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시모키타자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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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순간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조각처럼 살짝 실금이 간 채로 봉합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일상의 불안정성이나 가변성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의 일상만큼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지면 질수록 깨어졌을 때의 배신감이나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크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 자신이 믿던 신의 은총마저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온하게 보냈던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에 가까운 현실이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 닥칠 어떠한 미래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조금 더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소한 실수라도 내 안에 남은 앙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틀림없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배워 가고 있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의 본능에 관련된 것이라서 더욱 많은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기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것이 반드시 다른 형태로 튀어나오고 만다. 성실하게, 무던하게, 개성이나 사념을 떨치고 정성을 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p.53)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일상이 한순간에 깨진 두 모녀의 회복 과정을 아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밴드 멤버로 활약하던 아빠가 아무도 모르게 사귀었던 내연녀에게 살해당하고(겉으론 동반자살) 덩그러니 남겨진 두 모녀. 소설의 주인공인 요시에와 엄마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아빠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모녀의 일상을 따라 복잡하게 얽히는 이 이야기는 일상이 무너진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시간이 흘러간다. 지금은 지금이다. 악몽에 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생리적으로 그냥 지고 만다. 진 채로, 무심히 보는 풍경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만큼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p.134)

"이 동네로 옮겨 온 후로 나는 점점 솔직해지고 현실에도 차츰 발붙여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된다. 처음에는 구경 온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발자국이 하나둘 대지에 새겨지는 것을, 그 축적을 느낀다. 날마다 걸으면서 내 발자국이 이 땅에 거푸 남고, 내 안에서도 동네가 생겨난다. 양쪽이 똑같이 성장해서, 내가 죽은 후에도 기척은 남는다. 그런 사랑의 양식을 처음 배웠다."  (p.168)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요시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메구로의 집을 떠나 독립한다.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레리앙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빠를 잃은 상실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요시에. 메구로의 옛집에 혼자 남았던 엄마는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요시에의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한다. 그렇게 두 모녀는 시모키타자와에서 다시 합치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자라 평생 일이라곤 해보지 않았던 엄마 역시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통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나와 엄마가 이 동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오늘도 이곳에 살면서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거리란, 그런 거다. 몇 년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의 삶이 이 거리를 숨쉬듯 들고 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들고 나면서 거리는 만들어진다. 후지코 씨의 말대로다. 언뜻 보면 뒤죽박죽 혼란스럽고 추하지만, 어느 틈엔가 멋진 무늬를 그리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p.284)


어쩌면 요시에와 엄마는 아빠의 흔적이나 체취가 남아 있는 메구로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롭게 인연을 맺고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옛 기억을 조금씩 떨쳐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모키타자와에서 요시에는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아빠에에 대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고, 세상을 떠난 아빠를 위로하는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되지만 요시에와 엄마를 다시 일으켰던 건 시모키타자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소통하면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삶의 실재를 조금씩 체감하는 것이다. 엄마도 그저 착실한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그들과의 부대낌에서 비롯되었다.


요시에와 엄마가 메구로의 집에 있는 짐을 챙기러 갔다가 너무 쓸쓸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있다. 간판만 보아도 안심이 된다던 그곳. 바로 카레집이다. 야채카레 한 접시에 위로를 받는 모녀. 우리는 이렇듯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이웃이 건네는 무덤덤한 아침 인사로 인해 큰 용기를 얻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어떤 일로 인하여 평온하던 일상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따뜻한 이웃이 아닐까 싶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그 가벼운 진리를 다시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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