대한 호평 일색의 글을 읽고 궁금증 해소 차원에서 은유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은유 작가에 대한 유명세(?)는 입소문을 통한 조용한 광고 덕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을 직접적으로 증명한 작가라고나 할까. 암튼 게으른 독서가인 나 역시 이웃 블로그에서 읽었던 은유 작가의 매력에 이끌려 지금껏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책을 사랑하는 열혈 독서가들에게 은유 작가는 이미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지 않았을까. 사족이지만 내가 읽었던 은유 작가의 첫 작품은 <글쓰기의 최전선>이었다.
"이야기는 힘이 세서 견고한 관념을 부순다. 내가 듣는 이야기는 감각과 정신의 속성을 천천히 바꾼다.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인터뷰를 꼭 과제로 내어주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해진 시간에 집중해서 듣는 일보다 더 좋은 글쓰기 공부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보다 더 깊은 쾌락을 나는 모른다. 지배는 단절과 분열의 문화 속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결'은 억압을 벗어나고 해방에 이르는 시작이자 원리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크게 그린 사람> 역시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이다. 책에 등장하는 18명의 인터뷰이 역시 독자들에게 '연결'하고픈 은유 작가의 선택임을 생각할 때, 그들 각자의 인생관이나 신념 혹은 추구하는 세계관이 은유 작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감지하고 있을 터,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썼던 중국 작가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떠올렸던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연결이었지 싶다.
1부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에서는 평범한 길을 마다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묶었다. 사범대를 다니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이기지 않고' 교사가 되었음은 물론 지금은 인권기록활동가로 살고 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아픈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조기현은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투쟁을 시작했으며, 경찰 신분으로 자신이 겪은 '민생을 기록하는 원도, 평생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자연인 씨돌 김용현, 직업의 틀을 벗어던진 채 아나운서의 외연을 확장한 임현주, 자식을 잃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변인이 된 김용균의 엄마 김미숙이 그들이다.
2부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에서는 코로나 시국에 직접 관객을 찾아 나선 시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소설가 김중미,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장, 소설가 김혜진, 지구인컴퍼니 대표 민금채, 신영대 한양대 의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3부 '사는 일 자체로 누군가의 해방을 돕는 사람'에서는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37년간의 복직투쟁을 이어 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기 위해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수신지, 한국성폭력상담소장 김혜정, 비선출직 정치인 박선민, 청년 노동자 고 김태규의 누나 김도현, 소수자의 일상을 시로 그려 내는 시인 김현이 그들이다.
"인터뷰는 짧은 연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찾아온 느낌들, 생각들, 마음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마치 재물을 지키듯이 지켜내고 사는 사람들은 조용히 빛난다. 내가 만난 인터뷰이들은 그걸 삶으로 가만가만 해내는 분들이었고, 그들 앞에서 나는 자주 뜨거워졌다." (p.300 '에필로그' 중에서)
찰랑이는 감정의 기복들이 마냥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한결같고 변수가 없는 이성의 결함으로만 이루어졌더라면 괜한 갈등이나 불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쏟아야 하는 쓸데없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고, 표리부동의 일관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은 어찌하여 자신의 모습을 본뜬 모형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서 정신이나 영혼만큼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원망이 나도 모르게 자라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완전성으로 인해 이 세상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모험과 가변성으로 가득 차고, 너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결합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협력과 연결의 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수많은 감정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예측불가의 다채로운 조화로 인해 각자의 삶에 재미를 더할 수 있다. 그곳에 너와 나의 다름이 있다. 인터뷰집을 읽는다는 건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아가 다름의 위대함을 깨닫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