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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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산에 올랐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아파트를 막 벗어날 때의 하늘은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설마' 했던 안일함이 그와 같은 낭패를 자초한 셈이었습니다. 산길을 걸을 때는 등산로 주변의 키 큰 나무들이 적당히 비를 막아주는 바람에 비로 인한 불편은 크게 느끼지 못하였지만 산을 벗어나는 순간 빗줄기의 공세를 고스란히 맞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한 고초를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당혹스러운 순간에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적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산에서 비를 만났을 때 비가 그칠 때까지 하릴없이 기다리거나 옷이 모두 젖을지라도 굴하지 않고 오롯이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해 걸어가는 방법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비가 그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고려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아닙니다. 차라리 도로를 걷는 생면부지의 행인에게 돌진하여 제 사정을 설명하고 우산을 같이 쓸 수 있도록 선처를 구하는 게 더 적당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승려의 삶은 저도 모르게 여러모로 죽음을 대비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숲속 승려로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늘 죽음을 접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언젠가 끝난다는 현실을 날마다 마주했습니다. 대오大悟의 순간 없이도 육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그곳에서의 삶이 흐를수록 제 안에 점점 깊이 새겨졌습니다."  (p.261)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는 동안 내가 산에서 만났던 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생각지도 못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제 스스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거나 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사태를 더 악화시키기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게 어쩌면 큰 상처 없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동시에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처럼 '직장'이라는 굴레만 아니라면 비가 걷힐 때까지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뭇잎에 듣는 낙수 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기다려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마주쳤던 곤경의 순간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하고 저항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무심히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질책하고 무기력했노라 나무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없이 그렇게 무작정 견뎌야 했던 자신의 마음 역시 타들어가는 양초의 길이처럼 조바심에 가슴을 태우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자신을 나무라거나 자책할 것이 아니라 '잘 견뎠어' 칭찬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매우 적거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다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요. 우리는 걸핏하면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계획한 방식대로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p.134)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거나 가볍게 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2022년 1월에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저자 역시 자신의 삶을 가볍게 살지 않았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었던 저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태국 밀림의 숲속 사원에 귀의해 '나티코' 즉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을 받고 17년간 수행했다고 합니다. 마흔여섯의 나이에 환속하여 고국인 스웨덴으로 돌아간 저자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전하며 살았으나 201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2022년 1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그랬듯 여전히 제가 죽는 순간 가장 먼저 안도감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가여운 몸은 드디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다정한 몸이여, 싸워주어 고맙소. 싸움은 드디어 끝났습니다. 그다음에는 분명히 경이를 느끼게 되겠지요. 지난 30년간 저는 이 순간과 그다음에 따를 일들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런데도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가세요. 영원히 남을 것은 우리의 업이지요. 세상을 살아가기에도, 떠나기에도 좋은 업보만을 남기길 바랍니다."  (p.306~p.307 '에필로그' 중에서)


남보다 오래 살았거나 지금껏 수도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삶은 지극히 무겁거나 깃털처럼 한없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타인의 삶을 너무 의식하는 탓에 자신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보듬고 살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밖으로만 향하는 까닭에 자신의 삶이 변해가는 모습을 모른 채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날 자신의 외모에 비해 무척이나 어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의 성숙을 다음 생으로 미룬 채 게으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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