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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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의식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두 곳 모두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둘러 메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예컨대 <어둠의 저편>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어둠의 저편>을 소재로 말입니다.  핼리캠을 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의식의 총합은 현실에서의 거대 도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바라볼 때, 개개인의 영역은 너무도 희미하고 작은 것이기에 부분으로서의 개인적 영역은 눈에 띄지도,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한......"     (p.231)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56분입니다.  마리는 지금 도시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건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동창이며, 한때 언니와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기도 했던 '다카하시'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때마침 아버지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다카하시'는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다카하시'는 지금 트럼본 연습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다카하시'는 음대생이 아닌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이지만 트럼본의 매력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악기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그 시각 언니 '에리'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에리'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위만 하면서 두 달째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에리'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에리'만의 생각의 영역, 그 무의식의 세계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리'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에리'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와 약한 체질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에리'는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TV에도 출연하였죠.

 

"하지만 에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고,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돼버렸으니까.  마리의 말을 빌리면, 어엿한 백설공주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 왔던 거지.  확실히 남들이 잘한다 하고 떠받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기라는 개성을 확립해 나갈 수가 없었을 테니까."    (p.179)

 

'다카하시'의 말입니다.  '에리'에 대한 '다카하시'의 분석인 셈이죠.  때로는 가까이 있는 가족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마리'는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카오루'를 만나게 됩니다.  '다카하시'는 이미 지하 연습실로 떠난 뒤였죠.  '알파빌'에서는 그날 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카하시'가 '카오루'에게  '마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 순간 '에리'는 침대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은 어떤 풍경도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에리'는 그 공간에서 잠이 깹니다.  그러나 이곳, 즉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는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만 보일 뿐이죠.

 

'마리'는 중국인 매춘부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알파빌'에는 '카오루'와 같이 일하는 '고오로기'가 있습니다.  귀뚜라미라는 뜻의 그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회사원이었던 '고오로기'는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러브호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을 전전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죠.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 '카오루'는 스카이락'에서 음료를 대접합니다.  중국인 매춘부를 때리고 옷과 소지품을 탈취한 범인은 평범한 회사원인 사리가와입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언니 '에리'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다카하시'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리'가 있는 '스카이락'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공원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마리'는 다시 '알파빌'로 자리를 옮겨 '고오로기'와 대화를 합니다.  '고오로기'로부터 들었던 인상깊은 말이 있군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아,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35)

 

연습을 마친 '다카하시'는 '마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제 어둠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데이트 요청을 하는 '다카하시'에게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긴 편지를 쓰겠노라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언니 '에리'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던 어린 시절의 언니 '에리'는 '마리'의 의식에서도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자각합니다.  '마리'는 언니의 침대에 같이 누워 눈물로 호소합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오전 6시 52분입니다.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작인 <어둠의 저편>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점도 그렇고, 카메라의 영상이 바뀌는 것과 같은 화면 전환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의 단절과 개개인의 고독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카하시'와 '마리'의 만남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의식의 공유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둠이 다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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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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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감나무의 잎사귀로부터 진한 생명력을 느꼈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설마 죄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바흐의 '영국조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마치 봄 햇살에 겨워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은사시나무 잎새의 떨림 같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조용한 하루.  아,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들 그렇게 부르는)'불금'입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두 번 읽었습니다.  머리가 나쁜 탓이죠.  꼼꼼히 읽는다고 했는데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 훌훌 넘기며 다시 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번째는 필요한 부분만 읽고 지나쳤으니 한 번 반쯤 읽은 셈입니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의 편지들을 엮은 서간집입니다.  아마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을 여러 번 접하셨을 줄 압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정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친숙한 이름이 되더군요.  하루키는 심지어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잘 모르는(어쩌면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때로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솔직하다는 건 결국 모든 오해를 감수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챈들러가 그의 독자, 여러 작가, 편집자, 기자, 감독 등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 68편을 골라 엮었습니다.  거침없는 비판과 독설, 그만의 위트와 유머, 30년을 해로한 아내의 죽음에 맞선 사랑 등 서간집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많은 동정과 위로와 편지들을 받았지만 당신의 편지는, 게속되고 있는 상대적으로 쓸모없는 삶을 위로하기보다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삼십 년 동안 내 심장박동이었지요.  정말로 아내에게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아내에게 헌정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못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후회이자 이제는 해 봤자 소용없는 후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책을 쓰려고 했죠.  생각은 했지만, 쓰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216~p.217)

 

책의 구성은 챈들러의 작품론을 모아 놓은 1장과 다양한 작가들에 대해 논하는 2장, 할리우드 시절을 담은 3장, 그의 작품에서 탐정 캐릭터로 유명한 필립 말로에 대해 말하는 4장, 그의 아내와 고양이 등 일상을 담은 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1장의 작품론 부분을 읽으면서 챈들러 자신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얻은 지혜란,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일 뿐이라는 믿음과 상통하니까요."     (p.37)

 

"나는 돈이나 어떤 특권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 때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상한 미련 때문에 글을 쓰는 거죠.  사람들이 치밀하게 생각하고 거의 사라진 문화의 언어로 말을 하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좋습니다."    (p.194)

 

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은 '챈들러의 생각은 어쩌면 그만의 스타일로 남을지도 모르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평범함이란 너무도 익숙하고 벗어나기 힘든 유혹이어서 만일 누군가가 그동안 나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어떤 것을 말할 때, 그 사람은 그저 나보다 우월하다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말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방식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말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가 속한 영역의 밖에 홀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채.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p.171)

 

사실 이 책은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 지망생이 읽어야 할 책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그곳으로부터 끝없이 탈출하고자 했던 유명 추리소설 작가의 삶의 기록이자, 자신만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던 자유인의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챈들러 스타일은 작가 챈들러의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는 조금 다른, 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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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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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혼한 친구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이혼한 전 부인에 비하면 미모나 교양이 형편없다는 둥 나은 게 있다면 젊다는 것뿐이라는 둥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한참을 찧고 까불다가 다들 제풀에 지쳐 스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재혼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즘 재혼한 커플이 한두 쌍일까마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 또한 이상한 놈으로 몰릴 분위기였다.

 

남자에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수태능력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나이가 들면 순간순간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큼 나이가 든 남자에게는 미모나 능력보다는 상대방의 젊음, 즉 생명력이 먼저 눈에 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재혼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풍화된 자만심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질료로 화(化)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자만심이 강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자만심만은 굽히지 않았다.  그 절정은 아마도 대학시절이었겠지.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자 산처럼 솟았던 자만심은 하루가 다르게 깎여나갔었다.  그리고 나 이외의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가볍고 유쾌한 책이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사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잔뜩 무게를 잡고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하게 마련이지 작가처럼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떨며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문득 불쌍하게 보였다.  단순하고 경직된, 그러면서도 변화가 없고 늘 비슷한 모습의 삶.  그게 남자들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그중에는 젊은 여성들에게만 나눠주는 휴대용 티슈나 전단도 있다.  광고 대상이 그렇게 한정된 것이리라.  나눠주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파 속에 서서 '이 사람, 줘야 할 사람, 저 사람 주지 않아도 될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 앞을 지날 때, 나는 매번 시험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불과 3,4년 전까지는 떠맡기듯이 해서 받았던 티슈였는데 지금은 거들떠봐주지도 않는다.  내 마흔두 살의 외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52~p,53)

 

이따금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짠해지는 느낌이 든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우울한 느낌만 울컥울컥 솟는다.  사랑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믿다가도 어느 날 길거리에서 거침없이 뽀뽀를 하는 연인이라도 만날라치면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버릇없는 것들.'하고 괜한 심술에 욕부터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웬간히 나이를 먹었나 보다 느낀다.

 

"대화에 꼭 노후를 소재로 넣는 것은 웃어넘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도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도 장래는 있다.  연금은 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소비세도 오를 것 같은데.  병에 걸리면 어쩌지......  이것저것 불안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전철을 앞두고 가까운 역에서 헤어질 때는 다음달 열리는 불꽃놀이 대회 일정을 서로 확인하는 우리였다."    (p.197~p.198) 

 

언젠가 나는 공원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어르신들을 본 적이 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별로 신통치도 않은 옛날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말하고 그 얘기를 또 골똘히 듣고 있었다.  그분들이 서로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아마도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를 그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분들처럼 먼 과거를 현재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가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는 그 두려움, 민망함, 미안함, 고마움, 기쁨, 과분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다."    (p.181)

 

즐겁게 나이든다는 것(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은 작가처럼 나이를 잊고 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으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심각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하루하루즐 즐기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리라.  작가 마스다 미리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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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5-08 12:36   좋아요 0 | URL
전 여자라 그런지 완전 공감했어요

꼼쥐 2014-05-08 19:54   좋아요 0 | URL
그러셨을 것 같아요.
저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지만.
 
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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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문제를 타인의 손에 의존하면서부터 현대인의 질병은 깊어진 듯하다.  나는 그것을 '중독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중독'은 비단 담배나 마약, 또는 술과 같은 직접적이고도 인식 가능한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종교, 성형, 범죄, 섹스, 권력, 허세, 게임, 사치, 독서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양상은 다양하고도 포괄적이다.

 

나는 주변에서 종교에 중독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들은 마치 신의 숨결이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현실의 상처들이 말끔히 해소될 것만 같은 상상 속에서 종교를 믿는다.  알량한 헌금이나 시주의 대가로 그들이 얻는 상상의 쾌감은 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그 효력은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이 믿는 종교 신전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중독'은 무한반복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결코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독서도 일종의 중독으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서는 모름지기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쉽게 중독으로 이어진다.  자기 계발서에 대한 탐닉이 좋은 예이다.  현실의 습관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자기 계발서만 읽는 사람들은 대개 독서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책만 읽음으로써 이사로 승진하거나, 억만장자가 된다거나, 토익 만점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현대인에게 좋은 책이란 무엇보다도 중독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상상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동아줄, 그것이 바로 책이어야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책의 진정한 효용이 아니겠는가.  문학 평론가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는 내가 생각하는 책의 효용에 걸맞는 책이다.  280여 쪽에 이르는 보통의 두께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으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지 싶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너무 아파, 한참을 망설이다 늦어진 답장은 이렇다.  인생을 확 바꾸는 책은 없지만, 인생을 확 바꾸는 절실한 물음은 있다고.  당신이 그 질문을 시작한 그 순간, 인생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고.  머리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채 연못을 찾는 심정으로, 내게 맞는 책을 찾는다면, 내게 전혀 안 맞는 책조차 커다란 스승이 된다고."    (p.11)

 

맞는 말이다.  나는 저자의 말에서 책은 곧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의 고통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뒤돌아서거나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인내심, 상실의 고통마저 의연히 감수하며 먼먼 세월의 뒤안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책이란 본디 그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그랬지만 세월호의 참사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니다.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기력해지는 모습은 부끄럽다.  슬픔을 안으로 갈무리한 채 의연하고도 강건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오래전에 다 읽었었고 최근에 다시 꺼내어 읽었다.  말하자면 두 번을 읽은 셈인데 그래도 뭔가 확연히 떠오르거나 손에 확실히 쥐어지는 게 없다.  책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내 능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애도와 우울>에 따르면, 대상의 상실로 인한 우울증이 여타의 슬픔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애심의 추락'이라고 한다.  대상의 상실을 곧 자아의 상실로 인식하면서, 타인은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리는 것이 우울증의 치명적 위험이다.  슬픔의 경우는 세상이 빈곤해지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자아가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 생각하는 순간, 우울의 칼날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  급기야 '누군가 나를 처벌해주었으면'하는 망상에 빠지면서, 고통이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자발적으로 떠나기까지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자원하는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p.81)

 

세상의 모든 '중독 현상'의 기저에는 고통이나 불편한 심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그 힘을 배양하는 데 있다.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가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우리에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끝없이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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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리턴드 The Returned
제이슨 모트 지음, 안종설 옮김 / 맥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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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지난 인생이 남들보다 더 혹독했다거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을 건너뛴 다른 시공간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좋을 뿐이다.

 

제이슨 모트의 소설 <더 리턴드(The returned)>는 죽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는 상황을 가정하여 쓴 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벗어나기 힘든 감정이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게 마련이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삶의 의미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상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카디아는 미국에 있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그곳에는 일흔이 넘은 노부부 루실과 해럴드가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이콥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이콥은 1966년 여덟 살 생일에 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제이콥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들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이렇듯 평온했던 부부의 삶을 뒤바꾼 것은 아들 제이콥이 여덟 살의 나이로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악마 - 그들의 특정한 악마 - 가 눈물이 글썽이는 갈색 눈동자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부모와 헤어져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온 아이 특유의 안도감을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작고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그들의 현관 앞에 나타났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살아난 루실의 단단히 닫혔던 마음은 사무국에서 나온 잘 차려입은 남자 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p.21)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이 세상으로 귀환하는 것은 비단 제이콥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귀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이 전대미문의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또한 그 누구도 왜,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이 기적인지, 또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급기야 국제 귀환자 사무국이 결성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귀환자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아카디아의 초등학교에 귀환자들을 모아 놓고 감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귀환자 수용소가 세워진 셈이다.  해럴드는 어린 제이콥을 수용소에 혼자 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자청하여 수용소에 남는다.  그 순간에도 귀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새로운 귀환자들은 사무국 요원들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귀환자의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갈등도 심해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은 제이콥이 1966년 8월의 그 여름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이 말을 하면, 내 귀는 그가 내 아들이라고 말해.  내 눈도 마찬가지고.  그 오래전, 까마득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해럴드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p.222)

 

귀환자 사태는 세상이 의도하고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와 제이콥이 떠난 빈집에 홀로 남은 루실은 그들을 위해 매일 음식을 준비하여 날랐다.  그러던 중 1963년에 죽었던 윌슨 일가족이 귀환하여 루실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  윌슨 일가는 루실과는 먼 친척뻘이었다.  귀환자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귀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수용되지 않은 귀환자도 증가하면서 산 사람들과의 마찰은 점차 심해졌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귀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렇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정부도, 성직자도, 과학자도, 그 누구도.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다.  귀환자의 가족이면서 귀환자에게 우호적인 해럴드 가족,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무국 요원 벨러미와 윌리스 대령, 성직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피터즈 목사, 정상인들을 지지하며 귀환자를 적대시 하는 프레드 그린 등.  나는 소설의 뒷부분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설일 뿐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이야기.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어떤 것들이 한순간에 뒤바뀌었을 때의 혼란과 갈등, 그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과 비열함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들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정부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적의 치료법을 제시해야 하고, 필요하면 단호한 군사조치라도 취해야 한다."    (p.80)      

 

우리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다만 모름으로써 죽음을 그저 수용할 뿐이다.  예컨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만약 우리가 상상하는 지상천국이라면  현실의 삶을 서둘러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고, 만일 그것이 불구덩이 속의 지옥이라면 사는 내내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모름으로써 기대와 공포의 중간자적 입장에 놓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절묘한 신의 한 수이다.  그렇다면 죽었던 자의 생환은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작가 제이슨 모트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난제를 던져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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