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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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를 만난다는 것은 '소설을 통한 인문학적 채험'을 하는 색다른 경험입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켜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도록 만드는,  설렘과 기대로 '인문학'에 한발 다가서게 하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내말 좀 들어봐>였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과 재치가 넘치는 표현들, 무엇보다도 철학과 상식을 넘나드는 작가의 지성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제 예상대로 호평이 쏟아지더군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예사로 넘기기 힘든, 말하자면 소설을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소설이지만 리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는 그런 짓거리는 통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쓰는 리뷰에 제가 특히 마음에 두었던 작품 속의 구절을 최대한 많이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부터 보시죠.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같은 구절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서, 보통의 젊은이가 갖는 치기 어린 과대한 감정 표출로 인하여, 혹은 으스대며 뻐기고 싶은 영웅심의 발로였다는 말로 우리의 과오나 실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조금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의 사실을 가감하고, 기름을 치며, 때로는 망각이라는 그늘 뒤로 숨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미약하고 터무니 없는 것인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바로잡아 줄 친구들도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결국엔 그 기억들이라는 게 나 스스로에게 했던 독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p.107)

 

위에 인용한 글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학창 시절 '역사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고 번복합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다른 인물인 에이드리언은 같은 질문에 대해'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선생님은 덧붙입니다.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는 평번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시간과 역사 속에 존재했었지만 기록되지도, 또는 기억되지도 않는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삶은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을 거부해야 마땅할까요?  소설 속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친구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주에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토니가 편지에 썼던 예언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편지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토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p.153)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주인공 토니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견 회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토니의 아내였던 마거릿은 말합니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입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과오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토니의 노년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애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베로니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를 믿어준다면?"    (p.186) 

 

저는 이렇게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이진 이 소설은 제 리뷰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제 바람입니다.  부디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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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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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이 세월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잠시 팔랑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아스라한 순간을 하릴없이 지켜보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정녕 내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세월호의 침몰 사고 순간부터 나는 눈과 귀를 막은 채 TV와 멀어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입마저 막을 방법은 내게 없었습니다.  잔인하게도 나는 여린 생명이 죽어가는 소식을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듣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실시간 중계로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사고 수습이 다 마무리 된, 마치 조문객이 다 물러 간 슬픔의 언저리에 주저앉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했던 순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입니다.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려던 원래의 계획은 책을 몇 장 읽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테니 안심 해.'라고 말해 줄 악마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소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때문이었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자식을 잃은 어느 학부모의 핏빛 오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 '윌'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국 시골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윌'은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하여 부와 명예, 아름다운 연인까지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인해 그는 사지마비 환자가 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게 됩니다.  '윌'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부모님과 '윌'은 6개월이라는 한시적 유예기간을 두는 데 합의하였고, 그래도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병원에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윌'이 태어난 시골 마을의 치안판사로 재직중인 어머니는 그 약속된 시간마저 지켜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윌'의 추가적인 자살 시도를 방지하고, 삶의 의지를 되살려줄 간병인을 찾는 과정에서 '윌'과 만나게 된 사람이 여자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입니다.  고향 마을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전형적인 시골뜨기였습니다.  '루이자'는 간병인 모집 공고가 났을 때 자신의 직장이었던 카페가 문을 닫아 실직 상태에 있었고, 그녀의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던 루이자는 새로운 직업이 절실했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간의 한시적인 고용 의무를 다하려던 루이자는 '윌'의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 탓에 간병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p.84)

 

어느 날 '루이자'는 6개월이라는 자신의 한시적 고용 관계가 끝나면 '윌'과 그의 가족들이 '윌'의 자발적 죽음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루이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로 '루이자'는 '윌'이 안쓰러워 그 결정을 돌리기 위해 헌신합니다.  반면에 '윌'은 그런 '루이자'가 불쌍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루이자'가 말입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배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114)

 

변심한 '윌'의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루이자'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하고, 혼자서는 시도조차 어려웠던 문신도 합니다.  행복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급기야 사랑의 감정까지 싹트게 됩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윌'과 엉뚱하고 순진한 '루이자'의 사랑은 그렇게 깊어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약 기간의 끝이 다가오면서 '루이자'의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긴 여행을 계획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던 '윌'을 위해 사지마비 환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결국 '윌'의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 바람에 '루이자'는 7년이나 사귀었던 애인과도 결별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지도 않았고, 감당 못할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몇 년씩 사귄 연애를 끝장낼 때 응당 느껴야 할 감정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몹시 차분했고, 약간은 서글펐고, 어쩌면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진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이토록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p.436)

 

'윌'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루이자'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합니다.  열흘 간의 꿈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였음에도 '윌'은 끝내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루이자'는 '윌'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결별합니다.  '윌'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하려는 '윌'과 자신의 집에서 '윌'을 그리워하는 '루이자'.  '윌'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은 '루이자는 결국 스위스로 향합니다.  '윌'과의 마지막 인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자'의 동생 '카트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 토머스를 생각하며.

 

"나는 언니가 윌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남자를 좋아했던 적도 있고 같이 자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나한테 무슨 감수성 칩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귀던 남자들 때문에 운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게 유일하게 그 비슷한 사람은 토머스일 텐데, 그 애가 낯선 나라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내 마음 속에서 뭔가 펄떡 뒤집어졌고, 그게 너무나 섬뜩하게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깊은 곳 정신적인 서류철에다가 그 생각을 꽂아 정리해두고 '생각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닫아버렸다."    (p.502)

 

차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상실의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선택했던 책.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더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진 듯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직시하는 슬픔보다는 유예된 슬픔을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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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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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한가한 시간이 찾아와도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작동하는 나의 뇌를 생각할 때 조금 걱정이 되곤 합니다.  마치 방전된 자동차가 '푸르륵 푸르륵'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정적 속에 농밀한 절망만을 남겨둔 채 멈춰버리는 것처럼 나의 뇌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머릿속의 상상이나 걱정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것들이어서 적어도 한가한 시간에는 나의 뇌도 육체와 함께 편히 쉬었으면 좋으련만 무슨 궁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처럼 맞는 한가한 오후를 『오즈의 의류수거함』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낯선 불청객이나 느닷없이 벌어지곤 하는 특별한 사건이 나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쌓여 독서를 하려니 책의 내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모래알갱이들처럼.  어쩌면 현실을 비껴간 작가의 작위적 구성이 약간의 거부감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략 이렇습니다.  외고 입시에 낙방하여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도로시(본명),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닉네임), 자발적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숙자 씨, 식당을 하는 마마, 탈북 새터민 카스 삼촌, 자살을 꿈꾸는 195.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뭉텅뭉텅 사라져가는 행복과 급기야 칼날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슬픈 자화상.

 

이야기는 독서실에서 늦은 귀가를 하던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거함 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멀쩡한 스키니진을 발견한 도로시는 마치 득템한 기분이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장비를 갖춰 동네의 의류수거함을 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류수거함 속에는 옷만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강아지 토토를 맡길 데가 없어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수거한 옷을 넘기게 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의사 부부였던 숙자 씨는 구제역이 창궐하였을 때 가축 살처분 현장에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 트라우마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숙자 씨는 홀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게 됩니다.  마녀를 통하여 알게된 마마는 유능한 자동차 딜러였습니다.  도박 중독자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들은 집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마는 아들이 숨진 옥상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탈북을 하다 다리에 총을 맞았던 카스 삼촌은 도로시처럼 의류수거함을 털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로시는 카스 삼촌과 구역을 나눠 옷을 수거하기로 약속하고 마녀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거리는 도로시가 누군가의 일기장과 상장 뭉치, 사진첩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물건들로부터 자살의 분위기를 감지한 도로시는 그 물건을 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끝없이 시도합니다.  195번 의류수거함 위에 올려 놓은 책 속에 메모지를 끼워 놓음으로써 대화는 이어지고 결국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살을 막아보려는 도로시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5는 결국 미국으로 마약 중독 치료를 받으러 떠나게 되지만 그 전에 도로시와 함께 의류수거함을 돌며 옷을 수거합니다.

 

"숙자 씨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왜 그렇게 195의 일에 매달리느냐는 숙자 씨의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자 씨에게는 단순히 자살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195의 존재가 이미 내 속에 깊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뚜벅뚜벅, 소리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바람처럼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  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195는 어어, 하는 사이에 쑤욱 내 속으로 들어왔다."     (p.118)

 

그렇게 밤의 세계에서 우연처럼 만난 사람들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폐지를 주워 손자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위하여 집에 보일러를 놓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부자 마을의 의류수거함을 터는가 하면 각자가 모았던 돈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여태껏 살아오며 이렇게 자존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항상 1등만 해온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이해 못할 거야."  195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힘없이 웃었다.  "자존감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 대신 자존심이 자리하고 있지."  "그것들의 차이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나는 195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나를 이해시켜준 데에 크게 감탄했다."    (p.218~p.219)    

 

사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달씩 의류수거함을 털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거니와 정기적으로 옷을 수거해 가는 허가 받은 업자가 그것을 모를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마도 의류수거함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고등학생인 도로시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나눔을 베품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지식을 우겨넣음으로써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도 모두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내가 매일 들르는 식당 아주머니가 오늘 "수고하세요." 라는 나의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과 라일락 꽃의 향기가 어제보다 조금 옅어졌다는 것과 공원의 등나무 넝쿨에 꽃이 피고 있다는 것 등을 생생히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상상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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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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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이 사람 이거 순전히 날로 먹으려고 하네.  책을 뭐 이따위로 설렁설렁 썼지?'하는 생각 말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이 대부분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가벼운 것들이어서(물론 아닌 것도 있다.  작가가 유럽을 여행하며 쓴 <먼 북소리>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 동안 인상을 쓰며 지내는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기에 앞서 한번쯤 정신과 상담을 받기를 권하고 싶다.  의사로부터 '정신적으로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서를 받은 사람만 읽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분명 반쯤 미친 놈으로 보일 테니까.

 

앞에서 말한 하루키 에세이집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을 꼽으라면 최근에 출간된 <더 스크랩>이 아닐까 싶다.  이건 뭐 숫제 에세이집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특히 한국 에세이스트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할 듯.)  가까운 친구들을 일개 분대쯤 집으로 불러서는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고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유명 연예인의 가십을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기사라도 되는 양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는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무척이나 쉽게, 즐기면서 썼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연재하는 걸 싫어하고,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긴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p.4)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대부분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의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집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왜냐하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은 개콘을 보듯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심각할 겨를이 없다.  때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도 한다.  아마도 나는 앞에서 제시했던 정신과 상담을 빼먹었기 때문이리라.  책에는 <스타워즈의 츄바카>라는 제목의 꼭지가 있다.  갑자기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아들 녀석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새삼 깨달았는데 원숭이 츄바카 캐릭터가 정말로 귀여웠다.  어디가 귀여운가 하면, 츄바카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므고오"라든가 "아구"하는 정도로 대부분 소통을 마친다.  나 역시 그 정도의 단어로 볼일을 보면서 때때로 제국군과 공중전을 하며 인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p.105~p.106)

 

작가는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수필집에서도 그의 관심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음악(특히 재즈), 영화, 소설, 섹스, 애완동물, 마라톤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따금 '하루키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시시한 글들을 쓸까?'하는 생각과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책을 나는 도대체 왜 읽을까?'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하루키의 수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작가도 하루키처럼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예컨대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이 피에트 몬드리안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을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키가 쓴 '쉬워 보이는' 글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신기하다.

 

"특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여름의 에게해는 그야말로 섹스의 도가니 같다.  대낮부터 거리 한복판에서 아베크족들이 위장까지 닿을 정도로 딥키스를 한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동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윅 공항에서 단체로 우르르 몰려오는 영국 펑크 소년소녀들의 기세는 엄청나서, 성기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로큰롤이라도 할 것 같다."    (p.94)

 

그러나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과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벗겨놓고 보면 다 오십 보 백 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도 마음속 밑바탕에는 그런 철학이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그저 '시간 죽이기' 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하루키를 몰라도 한참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는 내내 유쾌한 기분에 휩싸이다가도 다 읽고 나면 문득 심각해지곤 한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면서 무작정 웃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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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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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에게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책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세미나에서 만난 지식인, 혹은 성당의 미사나 사찰의 법회에서 만난 종교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란 놈은 참으로 특이한 족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경계에서 춤추다』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경식 작가와 타와다 요오꼬 작가에게 신뢰를 넘어선 아름다움, 즉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스트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꼬가 열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주고 받았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편지글이 갖는 은근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작가는 '남과 여'라는 이질적인 성별과 10여 년의 나이차가 나는, 속물적 시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들이 나누었던 열가지의 주제에 대해 지성인으로서의 폭 넓은 사색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고한 기품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행'을 주제로 나누었던 두 작가의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툭 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와 더불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p.68 서경식이 타와다 요오꼬에게)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철도에 의한 이동은 육체의 이동입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수천 킬로미터나 옮겨놓는 것이죠.  이것은 이른바 집필활동이 서재 안에 갇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무대예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일본어가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언어를 그 내부에 포함하는 까닭에 온갖 언어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부터 또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운동 자체에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p.75~p.76 타와다 요오꼬가 서경식에게)

 

이 편지들은 재일교포 2세 작가로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서경식 작가와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타와다 요오꼬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글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편지가 마치 서로 다른 악기 두 대가 화합하여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 협주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말입니다. 

 

두 저자의 사유의 방향은 서로 합치 되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생한 소통의 현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의 열가지 주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고 그에 화답하면서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엮여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목소리에 대하여 쓴 타와다 요오꼬의 말은 재밌습니다.

 

"저는 얼굴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음성이나 말할 때의 리듬, 언어 선택 등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언어를 말하면 이미지가 싹 바뀌어버리기도 해서,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싶어 불안해집니다."    (p.130)

국적, 성별, 세대가 모두 다른 두사람이 ‘언어(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두사람이 지니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재일조선인인 서경식은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규정해왔으며, 타와다 요오꼬 역시 일본인 여성 지식인이지만 1982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살아가는 이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어와 투쟁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기를 희망하는 두 작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아름다운 두 지성인의 사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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