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지금 아파트 공터에서는 키 작은 꼬마 아이가 얼음 조각을 차며 놀고 있다.  신선한 풍경이다.  아이는 그 짧은 다리로 잘 보이지도 않는 얼음 조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걷어차고는 간혹 균형을 잃고 풀썩 넘어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몇 센티쯤 옮겨간 얼음 조각을 보며 깔깔대며 웃는다.  아이는 마치 얼음 조각을 옮기는 것이 제게 맡겨진 커다란 소임인 양 이내 일어나 또다시 집중한다.  이번에는 아이의 발이 허공을 가른다.  두꺼운 코트때문인지 이번에도 풀썩 주저앉았다.  헛발질이 무안했는지 아이는 울지도 않고 일어난다.  주차되었던 차 한 대가 그곁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이에게서 조심성이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투다.  아이에게는 지금 얼음 조각이 세상의 전부다.

 

그렇게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았다.  나이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열정만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잃어간다.  나는 한동안 이름도 모르는 동네 꼬마를 지켜보며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세 돌 된 아들과 함께 터키를 여행하고자 했던 작가의 결단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많은 생각들이 오갔으리라.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로 나는 아이에게도 혼자 걷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무척 노력했다.  어떤 엄마들에게는 가베나 오르다 같은 것이 중요한 교육적 선택이 되는 시기에, 나는 아이를 부단히 데리고 다니며 걷게 했다.  열이 오를 때에도 졸음이 쏟아질 때에도 아이는 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제 힘으로 걸었다."    (p.126)

 

여행에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마는 여행의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은 내가 원했던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여행의 동반자가 짐보다 더한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고, 더없이 믿음직한 친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 경험이 전무한 여행초보자라고 할지라도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꼬마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의 시각과 보조에 맞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히려 말없는 짐짝만도 못한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사람이 대부분일 이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용감(?)하게도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행을 감행했다.

 

"처음에 나는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에게 가방을 들게 하고,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의 첫 걸음마, 첫 번째 열감기, 처음 내지른 일성, 이 모든 것들은 매일매일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성실히 축조된 밑계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내가 끌고 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린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이 아이의 인생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p.170)

 

그렇게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빈이는 올해 중학생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무려 25개국에 발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아장아장 걷다가도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행렬에 자신의 온 시선이 빼앗기곤 하던 아이는 이제 자란 키만큼이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인 오소희 작가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의 중빈이를 그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란 아이의 시선으로 즐기지 않으면 고통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가 아이의 보조에 맞출 자신만 있다면 아이는 여행에 있어 최상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초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어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다.  나는 터키 여행을 통해 아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보았다.  샴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시기를 마감하고, 둘 사이의 적정한 간격을 보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더 잘 보였다.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고 싶은 것만이 분명해졌다.  나는 더 떠돌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p.301)

 

여행기는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경계가 뚜렷하다.  사진과 경로를 곁들여 단순히 여행지의 소개에 그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과 작은 깨달음을 위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를 즐겨 읽는다.  그렇다고 여행기를 그닥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들 녀석과 단 둘이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아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바빴고, 나는 언제나 피곤했다.  '언젠가'하고 게획했던 일들이 이제는 '다시는'이라는 메아리로서 존재할 뿐이다.  아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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