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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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팽팽한 압력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수분의 압력이 되는 것처럼 커다란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의 압력이 된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이 큰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그리움 등은 오롯이 감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차라리 질병에 가깝다. 밖으로 분출되거나 스스로 용해되지 않은 감정은 자신의 몸 곳곳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이는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몸에 오롯이 받아 한 줄 시를 통해 분출한다. 한 시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한 줄 '시(詩)'로 읊지 못한다면 이 서러운 세상을 어찌 건널 수 있으랴. 나는 이따금 시에서 분출하는 시인의 슬픔을, 분노를, 차마 담지 못한 그리움을, 웃음기마저 지워버린 기쁨을 시인을 대신하여 갈무리한다. 이렇게 나누는 감정의 품앗이가 없었다면 뉜들 세상살이가 그저 쉽기만 할까.


감기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발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을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읽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폐부를 찌르는 시인의 감정이 때로는 나의 심장을 겨누기도 하고, 노을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줄곧 빈 허공을 맴돌기도 하였다. 김 시인에게 '시란 불행을 더 불행답게, 슬픔을 더 슬픔답게, 파괴를 더 파괴답게 하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따금 등장하는 젊은 여자와 늙은(혹은 나이 든) 여자가 사는 이곳은, 발가벗고, 때리고, 엉키고, 뒹굴던 메아리나라.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라고 했던 당신의 고백.


시를 읽는다는 건 허공에 걸린 자신의 조각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일이다. 차갑게 식은 그 몸뚱어리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칠 리는 없지만 한나절 그렇게 난자하다 보면 어느새 내 눈물이 붉은 피로 변해 흐르고, 내 이웃이 흘린 눈물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시간들이 뜨거운 숨결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구 한 자 한 자를 되짚으며 깨닫게 된다.


태풍 송다가 비껴가는 일요일 오후. 옷이 비에 젖어 후줄근할지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손에 잡았던 김혜순 시인의 시집. 장마철인데 나는 마치 황폐한 사막에 다다른 듯 모래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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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세계 - 뇌과학자가 전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의 경이로움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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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 대한 찬사와 유용성에 대한 글은 꽤나 많이 읽었던 듯하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비롯하여 <느리게 걷는 즐거움>, 리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인문학>, 아널드 홀테인이 쓴 <어느 인문학자의 걷기 예찬>,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길 위에서> 등 걷기와 관련된 책의 대부분을 읽어보았다. 그것은 단지 '읽어보았'을 뿐 집중하여 읽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내용에 공감하며 깊이 빠져들었던 책은 많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사실 걷기와 연관되는 책이라면 일단 구매하거나 대여하는 습관이 있다. 읽고 읽지 않고는 차후의 문제이다. 그런 까닭에 표지만 한 번 넘겨보고 곧장 헌책방으로 팔려나간 책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런 집착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나로서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걷기의 기원과 어떻게 두뇌와 신체가 기계적이고 마술 같은 걷기를 실행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걷기가 가져온 사고의 자유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포볼 골프와 시골길 산책 또는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행진 등 많은 형태의 걷기에 대해 알아본다. 이 과정에서 걷기의 배울점과 개인과 사회가 걷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로운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p.8 '들어가며' 중에서)


그러나 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성격은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것과는 다소 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내가 읽어 온 책들은 문학적 색채가 짙은 반면 걷기의 기원과 같은 과학적 접근이 필요한 부분은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전에도 물론 이과적 접근 방식이 필요한 이와 같은 종류의 책을 전혀 접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런 책들은 대개 책의 제목마저 함께 기억에서 지워지곤 했다.


"땅 위에서든 해저에서든 걷기는 척수 신경 세포들의 제어 하에 리드미컬한 패턴으로 근육들이 순서대로 교차하며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일련의 동작들이다. 포유류에게 걷기란 신근과 굴근의 조합을 통해 팔다리를 이완하고 수축하는 과정이다."  (p.48)


그렇다고 이 책의 구성 전체가 그와 같이 딱딱하고 난해한 설명이나 과학적 이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 걷기, 왜 좋은가 2. 걷기의 기원 3. 걷기의 메커니즘 4. 뇌 안의 GPS 5. 도시를 걷다 6. 몸과 뇌를 위한 치유 7. 창의적 걷기 8. 사회적 걷기'의 목차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걷기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함께 걷기의 인문학적 이로움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걷기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접근 방식을 모두 아우르는, 걷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고도로 숙련된 전문 워커Walkers들이다. 걷기는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수단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걷기는 다른 두 가지 정신의 상태를 오가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마음을 비우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집중해야 할 특별한 생각이 없는 상태로 걸을 때 기억과 의미를 처리하는 뇌 영역 전반에 거쳐 독특하면서도 창의적인 연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p.209~p.210)


뇌과학자이자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서 깊은 더블린트리니티대학의 교수인 셰인 오마라가 들려주는 <걷기의 세계>. 이 책에서 저자는 걷기의 인문학·사회학·과학에 대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며 현대인이 간과하고 있었던 '걷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걸을 수 있지만 생각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남극과 북극만큼이나 멀고 멀어서 걷기의 장점과 신체에 미치는 이로움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다만 생각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뇌과학자 오마라가 들려주는 <걷기의 세계>와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함께 읽는다면 내일 아침 당장 집 주변 등산로에 선 당신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뻐꾸기 울음소리에 발을 맞춰 걷고 있는 당신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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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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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나 자기계발서보다 소설을 좋아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책을 읽는 재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위에 서는 이유는 내가 삶에서 배워야 하는 여러 가르침들 중에서 소설은 단 한 가지만 제시한다는 점이다. 머리가 나쁜 나로서는 한 번에 여러 가르침을 설명도 없이 제시하였을 때,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할뿐더러 여러 가르침들 중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철학이나 자기계발서를 소설처럼 후루룩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시간낭비일 뿐 유익한 독서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그동안의 독서 경험에서 얻은 나의 판단이었다. 예컨대 열 개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철학책이라면 열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하더라도 그 속뜻을 완전히 깨우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철학이나 인문서는 소설처럼 실제적인 설명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의 가르침이 철학처럼 명확하지 않을 때가 더러 있긴 하지만...


"인간은 애초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키스를 했어도 잠자리를 함께했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이라는 유별난 생물이 된 이래로, 전달될 게 전달되지 않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말은 머릿속에서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터무니없는 것을 상상하게 하고, 엉뚱한 해석을 하게 한다."  (P.244)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을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사람은 결국 죽음과 허무에 이끌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느낌은 전적으로 나만의 주관적인 견해이거나 소설 전체를 흐르는 분위기나 주제에도 부합하지 않는 지나친 편견일 수도 있다. 게다가 소설의 전반적인 서사나 작가의 의도 역시 나와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이미 없어진 슈퍼마켓을 그리워하며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조용한 공간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노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연약한 게 흡사 환상처럼 보였다."  (P.146)


소설은 주인공인 오카다 씨가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십오 년 넘게 살았던 집에서 맨몸으로 쫓겨나게 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40대 후반의 남성, 출판사에 다니고 스무 살 넘은 아들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다. 아내와 합의를 본 기한은 두 달.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지만 오카다 씨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가지, 근처에 자연림이 남아 있는 공원이 있을 것과 인테리어 공사를 새로 할 수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일 것. 부동산을 열 군데 이상 돈 끝에 결국 포기하려는 순간 지인의 소개로 두 조건을 만족하는 집을 구하게 된다. 집주인인 소노다 씨는 미국에 사는 아들 부부가 불러서 이주를 하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기도 하고 집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세를 주겠다는 생각으로 부동산에 내놓지 않았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이사를 하고 오카다 씨는 집과 직장을 오가며 낡은 집을 수리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소노다 씨가 두고 간 고양이 후미를 돌보며 낡은 집을 수리하는 데 무료한 시간을 쓰고 있는 오카다 씨. 그러다 우연히 들른 집 근처의 어느 식당에서 열세 살이나 어린 옛 애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아내와의 결혼을 이어가던 시절에 5년 동안이나 만났던 그녀의 이름은 가나. 말하자면 내연녀였던 가나 씨는 미래가 없는 오카다 씨와 헤어져 연락을 하지 않던 사이였다. 몸이 아픈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가나 씨의 집은 오카다 씨의 집과 아주 가까웠다.


"하늘이 높다. 트레이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여 오븐에 넣어지기를 기다리는 버터롤처럼 조개구름이 떠 있다. 공기도 건조하고 얼굴에 닿는 바람도 시원하다. 요 근래 좋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전거를 달리다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P.144)


다시 만난 두 사람이 결국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발전하는 뻔한 로맨스 소설을 연상하겠지만 소설의 결말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2년을 약정하고 떠났던 소노다 씨가 귀국하고, 그렇게 공을 들였던 오카다 씨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워주게 된다. 그리고 근처에 매물로 나온 땅을 계약하고 미래에 자신이 들어가 살 집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는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로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작가는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서 시종일관 기름기를 싹 걷어낸 건조한 문체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읽는 이들은 이러한 문체로 인해 삶의 허무에 쉽게 젖어들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육체를 맹목적으로 가꾸는 것처럼 영원하지 않은 어떤 대상(예컨대 집과 같은)을 가꾸는 데 필요 이상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남들로부터 '우아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들 그게 과연 우리가 지불한 돈과 시간에 대한 적정한 보답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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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모키타자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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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순간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조각처럼 살짝 실금이 간 채로 봉합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일상의 불안정성이나 가변성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의 일상만큼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지면 질수록 깨어졌을 때의 배신감이나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크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 자신이 믿던 신의 은총마저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온하게 보냈던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에 가까운 현실이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 닥칠 어떠한 미래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조금 더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소한 실수라도 내 안에 남은 앙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틀림없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배워 가고 있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의 본능에 관련된 것이라서 더욱 많은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기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것이 반드시 다른 형태로 튀어나오고 만다. 성실하게, 무던하게, 개성이나 사념을 떨치고 정성을 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p.53)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일상이 한순간에 깨진 두 모녀의 회복 과정을 아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밴드 멤버로 활약하던 아빠가 아무도 모르게 사귀었던 내연녀에게 살해당하고(겉으론 동반자살) 덩그러니 남겨진 두 모녀. 소설의 주인공인 요시에와 엄마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아빠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모녀의 일상을 따라 복잡하게 얽히는 이 이야기는 일상이 무너진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시간이 흘러간다. 지금은 지금이다. 악몽에 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생리적으로 그냥 지고 만다. 진 채로, 무심히 보는 풍경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만큼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p.134)

"이 동네로 옮겨 온 후로 나는 점점 솔직해지고 현실에도 차츰 발붙여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된다. 처음에는 구경 온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발자국이 하나둘 대지에 새겨지는 것을, 그 축적을 느낀다. 날마다 걸으면서 내 발자국이 이 땅에 거푸 남고, 내 안에서도 동네가 생겨난다. 양쪽이 똑같이 성장해서, 내가 죽은 후에도 기척은 남는다. 그런 사랑의 양식을 처음 배웠다."  (p.168)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요시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메구로의 집을 떠나 독립한다.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레리앙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빠를 잃은 상실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요시에. 메구로의 옛집에 혼자 남았던 엄마는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요시에의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한다. 그렇게 두 모녀는 시모키타자와에서 다시 합치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자라 평생 일이라곤 해보지 않았던 엄마 역시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통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나와 엄마가 이 동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오늘도 이곳에 살면서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거리란, 그런 거다. 몇 년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의 삶이 이 거리를 숨쉬듯 들고 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들고 나면서 거리는 만들어진다. 후지코 씨의 말대로다. 언뜻 보면 뒤죽박죽 혼란스럽고 추하지만, 어느 틈엔가 멋진 무늬를 그리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p.284)


어쩌면 요시에와 엄마는 아빠의 흔적이나 체취가 남아 있는 메구로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롭게 인연을 맺고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옛 기억을 조금씩 떨쳐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모키타자와에서 요시에는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아빠에에 대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고, 세상을 떠난 아빠를 위로하는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되지만 요시에와 엄마를 다시 일으켰던 건 시모키타자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소통하면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삶의 실재를 조금씩 체감하는 것이다. 엄마도 그저 착실한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그들과의 부대낌에서 비롯되었다.


요시에와 엄마가 메구로의 집에 있는 짐을 챙기러 갔다가 너무 쓸쓸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있다. 간판만 보아도 안심이 된다던 그곳. 바로 카레집이다. 야채카레 한 접시에 위로를 받는 모녀. 우리는 이렇듯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이웃이 건네는 무덤덤한 아침 인사로 인해 큰 용기를 얻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어떤 일로 인하여 평온하던 일상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따뜻한 이웃이 아닐까 싶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그 가벼운 진리를 다시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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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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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산에 올랐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아파트를 막 벗어날 때의 하늘은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설마' 했던 안일함이 그와 같은 낭패를 자초한 셈이었습니다. 산길을 걸을 때는 등산로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이 적당히 비를 막아주는 바람에 비로 인한 불편은 크게 느끼지 못하였지만 산을 벗어나는 순간 빗줄기의 공세를 고스란히 맞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한 고초를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당혹스러운 순간에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적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산에서 비를 만났을 때 비가 그칠 때까지 하릴없이 기다리거나 옷이 모두 젖을지라도 굴하지 않고 오롯이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해 걸어가는 방법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비가 그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고려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아닙니다. 차라리 도로를 걷는 생면부지의 행인에게 돌진하여 제 사정을 설명하고 우산을 같이 쓸 수 있도록 선처를 구하는 게 더 적당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승려의 삶은 저도 모르게 여러모로 죽음을 대비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숲속 승려로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늘 죽음을 접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언젠가 끝난다는 현실을 날마다 마주했습니다. 대오大悟의 순간 없이도 육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그곳에서의 삶이 흐를수록 제 안에 점점 깊이 새겨졌습니다."  (p.261)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는 동안 내가 산에서 만났던 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생각지도 못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제 스스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거나 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사태를 더 악화시키기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게 어쩌면 큰 상처 없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동시에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처럼 '직장'이라는 굴레만 아니라면 비가 걷힐 때까지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뭇잎에 듣는 낙수 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기다려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마주쳤던 곤경의 순간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하고 저항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무심히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질책하고 무기력했노라 나무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없이 그렇게 무작정 견뎌야 했던 자신의 마음 역시 타들어가는 양초의 길이처럼 조바심에 가슴을 태우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자신을 나무라거나 자책할 것이 아니라 '잘 견뎠어' 칭찬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매우 적거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다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요. 우리는 걸핏하면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계획한 방식대로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p.134)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거나 가볍게 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2022년 1월에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저자 역시 자신의 삶을 가볍게 살지 않았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었던 저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태국 밀림의 숲속 사원에 귀의해 '나티코' 즉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을 받고 17년간 수행했다고 합니다. 마흔여섯의 나이에 환속하여 고국인 스웨덴으로 돌아간 저자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전하며 살았으나 201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2022년 1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그랬듯 여전히 제가 죽는 순간 가장 먼저 안도감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가여운 몸은 드디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다정한 몸이여, 싸워주어 고맙소. 싸움은 드디어 끝났습니다. 그다음에는 분명히 경이를 느끼게 되겠지요. 지난 30년간 저는 이 순간과 그다음에 따를 일들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런데도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가세요. 영원히 남을 것은 우리의 업이지요. 세상을 살아가기에도, 떠나기에도 좋은 업보만을 남기길 바랍니다."  (p.306~p.307 '에필로그' 중에서)


남보다 오래 살았거나 지금껏 수도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삶은 지극히 무겁거나 깃털처럼 한없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타인의 삶을 너무 의식하는 탓에 자신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보듬고 살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밖으로만 향하는 까닭에 자신의 삶이 변해가는 모습을 모른 채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날 자신의 외모에 비해 무척이나 어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의 성숙을 다음 생으로 미룬 채 게으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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