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고상미 그림, 봉현선 옮김 / 혜원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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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쪽으로부터 피어 오른 하얀 구름이 마치 길게 늘인 목화솜처럼, 혹은 골목마다 자욱이 내뿜고 달리던 연막 소독차의 부연 연기처럼 코발트빛 가을하늘을 휘감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다.  어학 연수 시절 퍼스의 퀸 파크에서 바라보던 하늘도 오늘과 비슷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어학 연수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대학 동기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어학 연수차 퍼스에 갈 거라고.  시드니 외곽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그 연락을 받자마자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때 통학용으로 구입한 1980년식 닛산 사파리를 타고 호주 남해안을 돌아 퍼스까지 갈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다소 엉뚱하고 미친 짓에 가까운 모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먼 거리를 차로 달린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호주 지리도 모르는 이방인이 낡은 중고 자동차를 타고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죽을 고생을 하여 나는 간신히 퍼스에 도착하였고, 친구와 함께 호주 서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 돌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천지신명의 도움이 컸다고 하겠다.  그 여행길에 가지고 갔던 휴대품 속에 짐짝처럼 실려 있던 책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물론 호주에서 구입한 원서였다.  나는 어쩌면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여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닉에게 했던 말처럼.

 

"그 후로 나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인도의 왕자 같은 생활을 했지요.  파리, 베니스, 로마 등지에서 말입니다.  주로 보석을 수집하고, 사냥도 즐기고, 가끔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그림은 아닙니다.  그저 혼자 심심풀이로 그린 것이니까요.  그렇게 지내면서 오래 된 슬픈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지요."    (p.118)

 

물론 나는 보석을 수집한 것도, 사냥을 즐긴 것도, 그렇다고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털털거리는 차가 제발 퍼스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데이지를 잊지 못하는 소설 속의 개츠비처럼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우정이 열렬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그저 먼 이국땅에서 나와 인연이 있는 자국민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마침내 친구를 만났고,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한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두 단계를 지나서 새로운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을 거쳐 이제는 데이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일을 머리 속으로 치밀하게 계획해 왔고,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인내력으로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감은 시계의 태엽처럼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p.165)

 

그랬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가 달려온 길을 친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친구를 만남으로써 그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비로소 서서히 풀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오늘처럼 푸르렀던 퍼스의 하늘을 보며 친구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굳이 먼 타국으로의 어학 연수를 결심했던 이유를.  그것도 대학 기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중히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호주로 향하게 된 특별한 이유를.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만났던 한 여인의 사랑 고백에 무척 당황했었고, 빈털털이에 가까운 나의 집안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그 여인의 집안을 비교했었고,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실연의 고통을 두려워 했었다.  어쩌면 나는 결국은 손에 넣지 못할 동경하는 대상에게 내 욕심만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의심했었을 것이다.  마치 개츠비의 환상처럼 말이다.  그때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나에게 어떤 조언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도......

 

"5년만의 만남!  이 재회의 순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을 깨뜨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그 동안 너무나 간절했던 개츠비의 환상 때문이다.  환상이 그녀의 현실을 뛰어넘고, 또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과 집착으로 환상을 키워왔고, 그러면서 찬란한 깃털로 환상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아무리 지순한 순정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남자가 가슴 속에서 키워 온 환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p.173)

 

내가 도망치듯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그녀의 사랑 고백을 끝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내 자신에 대해 자책하며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더불어 약간의 후회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린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실감했었다.  나는 결국 그녀도 소설 속의 데이지처럼 '결국은 모두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서로 아웅다웅하며 경쟁을 하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만이 갖는 강한 생활력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언젠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갈 때면 그 두려움은 곧 나에 대한 원망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내린 결정에 일말의 위로를 한 셈이다.  나는 어쩌면 서른 살이 가까워 오는 그 시점에 소설 속의 주인공 닉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 - 그것은 독신 남자가 알아야 할 일을 적어 넣는 목록이 점차 줄어들고, 정열의 부피도 줄어들고,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어들 고독한 10년을 예고하는 나이다.  하지만 내 곁에는 조던이 있었다.  그녀는 데이지와는 달리 총명해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일을 두고두고 곱씹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여자였다.  차가 어두운 다리 위로 들어서자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내 어깨 위로 천천히 기댔다."    (p.250)

 

'많은 남자들이 데이지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는 사실에서 보듯 어쩌면 개츠비는 누구나 원하는 어떤 대상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돈이 젊음과 신비를 지켜 주는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개츠비처럼 나 또한 돈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개츠비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가난한 청년의 고뇌와는 멀리 떨어져서 은처럼 빛나는 존재'가 데이지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던 것처럼 나는 한국에 두고온 그녀를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때 보았던 하늘처럼, 오늘 하늘은 하얀 구름에 휩싸인 채 먼 과거로 유영하고 있었고,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읽으며 퍼스에서 만난 친구를 생각하였다.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가면서도 계속 노를 저어 과거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빠르게, 때로는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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