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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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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창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이는 요즘의 아이들이 내 얘기를 들으면 '그게 뭐 부끄러워 할 얘기예요.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 이야기 아닌가요?'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책에 빠져 살았던 학창 시절이 때로는 부끄럽게 여겨지니 말이다.

 

초등학교를 포함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어쩌면 대학 시절까지의 내 삶은 책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책이 전부였던 생활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어른들은 그런 나를 늘 대견해 했고, 자신의 아이들과 비교하며 부러워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시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 시시껄렁한 지식을 말할라치면 친구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 탓인지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졸업 이후에도 간혹) 줄곧 친구들의 고민 상담을 도맡아야 했었다.

 

무엇 하나 변변한 것 없이 가난하기만 했던 나였기에 누군가의 인정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책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할 때마다 괜스레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밥맛'이고 '왕재수'일 수도 있었던 나에게  보여준 친구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는 또래 집단에서의 내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때 약간의 오만과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기고만장했던 내가 독서의 '무용론(無用論)'에 대하여 '그럴지도......'하면서 수긍 아닌 수긍을 하게 된 계기는 강원도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 때문이었다.  스님은 내게 다짜고짜 정말 필요한 책이 아니면 독서를 자제하라고 권했다.  그 시간에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독서를 권하면 권했지 독서를 자제하라는 말은 여지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책을 고르는 데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세이집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며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사실 누구로부터의 독서 지도를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책을 살 돈도 없었으므로 눈에 띄는 책이면 가리지 않고 읽었었다.  이 책의 저자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이자 세계인이 예찬하는 ‘상상력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던 세계 명작 50권을 소개하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추천한 책마다 짤막한 독후감을 덧붙여 놓았는데,『어린 왕자』 『삼총사』 『서유기』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책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소책자를 쓸 때 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ㅆ섰습니다.  어느 초등학생 친구입니다.  그가 읽는다면 뜻이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실은 지금 그 소년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추천했거든요.  굉장한 집중력이 있는 아이인데,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제가 일하는 곳에 놀러 오곤 했습니다.   ---(중략)--- 그런 그 아이가 지금은 도서관의 책을 굉장한 기세로 닥치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건너뛰면서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내용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설픈 것을 추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건 승부의 세계입니다."    (p.133)

 

2010년 이와나미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즐겨 읽어온 소년문고 가운데 손수 50권을 골라 세 달에 걸쳐 다시 읽으며 차분히 정리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의 2부에서 자신의 독서 체험을 소개하며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느끼는 독서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심심할 틈이 없는 요즘의 세대에게도 책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쇠퇴했다 해도 여전히 인쇄물이 쏟아지고, 강요하는 듯한 텔레비전과 게임과 만화가 아이들 영혼을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명 같은 음악도 흘러넘칩니다.  이만큼만이라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하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겠지요.  아무리 그렇게 해도 허사일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156)

 

저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의 관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기술이나 문명의 발달은 육체적 편리 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악영향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 원천적으로 생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인간의 영혼보다는 육체적 편리를 중시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가까운 미래에 황무지와 같이 황폐화된 영혼의 소유자들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나의 아들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편이다.  그럴 때 나는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떠올라 피식 웃곤 한다.  그렇다고 아내나 나나 '이 책 읽어라.  저 책 읽어라.'하고 간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내는 가뜩이나 나쁜 아들의 시력을 염려하여 책을 읽는 것을 가끔씩 말리는 편이다.  요즘 아들은 아르센 뤼팽의 소설에 빠져 있다.  저자가 말했 듯이 독서의 경험을 통해 아들도 자신에게 중요한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p.14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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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고상미 그림, 봉현선 옮김 / 혜원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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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쪽으로부터 피어 오른 하얀 구름이 마치 길게 늘인 목화솜처럼, 혹은 골목마다 자욱이 내뿜고 달리던 연막 소독차의 부연 연기처럼 코발트빛 가을하늘을 휘감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다.  어학 연수 시절 퍼스의 퀸 파크에서 바라보던 하늘도 오늘과 비슷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어학 연수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대학 동기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어학 연수차 퍼스에 갈 거라고.  시드니 외곽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그 연락을 받자마자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때 통학용으로 구입한 1980년식 닛산 사파리를 타고 호주 남해안을 돌아 퍼스까지 갈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다소 엉뚱하고 미친 짓에 가까운 모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먼 거리를 차로 달린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호주 지리도 모르는 이방인이 낡은 중고 자동차를 타고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죽을 고생을 하여 나는 간신히 퍼스에 도착하였고, 친구와 함께 호주 서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 돌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천지신명의 도움이 컸다고 하겠다.  그 여행길에 가지고 갔던 휴대품 속에 짐짝처럼 실려 있던 책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물론 호주에서 구입한 원서였다.  나는 어쩌면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여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닉에게 했던 말처럼.

 

"그 후로 나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인도의 왕자 같은 생활을 했지요.  파리, 베니스, 로마 등지에서 말입니다.  주로 보석을 수집하고, 사냥도 즐기고, 가끔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그림은 아닙니다.  그저 혼자 심심풀이로 그린 것이니까요.  그렇게 지내면서 오래 된 슬픈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지요."    (p.118)

 

물론 나는 보석을 수집한 것도, 사냥을 즐긴 것도, 그렇다고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털털거리는 차가 제발 퍼스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데이지를 잊지 못하는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우정이 열렬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그저 먼 이국땅에서 나와 인연이 있는 자국민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마침내 친구를 만났고,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한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두 단계를 지나서 새로운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을 거쳐 이제는 데이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일을 머리 속으로 치밀하게 계획해 왔고,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인내력으로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감은 시계의 태엽처럼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p.165)

 

그랬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가 달려온 길을 친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친구를 만남으로써 그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비로소 서서히 풀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늘처럼 푸르렀던 퍼스의 하늘을 보며 친구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굳이 먼 타국으로의 어학 연수를 결심했던 이유를.  그것도 대학 기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중히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호주로 향하게 된 특별한 이유를.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만났던 한 여인의 사랑 고백에 무척 당황했었고, 빈털털이에 가까운 나의 집안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그 여인의 집안을 비교했었고,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실연의 고통을 두려워 했었다.  어쩌면 나는 결국은 손에 넣지 못할 동경하는 대상에게 내 욕심만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의심했었을 것이다.  마치 개츠비의 환상처럼 말이다.  그때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나에게 어떤 조언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도......

 

"5년만의 만남!  이 재회의 순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을 깨뜨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그 동안 너무나 간절했던 개츠비의 환상 때문이다.  환상이 그녀의 현실을 뛰어넘고, 또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과 집착으로 환상을 키워왔고, 그러면서 찬란한 깃털로 환상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아무리 지순한 순정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남자가 가슴 속에서 키워 온 환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p.173)

 

내가 도망치듯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그녀의 사랑 고백을 끝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내 자신에 대해 자책하며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더불어 약간의 후회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린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실감했었다.  나는 결국 그녀도 소설 속의 데이지처럼 '결국은 모두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서로 아웅다웅하며 경쟁을 하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만이 갖는 강한 생활력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언젠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갈 때면 그 두려움은 곧 나에 대한 원망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내린 결정에 일말의 위로를 한 셈이다.  나는 어쩌면 서른 살이 가까워 오는 그 시점에 소설 속의 주인공 닉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 - 그것은 독신 남자가 알아야 할 일을 적어 넣는 목록이 점차 줄어들고, 정열의 부피도 줄어들고,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들 고독한 10년을 예고하는 나이다.  하지만 내 곁에는 조던이 있었다.  그녀는 데이지와는 달리 총명해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일을 두고두고 곱씹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여자였다.  차가 어두운 다리 위로 들어서자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내 어깨 위로 천천히 기댔다."    (p.250)

 

'많은 남자들이 데이지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는 사실에서 보듯 어쩌면 개츠비는 누구나 원하는 어떤 대상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돈이 젊음과 신비를 지켜 주는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개츠비처럼 나 또한 돈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개츠비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가난한 청년의 고뇌와는 멀리 떨어져서 은처럼 빛나는 존재'가 데이지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던 것처럼 나는 한국에 두고온 그녀를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때 보았던 하늘처럼, 오늘 하늘은 하얀 구름에 휩싸인 채 먼 과거로 유영하고 있었고,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읽으며 퍼스에서 만난 친구를 생각하였다.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가면서도 계속 노를 저어 과거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빠르게, 때로는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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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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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이 생각날 즈음이면 가을은 벌써 생기를 잃고, 발랄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태평한 고독 속에서 늦가을의 소슬한 추위를 맞이하곤 했다.  쇠락해가는 녹음과 서서히 스러지는 한낮의 열기를 감안하면 인생의 여름은 마냥 더딘 것이지만 박경리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려낸 삶의 궤적은 마치 순간인 양 허망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박경리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어느 하숙생이 버리고 간 한 무더기의 책더미 속에는 시시껄렁한 무협지 몇 질과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때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신나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우리집에는 읽을 만한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없었던지라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의 겨울방학에 나는 이 책을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었다.  마치 처음으로 받았던 종합선물세트의 과자를 빼먹듯 말이다.

 

그러나 『김약국의 딸들』은 어린 내가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지 싶다.  소설 속에서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누군가에 의해 '짠'하고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바로 그것이었다.  미약하게나마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용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었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용빈'에 의해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손끝 야물고 성실한 용옥마저 아이와 함께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삶의 아득함을 넘어 공허감이 몰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균질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앞으로의 내 삶도 혹시,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성긴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빈은 용옥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용옥이 결혼한 후 더욱 광신적으로 기독교에 기울어지는 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메마른 얼굴, 빛을 잃은 눈동자, 용빈은 가엾은 동생을 위하여 남몰래 간혹 근심을 하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격심한 사건의 연속 속에 용옥의 존재는 그다지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용빈은 그것을 생각하니 더욱 감슴이 아팠다.  그야말로 용빈의 마음은 억만 군졸이 짓밟고 지나간 형상이었다."    (p.363)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김약국의 딸들』이 내게 던져준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나는 그때 소설 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운명'이라는 강력한 힘에 넋놓고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비록 삶을 관조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알 수 없는 삶의 굴레에 진저리를 쳤었다.  휑한 바람이 가슴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뭔가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청소년기의 어린 나이에 철학에 빠져든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갈 이유,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허무와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에 매달렸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된 아들과 통화를 한 후, 나는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운명' 앞에서 한없이 주눅들게 했던 그때의 작가는 이제 가고 없다.  잔인하리만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었던 박경리 작가.  '우리의 잔혹한 현대사는 한 작가를 키워내기 위해 그녀의 가슴에 모진 발자국을 차근차근 새겼고 그 멍자국 속에서 그녀는 문학이라는 푸른 생명의 나무를 키워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공지영 작가의 추모사가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노래했던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늦가을의 하루가 또 고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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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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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여전히 무성한 숲의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었지만, 간혹 하늘이 훤히 드러난 길에서는 한두 방울의 비가 얼굴을 스치곤 했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비해 빗방울의 감촉은 차지 않았다.  아침 세숫물이 서늘하게 느껴지던 늦가을 아침, 찬물에 가마솥의 끓는 물을 반 바가지쯤 섞어 놓았을 때의 느낌이 그랬을까?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조금 젖으면 어떠랴.'하는 태평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 리뷰를 쓰면서 '이것도 괜찮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마음에 가득했던 여운을 차마 글로 옮기지 못했던 책들, 돌이켜 보면 그런 책들이 한두 권일까마는 나는 기억에 남는 그런 책들을 다시 읽고 리뷰를 쓰기로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한껏 고무되는 느낌이었다.  장롱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옛 추억을 다시 꺼내는 듯한, 내가 선택한 책들이 나를 앞에 두고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을 조곤조곤 들려줄 것만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는 대학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처럼 열광적인 '하루키 신드롬'이 불기 이전부터 작가의 마니아층은 서서히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시절의 나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조금쯤(혹은 많이) 야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법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가 오히려 건전하게 보이게 했던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청춘 소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춘'이란 시기는 얼마나 짧고, 다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러나 나의 청춘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청춘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오롯이 산 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죽음의 순간을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던 까닭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살아있는 자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실의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청춘들에게 있어 그 아픔이나 시련은 딛고 넘어가야 하는 어떤 것일 뿐, 가슴에 오래 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주지시키고 있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나를 향해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던가.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5)

 

왜 와타나베는 죽은 나오코가 했던 부탁의 말에서 나오코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느끼게 된 걸까?  그랬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은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남겨진 삶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의 삶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청춘'이란 어쩌면 대비하지 못한 상실의 고통을 순간순간 겪으며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청춘의 시기에 '사랑은 언제든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었다.  그 방어기제는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과 윤리'라는 메마른 땅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 케이크가 안 먹고 싶어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구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 주지.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로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p.130)

 

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대화 장면이다.  사랑을 경험해 본 많은 청춘들이라면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을 듯싶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유치한 것이라고.  세상의 어떤 사랑도 이성적인 판단이 개입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유치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체면이나 규칙을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지식한 나의 이면에는 나를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나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킨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순진 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뒤흔들어 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 정말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p.327)

 

와타나베의 선배였던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기에게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라고.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지독한 에고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분리됨으로써 헤매지도,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때 나가사와의 연인이었던 하쓰미 씨는 헤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며 항변한다.  하쓰미 씨는 자신과 다른 유형이었던 나가사와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단단한 에고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자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작품 속의 나가사와와 비슷한 청춘이었던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413)

 

주인공 와타나베의 말이 옳다.  우리에게 찾아온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깨달음이 다음에 닥쳐오는 에기치 않은 슬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또 청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빛나는 청춘의 시기에 이성을 멀리함으로써, 또는 내가 세운 규칙을 가혹하리만치 철저히 지킴으로써 다른 청춘과 구별되는 '우월성'으로 나를 포장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맨몸으로 견뎌야 했던 청춘의 시절을 나는 우산을 쓴 채 메마른 사막을 건너온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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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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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아랫동서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오랜 암투병 끝에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철저히 개별적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죽음의 모습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살아 있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써 죽음을 미화하거나 철저히 도외시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던 김훈 작가의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살아 있는 자의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누구나 겪는 '상실의 아픔'도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지만 그 보평성과는 상관없이 각자가 혼자서 슬퍼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은 끝끝내 개별적이며, 흐르는 세월 속에서 홀연 보편성 속으로 스며들다가 결국 망각의 늪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상실의 시대>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렇다.  여름의 녹음 속에도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낮게 드리운 잿빛하늘을 배경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제부터 나는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읽었다.  3년쯤 전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읽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이 책을 읽으면 따뜻한 햇볕이 녹작지근하게 풀어지는 오후에 깊은 단잠에 빠져들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말이다.  650쪽에 가까운 작지 않은 책의 볼륨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는 평화 속에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느꼈었다.  그때 나는 '진리'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하여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느낌을 말로 풀어헤칠 자신이 없었고, 나는 결국 리뷰를 쓰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나는 다만 잊고 싶지 않은 책의 구절들을 천천히 메모하면서 나의 느낌을 적고자 한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매일같이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지만 이 세 사지만 알 수 있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인물로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설령 그 사람이 병자였건, 장애를 안고 있었건, 직업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또 인생 경험이 적은 아이 혹은 갓난아기라 하더라도 이 세 가지 질문의 답만 갖추면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럽게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한 가지라도 좋으니 답을 찾아내 가슴에 새긴다.  때로는 억지나 오해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원래 그런 억지나 오해들까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니, 이를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p.265~p.266)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현상으로서만 기억할 뿐 그가(또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살다 갔으며, 그로 인해 그의(또는 그녀의)삶은 우리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삶을 살아 있는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즈토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편협된 시각을 지적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언어와 물건으로 사체를 장식하고, 그로 인해 고인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려고 하거나 그 인생에 점수를 매기려 해.  인간이 사는 이유는 사랑도 꿈도 아니야.  세포의 힘이지.  원생동물과 같은 세포의 탐욕스러운 생명력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고.  인간이라는 종을 존속시키기 위해 발달한 뇌가 이른바 부작용을 일으켜 짚신벌레 같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하고, 사랑이나 일 때문에 사니, 신이나 부처님 같은 성스러운 존재 덕분에 사니, 하고 어리석은 핑계를 만들어낸 거지.  뉴스를 오 분만 보면 그런 변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어.  인간의 중심을 이루는 세포는 원하는 것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먼저 공격하는 쪽으로 작용해.  이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증명된 진리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망상으로 도망쳐.  그럴듯하게 생을 포장하고 죽음을 장식해.  아마 개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겠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것,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원생동물의 죽음과 똑같은 것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지."    (p.351~p.352)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사쿠야의 말이다.  소설에서 사쿠야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인 나기 유키오는 그렇게 한다.  그의 아내 유키오가 4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후 주인공 시즈토와 동행할 때 사쿠야는 혼령이 되어 아내 유키오에게 등장한다.  삶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쿠야에게서는 허무주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애도하는 사람'이 된 데는 가족과 환경, 인생의 상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당신도 분명 모른다.  그렇게 보였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신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 말고도 '애도하는 사람'이 태어나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유로 죽었건 차별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에 관한 추억에 따라 가슴에 새기고, 그 인물이 살아있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 적어도 지금 난 당신을 찾고 있다.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도, 꼭 '애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할 텐데."    (p.431~p.432)

 

소설 속의 또다른 주인공인 마키노의 말이다.  마키노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악덕 기자로 나온다.  그의 기사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 옐로우 저널리즘의 전형이었지만 시즈토를 우연히 만난 후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위에 적은 말은 그가 조직 폭력배에 의해 보복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아무리 악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시오도 변비가 더 신해져 고생하고 있었다.  모녀가 식탁에 앉아 변비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극히 일상적인 화장실 문제로 고민하는 서로의 모습에, 죽음에 관해서도 탄생에 관해서도 폼나게 말해봐야 소용없어.  인간도 생물이니까 동물이니까 하며 깔깔거렸다.  참 이상한 데서 마음이 통한다 싶었다."    (p.440)

 

(어쩌면 그날의 광경이 그 아이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몰라.  주목받지 못한 죽음, 아무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알고, 죽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하는 슬픔과 함께...... 그 일이 지금 그 아이에게 전국을 걷게 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좋을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조부모의 죽음과 소아 병동 아이들의 죽음, 소중한 친구의 죽음...... 다만 어떤 사람의 죽음을 그 연유에 상관없이 똑같이 애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히로시마를 맞은편에 둔 이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들의 웃는 얼굴에 둘러싸인 가운데 처음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p.476)

 

위의 두 대목은 주인공 시즈토의 어머니이자 끝까지 시즈토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사카쓰키 준코의 말이다.  준코는 암 말기 환자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남편과 딸 미시오와 함께 집에서 지낸다.  시즈토의 여동생인 미시오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을 받았다.  그녀의 오빠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준코는 임신한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낀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이어지나 보다.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p.551)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난 마키노의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내 가슴에도 메아리처럼 남았다.  삶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림자처럼 죽음 또한 가득한 세상이다.  누군가는 살아 있는 자의 말이나 장식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되고 기억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죽음과 동시에 잊혀지기도 한다.  죽어서도 인간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그 쓸쓸함을 달래기에는 이 책 <애도하는 사람>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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