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두둔하며 감싸주기에는 내게 다가올 비난과 조롱이 두려웠던 그런 사랑을 보았습니다.  내 가슴을 면도날처럼 베며 지나갈 차가운 시선을 감당하기에는 내 용기가 참으로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누군가의 눈물이 내 발치에서 시작하여 무릎으로, 가슴으로, 결국에는 머리 끝까지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이후로 다만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어떤 것들이 차마 그 시절에는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한껏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밤의 어둠처럼 누군가의 아픔이 언젠가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떠올릴 때면 책을 펼치기도 전에 눈시울부터 붉어집니다.  모든 인생에는 전성기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라면 공지영 작가의 전성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시(詩)에 깃든 자신의 경험과 아픈 과거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책 속에는 무려 40편에 가까운 시가 소개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학창 시절에는 시인이 되기를 꿈꿨었기에 작가는 여전히 수많은 시인들을 흠모하고 그들의 시를 읽으며 안식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토록,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과, 그런 것들을 기꺼이 버텨낸 사람으로 한 번 더 나뉘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든 이성이든 가여운 이들이든 혹은 강아지든, 사람은 사랑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가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치유하고 있는 영혼을 질료로 삼는다는 걸 알았다는 말입니다."    (p.80)

 

수없이 되뇐 시구가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의 인생으로 되돌려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것이 꼭 공지영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저 이름 없는 풀처럼, 그저 바람처럼 그렇게 살다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말이지요.  이 책은 산문이면서 '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쓴 서간체 형식의 글입니다.  ‘J'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어떤 사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와 비밀스러운 속내를 ‘J’에게 털어놓는가 하면 ‘J’를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J,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릴케를 인용하며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사랑이란 무턱대고 덤벼들며 헌신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과 미완성인 사람 그리고 무원칙한 사람과

    의 만남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끄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의 어떤 구석을 건드리고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했을까요? 하는 구절 말이지요."    (p.99) 

세 아이의 엄마로, 그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 작가 공지영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노라면 어느 순간 책장을 넘기는 내 손가락에 흥건한 슬픔이 묻어날 것만 같습니다.  기억하시나요?  1997년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영국 내 우울증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급감했다는 사실을 말이죠.  작가가 기록한 일상의 이야기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 독자의 마음을 두들깁니다.  세상으로부터, 삶과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고통을 봉헌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이라는 듯 말이죠.

 

"지금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재는 깨끗하고 스탠드도 따뜻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시간에 결국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고 맙니다.  모든 타인들이 떠나고 모든 소유들이 흩어진 후에도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저는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습니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러니 눈을 감지 말고, 책장을 덮지도 말고, 멈추지 말고 앞으로 간다...... 앞으로 가는 길이 아파도 간다......너는 소설가이고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 하고."    (p.129)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어린 시절의 한 줄 노랫자락이 어느 순간 확연한 의미와 함께 나의 가슴을 포근히 감싸듯 한 줄의 시구가 때로는 나를 울리고 그 울음으로 인해 나는 치유됩니다.  아마 작가도 그랬겠지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책의 제목은 이라크의 저항시인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외로움〉이라는 시에서 인용한 문구라고 합니다.  작가가 인용한 시는 다양합니다.  D.H. 로렌스의 <겨울 이야기>, 기형도의 〈빈 집〉, 김남주의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는 이맘때쯤이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아픕니다.  삶은 그렇게 아픈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픈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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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2-30 13:4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책인데, 참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3년 서재의 달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꼼쥐 2013-12-31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전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다시 읽어보니 좋은 책이다 싶기도 하구요. 물론 작가는 한창 어려운 시기를 넘던 순간이었겠지만 말이죠.

이렇게 축하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