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이 생각날 즈음이면 가을은 벌써 생기를 잃고, 발랄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태평한 고독 속에서 늦가을의 소슬한 추위를 맞이하곤 했다.  쇠락해가는 녹음과 서서히 스러지는 한낮의 열기를 감안하면 인생의 여름은 마냥 더딘 것이지만 박경리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려낸 삶의 궤적은 마치 순간인 양 허망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박경리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어느 하숙생이 버리고 간 한 무더기의 책더미 속에는 시시껄렁한 무협지 몇 질과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때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신나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우리집에는 읽을 만한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없었던지라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의 겨울방학에 나는 이 책을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었다.  마치 처음으로 받았던 종합선물세트의 과자를 빼먹듯 말이다.

 

그러나 『김약국의 딸들』은 어린 내가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지 싶다.  소설 속에서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누군가에 의해 '짠'하고 다시 일어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바로 그것이었다.  미약하게나마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용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었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김약국 가문이 '용빈'에 의해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손끝 야물고 성실한 용옥마저 아이와 함께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삶의 아득함을 넘어 공허감이 몰려왔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균질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앞으로의 내 삶도 혹시,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성긴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빈은 용옥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용옥이 결혼한 후 더욱 광신적으로 기독교에 기울어지는 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메마른 얼굴, 빛을 잃은 눈동자, 용빈은 가엾은 동생을 위하여 남몰래 간혹 근심을 하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격심한 사건의 연속 속에 용옥의 존재는 그다지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용빈은 그것을 생각하니 더욱 감슴이 아팠다.  그야말로 용빈의 마음은 억만 군졸이 짓밟고 지나간 형상이었다."    (p.363)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김약국의 딸들』이 내게 던져준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나는 그때 소설 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운명'이라는 강력한 힘에 넋놓고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비록 삶을 관조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알 수 없는 삶의 굴레에 진저리를 쳤었다.  휑한 바람이 가슴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뭔가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청소년기의 어린 나이에 철학에 빠져든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갈 이유,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허무와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에 매달렸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된 아들과 통화를 한 후, 나는 박경리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운명' 앞에서 한없이 주눅들게 했던 그때의 작가는 이제 가고 없다.  잔인하리만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었던 박경리 작가.  '우리의 잔혹한 현대사는 한 작가를 키워내기 위해 그녀의 가슴에 모진 발자국을 차근차근 새겼고 그 멍자국 속에서 그녀는 문학이라는 푸른 생명의 나무를 키워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공지영 작가의 추모사가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노래했던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늦가을의 하루가 또 고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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