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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여전히 무성한 숲의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었지만, 간혹 하늘이 훤히 드러난 길에서는 한두 방울의 비가 얼굴을 스치곤 했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비해 빗방울의 감촉은 차지 않았다. 아침 세숫물이 서늘하게 느껴지던 늦가을 아침, 찬물에 가마솥의 끓는 물을 반 바가지쯤 섞어 놓았을 때의 느낌이 그랬을까?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조금 젖으면 어떠랴.'하는 태평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 리뷰를 쓰면서 '이것도 괜찮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마음에 가득했던 여운을 차마 글로 옮기지 못했던 책들, 돌이켜 보면 그런 책들이 한두 권일까마는 나는 기억에 남는 그런 책들을 다시 읽고 리뷰를 쓰기로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한껏 고무되는 느낌이었다. 장롱 속 깊숙히 숨겨두었던 옛 추억을 다시 꺼내는 듯한, 내가 선택한 책들이 나를 앞에 두고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을 조곤조곤 들려줄 것만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는 대학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처럼 열광적인 '하루키 신드롬'이 불기 이전부터 작가의 마니아층은 서서히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시절의 나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조금쯤(혹은 많이) 야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법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가 오히려 건전하게 보이게 했던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청춘 소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춘'이란 시기는 얼마나 짧고, 다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러나 나의 청춘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청춘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오롯이 산 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죽음의 순간을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던 까닭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살아있는 자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실의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청춘들에게 있어 그 아픔이나 시련은 딛고 넘어가야 하는 어떤 것일 뿐, 가슴에 오래 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주지시키고 있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나를 향해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던가.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5)
왜 와타나베는 죽은 나오코가 했던 부탁의 말에서 나오코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느끼게 된 걸까? 그랬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은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남겨진 삶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의 삶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청춘'이란 어쩌면 대비하지 못한 상실의 고통을 순간순간 겪으며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청춘의 시기에 '사랑은 언제든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었다. 그 방어기제는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과 윤리'라는 메마른 땅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 케이크가 안 먹고 싶어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구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 주지.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로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p.130)
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대화 장면이다. 사랑을 경험해 본 많은 청춘들이라면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을 듯싶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유치한 것이라고. 세상의 어떤 사랑도 이성적인 판단이 개입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유치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체면이나 규칙을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지식한 나의 이면에는 나를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나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킨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순진 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뒤흔들어 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 정말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p.327)
와타나베의 선배였던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기에게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라고.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지독한 에고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분리됨으로써 헤매지도,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때 나가사와의 연인이었던 하쓰미 씨는 헤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며 항변한다. 하쓰미 씨는 자신과 다른 유형이었던 나가사와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단단한 에고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자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작품 속의 나가사와와 비슷한 청춘이었던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p.413)
주인공 와타나베의 말이 옳다. 우리에게 찾아온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깨달음이 다음에 닥쳐오는 에기치 않은 슬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또 청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빛나는 청춘의 시기에 이성을 멀리함으로써, 또는 내가 세운 규칙을 가혹하리만치 철저히 지킴으로써 다른 청춘과 구별되는 '우월성'으로 나를 포장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맨몸으로 견뎌야 했던 청춘의 시절을 나는 우산을 쓴 채 메마른 사막을 건너온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