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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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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단순히 놀이나 유희가 아닌 단지 효용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독서에 대한 흥미는 반쯤 잃게 된다. 내가 지금보다 더 젊거나 어렸던 시절에 독서는 그저 생활의 일부라고 여겼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거나 외롭다거나 이유도 없이 슬프다거나 할 때 책은 말없는 위로였고, 가까운 친구였고, 때로는 기분전환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 어떤 책을 읽어야지 작정하지 않았고 읽을 책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지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비스듬한 사면을 따라 빠르게 구르는 동안 나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내 손에 쥐어졌던 행복한 기억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여행작가 변종모의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단편적인 생각들과 지나치게 감상적인 여행자의 애수 또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조각조각 이어 붙인 지극히 개인적인 글들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과거의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서도 가끔씩 등장하는 멋진 문장에 감탄하거나 때로는 애수어린 문장에 찔끔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만큼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이었다.

 

"생략과 축축한 침묵. 그 안에 나머지를 남기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제 모든 걸 담아두는 사람이 있다. 타인에 의해 눈물 흘리는가? 타인을 위해 눈물 흘리는가? 자신에 의해 눈물 흘리는가?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가? 눈물은 너의 마지막 언어.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모스부호. 너를 위해 밖으로 울고 나를 위해 안으로 운다." (p.172)

 

도무지 쓸모가 떠오르지 않는 책은 읽는 데 오래 걸린다. 기준이 하나여서 그렇다. 여러 갈래의 시골길을 오랜 세월 잊고 지낸 까닭이지만 옆 시선을 가린 경주마처럼 오로지 앞만 보인다. 삶은 셀 수도 없이 다양하고 이따금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어야 하겠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읽고 있다. 이렇게 힘든 책은(책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읽어내지 못하는 내가 문제이겠지만) 하나하나의 낱글자도 마치 여행서적의 화려한 풍경처럼 하나의 정지된 화면, 쉽게 잊혀지는 풍경처럼 읽힌다.

 

읽는 속도에 시간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머릿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우개가 기억의 옅은 흔적들을 지우고 있다. 말끔하게. 그럼에도 작가는 내 마음을 조금만 알아달라는 듯 열심히 말을 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말들', '내 안의 말들', '길 위에 두고 온 말들'이 그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 둔 말들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공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다만 말하고 싶었을 뿐.

 

"나를 먼저 속이고 네가 내게 속아주길 바라는 일은 양심을 따지기 이전에 죄책감부터 드는 일이었다. 한 번 쏟은 물을 다시 담는 일과 한 번 날아간 화살을 되돌리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한 것처럼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겨안은 기분이기도 하다. 부풀 대로 부풀고 불 대로 불어버린 왜곡과 거나해질 대로 거나해져 과장된 말들은 너와 나 사이에 벽을 치고 그 벽 앞에 다시 금을 긋는 일이었다." (p.325)

 

무더위에 지친 어느 여름날 그저 스쳐가는 바람도 마냥 반갑듯이 사람은 때로 내 가슴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도 반가울 때가 있다. 내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지 않은들 또 어떤가. 바람처럼 네 가슴을 비껴간들 네 우울과 슬픔을 조금쯤 걷어낼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잊혀질 말들도 지금 이 순간 네 가슴을 적실 수만 있다면 가슴에 남는 의미가 없다 한들 또 어떠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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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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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과 한국 소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독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는 듯하다. 일본 소설은 대체로 책을 읽는 독자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려는 데 주안점을 둔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의 인터뷰에서 여러번 강조했듯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자신의 책을 읽으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것이 일본 작가들의 공통된 목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한국 작가들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하다. 독자들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은 때로는 부담스럽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두 나라의 민족적 정서에서 기인하겠지만 전통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절충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일본 소설은 다 좋고 한국 소설은 다 나쁘다는 이분법적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소설의 가벼움이나 지나친 선정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게다가 한국 문학도 많이 변해서 신세대 작가의 소설은 일본 소설 못지 않게 유쾌하고 읽는 재미가 가득하다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독자층이 얇은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유명 작가의 명성에 눌려 신진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쓰다 보니 얘기가 엉뚱한 쪽으로 빗나갔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공중그네』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말이다. 『공중그네』에 대한 평은 여러 경로로 들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와 인연이 닿지는 않았었다.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이나 거부감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껏해야 무라카미 하루키나 텐도 아라타의 소설만 읽었을 뿐 다른 일본 소설가의 작품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 소설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도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작품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나는 처음 읽은 셈이다.

 

『공중그네』는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소설이다. 표제작인 <공중그네>를 비롯하여 ,<고슴도치>, <장인의 가발>, <3루수>, <여류작가>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31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던 이 소설은 기획자, 잡지 편집자, 카피라이터, 구성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작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통하여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비애와 고통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10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한 거구의 이라부는 자신의 외모와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름으로써 병원을 찾는 환자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다. 공중그네를 타는 베테랑 서커스 단원의 강박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마 같은 몸으로 직접 공중그네 서커스에 도전하기도 하고, 선단 공포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중간보스를 위해 야쿠자들의 담판 현장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갖은 훈수를 두기도 하고, 일탈충동에 시달리는 의대 동창생과 의기투합하여 육교에 기어 올라가 이정표를 슬쩍 고쳐놓고 도망치는가 하면 결국에는 동창생 장인의 가발을 벗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프로 야구선수를 위해 야구 동호회에 가입하여 환자와 동일한 포지션인 3루수를 자청하기도 하고, 심인성 구토증이 있는 여류작가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쓴 형편없는 글을 출판하겠다며 되지도 않는 생떼를 쓰기도 한다. 이라부의 치료방법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 각각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다양한 환자들을 대할 때 환자와 의사로서가 아닌, 어설프고 서툴더라도 그 직업군에 동참함으로써 실수연발의 자신의 모습을 환자에게 직접 보여주곤 한다. 환자는 천진난만한 이라부를 결코 미워할 수 없다. 그와 한동안 시름을 잊고 어울림으로써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치유되는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위한 ‘이라부’식 처방전인 셈이다.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모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어제 사쿠라가 한 말이 큰 격려가 되었다. 반성도 했다. 자신의 작은 그릇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심각한 일들에 비하면 작가의 고민 따위는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아이코는 진찰실을 나왔다. 여기 오길 잘한 거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마음은 편해졌으니까." (p.304 ~ p.305)

 

살다보면 누구나 자신이 가장 힘들고 불쌍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라부는 개별적인 삶의 무게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체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인생을 항상 무겁고 진지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가끔은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처럼 실수해도 된다고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에 프로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놓아주는 비타민 주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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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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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는 누군가 끊임없이 걸었던 마음 발자국들로 가득합니다. 길이 없어 더 길다웠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기약도 없이 기다렸던 적이 있나요? 그 많은 그리움들이 소리도 없이 소복소복 쌓여갑니다. 하여, 하늘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허공의 어느 곳에 내 자신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심란했던 어느 날, 실체가 없는 허공에 무심한 눈길이 닿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주히 다녀갔던 누군가의 마음길을 묵묵히 걸어본 것일 테지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으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히말라야였을까? 전문 산악인도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환상종주(Annapurna Circuit)를 여행 초짜였던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시작한 것일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까닭을 누군가에게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잃고 헤매일 때 육신의 고통을 잊고 오롯이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곳은 히말라야가 유일하겠지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에서 육체의 고통은 다만 고양된 영혼의 승화로 이어져 선명한 마음길을 미끄러지듯 내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 사남매의 맏이였던 내겐 몇 가지 금기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무서워요, 못해요. 어머니는 내게 '강인함'을 요구했다. 상처를 받아도, 슬픈 일이 생겨도,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 없이 이겨내기를 바랐다. 죽는시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자존심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은 내 인생을 통제하는 정언명령이 됐다. 히말라야 산속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p.48 ~ p.49)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김혜나 작가와 함께 떠난 안나푸르나 환상종주 17일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회상하고 있습니다. 전문 이야기꾼답게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일정에 적절한 위트와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어느 여행기에서나 등장하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이나 애수, 기족이나 연인에 대한 그리움 등 끈적끈적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던 이야기, 일정 내내 변비에 시달렸던 이야기, 일정에 쫓겨 혹은 현지 사정에 의해 세수도 거른 채 일정을 소화했던 경험, 고산병으로 착각하여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일화 등 여행에 서툰 작가의 일상이 세세하게 드러납니다.

 

최대 난관이었던 해발 5416미터의 쏘롱라패스(Thorung La Pass)를 오르는 과정은 마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나는 '작가는 과연 오를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과 조바심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입담과 재치있는 유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그러나 이따금 등장하는 그녀의 가족사와 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쏘롱라패스에 올랐던 작가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혜나가 먼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몸을 돌리고 발아래 설산들을 바라보았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쿵 울고 있었다. 기적 같았다. 이 고갯마루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이. 새벽녘에 찾아든 사자의 손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승민이만큼 자유로웠다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게.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행복했다. 양팔에 설산들을 끌어안고 트위스트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p.186)

 

세상과 맞설 힘을 얻기 위해 안나푸르나를 택했다는 작가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자꾸 희미해져만 가는 자신의 마음길을 선명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극한의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잠시만이라도 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뚫고 내 온전한 마음이 하늘에 닿게 하는 것, 그 망망한 허공에 나만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이토록 후진 자질로, 극단적인 두 성질의 충돌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기나긴 어둠을 어찌 통과했는지 스스로 신통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울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노는 일마저 훈련해서 노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정전 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내 판단에는 그랬다." (p.132 ~ p.133)

 

나는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작가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마다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네 삶에서 인생은 때로 용량초과의 과도한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극복하라고 모진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요.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후기(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떠났던 '안나푸르나 환상 독서'가 끝난 셈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만의 마음길을 닦지 못한 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없이 방황하면서 말이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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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6-09 00:3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정말 멋진 곳이지요... 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가봤는데(랑탕계곡), 아쉽게도 안나푸르나는 포카라의 사랑곳 전망대에서 먼발치로 '마차푸차레(6,993m)'만 구경하고 내려왔답니다. 언제 또다시 히말라야를 가게 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되면 그땐 꼭 안나푸르나로 갈 생각입니다.(작년에 함께 히말라야에 갔던 몇몇 친구들과는 내후년에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년에 세 번째로 또 히말라야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요. 그 친구가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올랐던 코스가 바로 이 책의 작가가 다녀온 코스와 똑같네요. 그 친구는 그 길을 홀로 21일 동안 걸었다고 하더군요.)

꼼쥐 2014-06-10 18:0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제 주변에도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이 몇몇 있는데 다들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부러운 마음에 다녀오고는 싶지만 현실을 핑계로 포기하곤 했었죠. 이 책을 읽고나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드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2014-06-2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7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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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예측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의 빈 공간(만약 있다면)에 동전이 쌓이는 것처럼 부피를 늘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평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조금쯤 과도한(그렇다고 생각되는) 통행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밋밋하고 심심해 할까 봐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개빈 익스텐스가 쓴《우주 vs. 알렉스 우즈》는 돼지저금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깜처럼 뭔가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뭐랄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배제한 채 독자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만을 옮긴 듯한, 다소 시니컬하고 간결한 문체로 465페이지의 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빈 익스텐스는 비록 30대 중반의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소설은 알렉스(이 소설의 주인공)가 열 살이었을 때 벌어진 일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의 집 천장을 뚫고 들어온 2킬로그램짜리 운석에 머리를 맞은 알렉스는 수술을 받고 2주만에 가까스로 깨어난다.  그 후 알렉스는 간헐적 간질을 앓게 되고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알렉스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싱글맘인 그의 어머니는 타로 점을 보거나 그것과 관련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몇 년 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알렉스는 동네의 불량배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따르는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은 달랐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엄마의 규칙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건, 앞뒤가 맞건 안 맞건 상관없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장차 내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이었다.  내가 간질을 앓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엄마는 내가 뒤쳐져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고, 우리 주의 어떤 학교도 내 입학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p.101)

 

어느 날 하굣길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피해 달아나던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으로 뛰어든다.  알렉스를 찾지 못한 불량배들은 피터슨 씨 집의 온실 유리를 부수고 알렉스는 속죄의 대가로 피터슨 씨의 편지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피터슨 씨는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로서 아내를 잃고 은둔자적 삶을 사는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작가는 우연과도 같았던 알렉스와 피터슨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카오스로 가득한 한 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하려 한다.  이 순간 덕분에 생각하게 됐다.  보기에 따라 인생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또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다음의 이야기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p.112)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빌려 읽게 된다.  그러던 중 버스 안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다시 만났고, 알렉스가 읽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희귀 초판본이 그들 중 한 명에 의해 버스 밖으로 내던져진다.  알렉스는 그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알렉스는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공부에만 몰입한다.  어느 날 피터슨 씨의 애완견 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알렉스는 처음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애완견 커트가 죽은 후 피터슨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었던 알렉스는 <커트 보네거트 세속 교회>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만든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락을 적어와 피터슨 씨의 집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보관하던 운석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나온 피터슨 씨를 만나 함께 귀가하던 중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피터슨 씨는 놀랍게도 진행성핵상마비. 신경이 점차적으로 마비되는 희귀한 퇴행성 질환으로, 아저씨는 이제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열네 달 동안의 독서 모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할 말이 있어 다시 들렀다가 자살을 시도한 피터슨 씨를 만난다.  알렉스의 신고로 되살아난 피터슨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알렉스는 피터슨 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줄곧 대마를 직접 재배하여 마리화나를 피워왔던 피터슨 씨를 대신하여 알렉스는 대마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피터슨 아저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피터슨 아저씨의 몸은 점점 쇠락하여 가고 알렉스가 약속했던 스위스로 향하는 여정을 결행할 즈음 아저씨는 바닥에 넘어져 다시 입원한다.

 

병원으로부터 피터슨 아저씨의 퇴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빠져 나온다.  피터슨 아저씨를 차에 태워 스위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고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가 죽기 전 스위스 세른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다.  '과학 혁신 전시관'에서 알렉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별난' 입자의 수명을 생각하고,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하고, 우주가 마지막 열적 종말(모든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이 증발하고 모든 핵자가 붕괴하고, 기본 입자만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 속을 떠다니는 순간)을 겪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진다."    (p.429)

 

병원의 신고로 알렉스는 영국 방송사의 뉴스 메이커가 되고 피터슨 아저씨의 유골을 차에 싣고 귀국하던 중 경찰에 의헤 체포된다.  그러나 알렉스는 무사히 석방되어 열여덟 살 생일에 피터슨 씨가 남긴 유언장에 의해 5만 파운드의 상속금을 받는다.

 

"나는 피터슨 씨가 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엘리에게 편지를 넘겼다.  엘리는 울지 않았다.  편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면서 내게 돌려주었다."    (p.464)

 

도서관에 들러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을 빌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인연이 되지 않았을 소설.  어쩌면 내 삶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낯선 이름이 우연처럼 내 삶을 파고들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손쉽고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내가 던진 동전이 언젠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내 기억을 깨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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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외인구단 - 곧 죽어도 풀스윙, 힘 없어도 돌직구
류미 지음 / 생각학교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일에 매인 몸이라 여행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어떤 여행이 기억에 남는 멋진 여행이었던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 이를테면 일정도 목적지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훌쩍 떠났던 여행이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중학교 시절 비상금도 한푼 없이 친구들과 함께 갔었던 어느 해수욕장, 대학 시절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를 몰았던 경춘국도, 결혼 전 아내와 함께 탔던 어느 시외버스...

 

생각할수록 아련한 그리움이 물 밀듯 밀려옵니다.  이제 겨우 인생의 반쯤 지나온 제가 인생을 논한다는 건 우습지만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삶이라는 시간 열차에 훌쩍 뛰어 오를 수 있는 용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딴에는 꼼꼼히 준비한답시고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수선을 떨다가 결국에는 여행의 첫머리부터 진이 뻐져 여행다운 여행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신경정신과 의사 류미가 쓴 <동대문 외인구단>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입니다.  책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서울 동대문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중학생 선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한 '푸르미르 야구단'의 활동 보고서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쓸쓸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휠체어를 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푸르미르 야구단'의 멘탈 코치로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가기 싫고, 공부도 싫고, 특별히 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들과 함께 야구라는 스포츠에 동승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편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문으로 읽혔습니다. 

 

"누군가 야구는 인생과 닮았다고 했다.  푸르미르야구단 아이들은 후반기는커녕 아직 전반기도 시작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있을 뿐.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 아이들을 2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102)

 

학창시절은 인생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훈련에 지쳐 정작 본 게임에는 참가도 못한 채 쓸쓸히 퇴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기에 참가는 했지만 경기를 즐길 여유도 그럴 기분도 아니라면, 또는 스프링캠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이기는 방법만 습득했다면 스프링캠프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우리 기성세대는 과연 그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며, 어떤 책일을 져야 하는지...

 

"선생님, 저는 즐겁게 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충격이었다.  나는 '즐겁게 진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는 데 즐거운 것도 있나?  쿨한 어른이고 싶어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쓴다고 자평했는데, 내 머릿속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교육제도가 심어둔 승패, 위계 같은 것에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유주에게 점점 조여오는 승부의 긴장감은 어쩌면 짐이 될지도 모르겠다."    (p.263)

 

나는 인생의 본 게임을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어린 학생들을 무수히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물론 나뿐만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고단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변화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어른들도 보았습니다.  나는 예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올 3월, 나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어떤 아이라도, 성적이 꼴찌이거나 사람들이 다 욕하는 아이일지라도 마음속에는 빛나는 별 하나가 있다는 생가, 철없다고 할지 몰라도 푸르미르야구단을 마치고 나서 이 생각은 더 강해졌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의사에게 아이들이 준 선물이다."    (p.316)

 

준비도 없이 떠났던 여행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이 조금 고되고 힘들지라도 그 낯섦과 불편함을 온전히 즐길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초라하거나 허망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내가 준비없이 떠났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어느 멋진 여행의 추억처럼 우리네 삶도 그렇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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