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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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에는 언제나 그리움과 회한이 존재하지만, 현재의 내가 있기 위해서는 아스라한 기억의 잿더미 속에 산재하는 수많은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나를 일으켜 세웠던 용기의 순간들 또한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건 시간을 들쳐업고 나만의 외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슴아슴 멀어져 가는 용기의 순간들을 들먹인다는 건 우리가 습관처럼 되뇌는 '언젠가'에 숨겨진 일상성의 회복과 그 옅은 희망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다짐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행복한 순간에도 '언젠가 다시 하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멋진 풍광을 보면서도 '언젠가 꼭 다시 오자'라는 다짐을 구호처럼 내뱉기도 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도 '반드시 극복하여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서로의 가슴에 꼭꼭 눌러 새기듯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 습관에 포함된 '언젠가'에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몸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 가장 오랜 기억까지 되짚어봐도 나는 언제나 삼무호 안에 있었다. 할망들이 배경처럼 깔린 지구를 가리키며 파란 게 바다라고 말해줘도, 바다가 나오는 영상을 보아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이 구형으로 둥둥 떠다니거나 용기 안에 있지 않고 넓고 깊이 웅덩이져 있다니, 물이 밀려와서 발을 간질이고 사라진다니, 그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p.22 '루나' 중에서)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서윤빈 작가의 '루나'는 과거의 기억을 미래에 접목시킨 독특한 작품이다. 단편소설에서 무학적 완성도를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으나, 제주 해녀들이 바다가 아닌 우주공간에서 '물질'을 한다는 상상력은 쉽게 연결지을 수 없는 기발한 착상임에 틀림없다. '삼무호'라는 우주기지를 근거지로 모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제주 해녀들이 바다 대신 위성 사이를 유영하면서 광물을 캔다는 착상. 소설의 주인공인 '루나'는 할머니 해녀들과 또래의 어린 해녀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신이 구출한 우주 조난자 '켈빈'으로 인해 거대한 삶의 변화에 직면한다.

 

"켈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동기들은 입을 모아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만약 지구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돌아올 방법이 있을 테니, 한번 가봐서 나쁠 게 뭐가 있겠냐는 이유였다. 켈빈은 한술 더 떠서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서약서까지 써주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정말 돌아올 수 있는지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망설이는 건 스스로 뭘 원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p.43 '루나' 중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몹시 궁금해하던 차에 켈빈이 나타났고, 자신과 함께 지구에 가자고 루나를 부추겼던 것이다. 삼무호에 남을 거이냐, 아니면 켈빈과 함께 지구에 갈 것이냐 결정을 하지 못하던 루나에게 해녀 중급 시험일이 다가왔다. 친구인 ;이오'와 함께 50m 명줄을 달고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환영을 보게 되고 결국 '이오'는 환영에 이끌려 실종되고 만다. '삼무호'로 돌아온 루나와 우주 속으로 사라진 이오. 그리고 내일 지구를 향해 떠나게 되는 켈빈.

 

과거의 기억은 이따금 우리를 달무리처럼 유혹하기도 하고, 깊은 좌절의 순간을 딛고 일어섰던 용기의 발원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런 까닭에 과거는 미처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 손잡기도 하고, 선택에 놓인 현재의 우리를 흔들기도 한다. 서윤빈 작가의 단편소설 '루나'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바로 그 지점이다. 과거(제주 해녀의 물질)의 기억이 미래(우주공간에서의 물질)와 맞닿아 있고, 바로 그 경계에 흔들리는 현재(선택을 하지 못하는 루나)가 존재한다는 구성.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언제나 삶이 내미는 시험지를 앞에 둔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거기에 루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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