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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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둔하며 감싸주기에는 내게 다가올 비난과 조롱이 두려웠던 그런 사랑을 보았습니다.  내 가슴을 면도날처럼 베며 지나갈 차가운 시선을 감당하기에는 내 용기가 참으로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누군가의 눈물이 내 발치에서 시작하여 무릎으로, 가슴으로, 결국에는 머리 끝까지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이후로 다만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어떤 것들이 차마 그 시절에는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한껏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밤의 어둠처럼 누군가의 아픔이 언젠가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떠올릴 때면 책을 펼치기도 전에 눈시울부터 붉어집니다.  모든 인생에는 전성기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라면 공지영 작가의 전성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시(詩)에 깃든 자신의 경험과 아픈 과거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책 속에는 무려 40편에 가까운 시가 소개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학창 시절에는 시인이 되기를 꿈꿨었기에 작가는 여전히 수많은 시인들을 흠모하고 그들의 시를 읽으며 안식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토록,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과, 그런 것들을 기꺼이 버텨낸 사람으로 한 번 더 나뉘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든 이성이든 가여운 이들이든 혹은 강아지든, 사람은 사랑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가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치유하고 있는 영혼을 질료로 삼는다는 걸 알았다는 말입니다."    (p.80)

 

수없이 되뇐 시구가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의 인생으로 되돌려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것이 꼭 공지영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저 이름 없는 풀처럼, 그저 바람처럼 그렇게 살다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말이지요.  이 책은 산문이면서 '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쓴 서간체 형식의 글입니다.  ‘J'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어떤 사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와 비밀스러운 속내를 ‘J’에게 털어놓는가 하면 ‘J’를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J,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릴케를 인용하며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사랑이란 무턱대고 덤벼들며 헌신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과 미완성인 사람 그리고 무원칙한 사람과

    의 만남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끄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의 어떤 구석을 건드리고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했을까요? 하는 구절 말이지요."    (p.99) 

세 아이의 엄마로, 그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 작가 공지영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노라면 어느 순간 책장을 넘기는 내 손가락에 흥건한 슬픔이 묻어날 것만 같습니다.  기억하시나요?  1997년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영국 내 우울증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급감했다는 사실을 말이죠.  작가가 기록한 일상의 이야기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 독자의 마음을 두들깁니다.  세상으로부터, 삶과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고통을 봉헌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이라는 듯 말이죠.

 

"지금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재는 깨끗하고 스탠드도 따뜻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시간에 결국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고 맙니다.  모든 타인들이 떠나고 모든 소유들이 흩어진 후에도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저는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습니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러니 눈을 감지 말고, 책장을 덮지도 말고, 멈추지 말고 앞으로 간다...... 앞으로 가는 길이 아파도 간다......너는 소설가이고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 하고."    (p.129)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어린 시절의 한 줄 노랫자락이 어느 순간 확연한 의미와 함께 나의 가슴을 포근히 감싸듯 한 줄의 시구가 때로는 나를 울리고 그 울음으로 인해 나는 치유됩니다.  아마 작가도 그랬겠지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책의 제목은 이라크의 저항시인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외로움〉이라는 시에서 인용한 문구라고 합니다.  작가가 인용한 시는 다양합니다.  D.H. 로렌스의 <겨울 이야기>, 기형도의 〈빈 집〉, 김남주의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는 이맘때쯤이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아픕니다.  삶은 그렇게 아픈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픈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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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2-30 13:4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책인데, 참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3년 서재의 달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꼼쥐 2013-12-31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전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다시 읽어보니 좋은 책이다 싶기도 하구요. 물론 작가는 한창 어려운 시기를 넘던 순간이었겠지만 말이죠.

이렇게 축하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
이근후 지음, 김선경 엮음 / 갤리온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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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 중에 <꽃보다 누나>가 있다.  세간에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인지라 어제는 우정 시간을 내어 방송을 보았다.  짐꾼 이승기와 더불어 배우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이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좌충우돌 단체 여행기이다.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하고, 크고 작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유명 연예인의 속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어느덧 회갑을 넘긴 윤여정과 김자옥의 가슴 뭉클한 우정과 결혼 17년차라는 김희애의 연애담 등 예능으로서의 재미도 쏠쏠했다.

 

어제의 방송분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맏언니 윤여정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윤여정은 그것을 "쓸쓸하고 씁쓸하다"고 말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일반인이 아닌 여배우로서, 또는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나이 든다는 것은 슬프고도 덧없는 느낌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연기력은 높아질 수 있지만, 잡을 수 없는 나이의 흔적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다. 윤여정은 “물론 배우로서는 나아갈 수 있지만, 외모는 흉해진다. 점점 흉해지는 내 꼴이 나도 싫은데…”라며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속내를 담담히 전했다.  그 장면에서 나도 일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구도 흐르는 세월을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죽음과 함께 그의 삶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아연해질 때가 있다.  죽음만큼 더한 진리는 없다.  젊어서는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진리로 인해, 차츰 나이가 들면서 재판관 앞에 선 피고처럼 가슴 한켠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노년의 삶은 두려움으로 시작되는가 보다.  아직은 새파랗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 나이에도 나이 든다는 것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 걸 보면.

 

이근후 박사의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노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함으로써 인생의 후배이자 그의 저서를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하다. 주위에는 밤에 자다가 세상을 떠난 동창이나 선후배가 많다. 나 또한 내일이 반드시 예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와! 눈떴구나! 하하하!' 하고 쾌재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이라니!"    (p.21) 

 

50년간 정신과 전문의로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76세의 나이에 최고령이자 수석으로 사이버 대학을 졸업하고, 삼 대 열세 가족과 한집에서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등 누구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노년을 보내고 있는 노학자라고 한다.  언제였는지 기억엔 없지만 저자의 대가족이 사는 '예띠의 집'을 TV에서 보았던 적이 있다.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 원장으로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을 펼치고 있고, 매년 의료 봉사를 위해 네팔을 방문하며, 시 낭송 모임과 영화 동아리 세미나에 참석하고, 청탁 원고를 쓰고 있다고 한다.  큰아들이 결혼한 뒤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는 저자는 삶의 매 순간을 정말 낙관적으로 사는 분인 듯했다.

 

"언젠가 선배 교수가 연구소를 찾아왔을 때 일이다. 나와 한담을 나누던 중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 그러니까 내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아내가 무슨 일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며느리는 "예? 그럼 언제까지 하면 되나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그건 안 되겠는데요." 며느리가 자리를 비우자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자네 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 같아. 며느리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켰구먼." 선배의 눈에는 시어머니의 부탁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단박에 거절하는 며느리가 마뜩찮았던가 보다. 정작 시아버지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선배 교수 말대로 며느리 교육은 내가 '제대로' 시켰다. 큰아들이 결혼한 뒤 나는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p.42~43)

 

이 책은 모두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53가지의 귀중한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실린 가르침이 '이렇게 살아라'하고 말하는 나이 든 사람의 준엄한 지침이라고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재미있는 일만 골라 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을 재미있는 쪽으로 만들어 갔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관상동맥협착, 담석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자동차와 손목시계, 휴대전화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원시인 취급한다. 자식들은 내가 이기적이라고까지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내는 필요할 때 바로 통화를 할 수 없어 답답하고, 자식들은 내가 외출할 때 자동차로 모셔다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전용 자가용 '택시'가 있으니 절대 눈치 보거나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p.298)

 

몇 년 전부터 아내와 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같이 살았던 때보다 아내와 아들녀석에 대하여 궁금한 게 배는 많아졌다.  아내도 그런 모양이다.  지난 크리스마스날에도 아내는 내게 물었다.  내가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그렇게 물었던 이유인 즉, 그 전보다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생각해도 나는 많은 면에서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 중 하나는 집착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돈에 대해서도, 명예나 체면에 대해서도, 심지어 미래에 대해서도 나는 예전의 생각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  대신에 나는 지금 당장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고 있음이다.  책의 제목처럼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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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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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자신의 경험담을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들었는데요, 저는 그때마다 '왜 어른들은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들어서 재미도 없는데 왜 저렇게 또 침을 튀겨가며 되풀이하는 걸까?  지겹지도 않나?' 하고 생각했었죠.  제가 그때의 동네 어른들 나이쯤 되고 보니 어느 순간 저도 그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뭡니까.  참 우습죠?

 

지구별에서 인간의 삶이 지금까지 영속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지겨운 얘기를 되풀이하여 후손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인간의 DNA에는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하도록 입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때 들었던 얘기가 하나같이 재미없던 것은 아니었어요.  이따금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죠.  어쩌면 제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알게 모르게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아크라 문서>는 제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삶에 필요한 교훈들만 가려 뽑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사실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가 흐르니까요.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소설은 십자군의 침략이 눈앞에 닥친 시점에서 예루살렘의 군중이 콥트인 현자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서 군중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현자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책이 있지요?  예언자 알 무스타파가 세속에 나와 자신의 통찰을 속인들과 이야기하는 문답형식의 책 말입니다.  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입니다.  혹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형식은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주제가 그렇고, 문체가 그렇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문장이 아름답고 여성적인 섬세함이 돋보이는, 어쩌면 시에 가까운 듯 보이는 반면, <아크라 문서>는 비유나 시적인 운율이 배제된, 강건하고 논리정연한 문체로 쓰여 있습니다.  두 책에서 같은 주제로 쓰인 대목을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 안을 땐, 몸을 내어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예언자' 중 '사랑'에 대하여)

 

"인생의 목표는 사랑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 때문에 눈물이 호수를 이루는 곳으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눈물의 땅으로 가게 되더라도!  눈물은 감출 수 없다.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될 때도 눈물은 쉼없이 흐른다.  그러나 우리가 슬픔의 계곡을 오래도록 걸을 운명임을 인전하는 순간, 눈물은 이내 그친다.  고통스럽더라도 마음을 계속 열어두기 때문이다."    (p.91)

 

파울로 코엘료는 이 소설의 배경으로  전쟁 직전의 절박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콥트인 현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합니다.  패배, 고독, 변화, 아름다움, 목표, 사랑, 시간, 성교, 믿음, 우아함, 행운, 기적, 불안, 죽음, 충심, 평화, 성령 등에 대하여.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간에야 우리는 가장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에 모여 현자에게 질문을 하는 군중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현자가 들려주는 답변은 곧 작가 자신이 터득한 성찰의 결과물이자 독자들에게 전해줄 교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참 지루하게 읽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것처럼 깊은 성찰의 결과물은 언제나 재미없고 밋밋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책에선가 이미 읽었음직한 문구들, 극적인 장면도, 현란한 수사도 없이 단순하게 이어지는 문장들, 파울로 코엘료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소설 형식의 자기계발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제 자신이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범함 독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행간을 읽는 재주는 제게 없었습니다.  그저 '지루하다' 느꼈을 뿐이지요.  "기쁨의 웃음이 흘러넘치는 그 샘이 다음 순간에는 슬픔의 눈물로 가득 차게 된다"고 `예언자`에서 칼릴 지브란은 말했습니다.  지루함이 흘러넘치는 그 샘이 다음 순간 깨달음의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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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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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 사거리 치하철역에서 서울대 방면으로 빠져나와 조금만 걸으면 옛날 순대골목이 있던 자리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른쪽으로 돌면 옛 신림극장이 있던 자리 앞의 보도 한곁에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아련한 추억에 젖곤 한다.  대학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든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신림교를 건너기 전 천변 건물의 2층에 있던 작은 서점이다.

 

당시에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매달 강의료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서점에 들르곤 했다.  읽고 싶었던 도서 목록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들고 책을 고를 때면 나는 더없이 행복했었다.  2층의 서점에서 내려다보던 거리 풍경도 그때만큼은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있어 서점은 단순히 책을 거래하는 장소 이상의 공간이었고, 시간과 추억을 쌓아두는 비밀창고와 다르지 않았다.

 

시미즈 레이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을 읽으며 나는 대학시절의 나와 그때 자주 들르던 서점을 떠올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서점을 소개하는 이런 종류의 책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추억의 단골서점으로 내 발길이 향하는 것처럼 마음과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까닭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람들은 종종 종이책의 종말을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 주변의 서점에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을 들어서는 부부의 모습을 볼 때 나는 저절로 미소가 번지곤 한다.  책과 서점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건재하고 다음 세대에도 그럴 것이라 믿게 된다.

 

저자인 시미즈 레이나는 지금까지 100여 곳 이상의 서점을 취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서점 스무 곳을 소개하고 있다.  에게 해의 석양이 아름답게 빛나는 산토리니 섬의 '아틀란티스 북스',  북 잉글랜드의 기차역이었던 곳의 '바터 북스', 이탈리아의 최신 유행을 발신하는 '디에치 꼬르소 꼬모 북숍' 브라질 상파울루의 '빌라 서점' 등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서점들이 큼직큼직한 화보와 함께 등장한다.

 

택배로 이 책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백색의 양장본 표지에 우윳빛 띠지가 둘러진 책은 겉모습부터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책은 일반책의 1.5배쯤 될까?  책장을 펼치자 드러나는 화려한 사진들은 마치 이 책이 사진 화보집인 듯 보이게 했다.  손에 잡히는 묵직한 느낌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고, 나는 금세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클릭 한 번으로 책은 살 수 있겠지만 그곳에 이야기는 없다.  서점으로 향하는 길목의 풍경, 서점을 가득 채운 공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사소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탐욕스럽게 추구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점을 찾는지 모른다."    (p.7)

 

우리가 처음으로 서점을 방문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대부분은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그 거대한 책의 세계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나이에 그곳에서 맡았던 책의 내음과 다양하게 빛나던 책의 표지에 감동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평생 동안 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계의 편리로는 채워지지 않는 따뜻한 가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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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3-12-22 22:23   좋아요 0 | URL
꼼쥐님이 말핫는 그 서점이 있는 곳으로 제가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갔는데 말입니다. 음...생각이 나는것도 같고...아닌것도 같고....

동네에 작은 서점들이 모두 사라져서...마음이 아파요.

꼼쥐 2013-12-24 14:19   좋아요 0 | URL
지금은 사라진 신림극장 맞은편에 있던 서점이었어요.
저도 그곳에서 마을버스를 타곤 했었죠.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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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시간입니다. 그보다 더 황홀한 순간은 춤추는 나 자신이 사라지고 오직 춤만이 남는 순간이지요.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었던 것이다.

 

조던 매터의 사진집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을 보면서 나는 문득 니진스키를 떠올렸다.  무용수들의 홍보용 사진으로 시작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는 일상의 공간과 무용수를 결합함으로써 열정으로 가득찬 우리 삶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아들 허드슨이 장난감 버스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사진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처럼 독자들도 크든 작든 매 순간을 즐기고,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에 눈을 떠 활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이러한 열정, 이러한 능력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이러한 천진무구한 경험은 왜 그리도 쉽게 냉소와 권태, 무관심에 자리를 빼앗기는 것일까?  나는 아이와 노는 동안, 내 아들의 눈에 투영된 세상을 보여 주는 사진 작품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작품에 담기로 마음먹었다."    (p.8) 

 

Dreaming, Loving, Playing, Exploring, Grieving, Working, Living 등 일상을 구성하는 7가지 키워드에 의해 분류된 사진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에 무용수의 춤동작이 더해져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트램펄린이나 포토샵의 도움 없이 오로지 무용수의 신체만으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마치 무중력의 우주를 떠올리게도 하고, 하늘로 도약한 무용수들이 혹시 다치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아니 할 수 없도록 만든다.  1000분의 1초의 타이밍이 아니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여러 사진들이 틀에 갇힌 우리의 상상력을 먼 우주까지 확장시키는 듯하다.

 

학창시절 프로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작가는 연습벌레 야구 선수였다고 한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배우가 되려고도 했었던 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 매혹되어 결국 사진 작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의 다양한 경험과 지난 날의 꿈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뛰어난 연출과 무한한 상상력은 그의 이력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서핑을 즐기러 바다로 향하는 남자, 다이아몬드 야구장에서 신나게 응원을 하는 여자, 거리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 방금 타고 온 지하철에서 내려 기대에 들뜬 채 낯선 곳으로 달려가는 남자, 변기에 얼굴을 박고 괴로워하는 취객, 시계를 보며 횡단보도를 나는 듯 달리는 출근객, 보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어느 청년 등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찰나의 순간들이 작가에게는 강렬한 에너지로 포착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사진과 함께 삶의 이력을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성인인 우리들은 성숙함과 극기심을 혼동하고는 한다.  결국 슬픔을 발산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다.  어른이 놓은 수많은 덫 가운데에서 가장 파괴력이 강한 것은 슬픔이 우리를 찾아올 때 '기운을 차리고 그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통을 피해서 달아나려 하지 말고 슬픔에 몸을 내맡기도록 하자."     .(p.134)

 

이 책의 표지에 실린 <빗속의 댄서>, 즉 비 오는 거리에서 빨간 우산을 들고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오른 빨간 외투 차림의 여자는 책이 출간되기 훨씬 전부터 전 세계의 블로거들 사이에서 유명해졌었지만 작가는 이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메이시스 백화점Macy's 앞을 촬영 장소로 골랐다.  안마리아는 퍼붓는 빗속에서 하이힐을 신은 채 삼십 분 동안 도움닫기 멀리뛰기를 마흔다섯 번이나 했다.  이 사진은 프로젝트의 첫 작품들 중 하나였고,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촬영 당시에 이러한 상황에서 점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p.223)

 

우리 민족만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라는 말을 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졸업식장에서, 결혼식장에서, 팔순잔치의 연회장에서...  우리가 찍고 간직했던 수많은 사진들이 삶의 열정으로 되살아나기를, 그리고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던 그 사람들이 다들 잘 지내기를 조던 매터의 사진집을 넘기면서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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