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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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직장 후배와 함께 같은 차를 타고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주말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농사일을 거드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지라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그에게도 겁나고 두려운 게 있었던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자신은 귀신이 무섭다는 고백을 해왔을 때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잠을 자는 데 규칙적으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후 밤새 한잠도 못 잔 적도 있었다며 나이가 들어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고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절대 못하겠는데?" 하고 내가 묻자 그는 "에이, 절대 못해요."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신이나 유령을 실제로 목격하거나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이 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그들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까닭에 이런 초자연적인 대상이나 현상에 더욱 집착하고 관심을 갖게 되며 진위를 궁금해한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거나 깊은 산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갑작스러운 대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등골이 오싹해지거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불쾌한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변조되거나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기자 출신의 프랑스 최고 추리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였던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을 배경으로 인간 심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사랑과 질투를 텍스트의 서사로 엮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이라는 크고 어둡고 일반인이 모르는 비밀 공간이 산재할 것 같은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긴장감.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에릭과 라울 간의 질투.

 

"나는 이제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에릭 자신이 매우 바뀌었으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을 받게 된 날부터(이 말은 곧바로 나를 소름끼칠 정도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이 되었다고 매우 엄숙하게 선언했지만, 그 괴물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에릭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용모가 그를 인간의 세상에서 추방시켰다. 에릭이 자신의 추악한 외모 때문에 인간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p.431)

 

천재적인 음악성과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지닌 에릭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잘 알려진 극장 내의 숨은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에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크리스틴 다에는 극장가의 주목을 받는 스타로 성장한다. 그러나 흉측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에릭은 줄곧 극장의 지하에서 생활하며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공연을 본 라울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불타는 사랑을 늒게 되는데...

 

"만일 그녀의 목소리가 사랑의 날개를 타고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며, 크리스틴은 오프터딩겐이라는 전설 속의 시인처럼 악마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p.44)

 

극적인 만남으로 라울과의 사랑을 키워가던 크리스틴은 공연 직후 에릭의 눈을 피해 라울과 함께 달아나자는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크리스틴을 찾아 헤매던 라울은 페르시아인의 도움을 받아 에릭을 찾게 되고...

 

"이보게, 다로가, 잘 들어 보게. 내가 그녀 발밑에 엎드리고 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네. '가엾고 불쌍한 에릭!'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았어. 그때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한 마리 불쌍한 개에 지나지 않았어. 다로가, 그건 사실이야."  (p.526)

 

에릭은 자신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기는 크리스틴의 눈물에 감화되어 크리스틴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포기한 채 그녀가 라울과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어쩌면 에릭은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 낸 가장 흉측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성이야 어떠하든, 얼굴이나 겉모습이 어떠하든 능력과 재능만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되는 현대판 에릭의 모습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에릭의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크리스틴의 눈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오페라의 유령을 읽거나 오페라로 감상할 때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작품 '피에타'를 떠올리게 되는 건 아마도 나만의 습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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