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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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측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의 빈 공간(만약 있다면)에 동전이 쌓이는 것처럼 부피를 늘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평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조금쯤 과도한(그렇다고 생각되는) 통행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밋밋하고 심심해 할까 봐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개빈 익스텐스가 쓴《우주 vs. 알렉스 우즈》는 돼지저금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깜처럼 뭔가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뭐랄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배제한 채 독자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만을 옮긴 듯한, 다소 시니컬하고 간결한 문체로 465페이지의 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빈 익스텐스는 비록 30대 중반의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소설은 알렉스(이 소설의 주인공)가 열 살이었을 때 벌어진 일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의 집 천장을 뚫고 들어온 2킬로그램짜리 운석에 머리를 맞은 알렉스는 수술을 받고 2주만에 가까스로 깨어난다.  그 후 알렉스는 간헐적 간질을 앓게 되고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알렉스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싱글맘인 그의 어머니는 타로 점을 보거나 그것과 관련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몇 년 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알렉스는 동네의 불량배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따르는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은 달랐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엄마의 규칙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건, 앞뒤가 맞건 안 맞건 상관없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장차 내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이었다.  내가 간질을 앓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엄마는 내가 뒤쳐져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고, 우리 주의 어떤 학교도 내 입학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p.101)

 

어느 날 하굣길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피해 달아나던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으로 뛰어든다.  알렉스를 찾지 못한 불량배들은 피터슨 씨 집의 온실 유리를 부수고 알렉스는 속죄의 대가로 피터슨 씨의 편지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피터슨 씨는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로서 아내를 잃고 은둔자적 삶을 사는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작가는 우연과도 같았던 알렉스와 피터슨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카오스로 가득한 한 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하려 한다.  이 순간 덕분에 생각하게 됐다.  보기에 따라 인생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또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다음의 이야기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p.112)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빌려 읽게 된다.  그러던 중 버스 안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다시 만났고, 알렉스가 읽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희귀 초판본이 그들 중 한 명에 의해 버스 밖으로 내던져진다.  알렉스는 그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알렉스는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공부에만 몰입한다.  어느 날 피터슨 씨의 애완견 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알렉스는 처음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애완견 커트가 죽은 후 피터슨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었던 알렉스는 <커트 보네거트 세속 교회>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만든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락을 적어와 피터슨 씨의 집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보관하던 운석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나온 피터슨 씨를 만나 함께 귀가하던 중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피터슨 씨는 놀랍게도 진행성핵상마비. 신경이 점차적으로 마비되는 희귀한 퇴행성 질환으로, 아저씨는 이제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열네 달 동안의 독서 모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할 말이 있어 다시 들렀다가 자살을 시도한 피터슨 씨를 만난다.  알렉스의 신고로 되살아난 피터슨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알렉스는 피터슨 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줄곧 대마를 직접 재배하여 마리화나를 피워왔던 피터슨 씨를 대신하여 알렉스는 대마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피터슨 아저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피터슨 아저씨의 몸은 점점 쇠락하여 가고 알렉스가 약속했던 스위스로 향하는 여정을 결행할 즈음 아저씨는 바닥에 넘어져 다시 입원한다.

 

병원으로부터 피터슨 아저씨의 퇴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빠져 나온다.  피터슨 아저씨를 차에 태워 스위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고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가 죽기 전 스위스 세른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다.  '과학 혁신 전시관'에서 알렉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별난' 입자의 수명을 생각하고,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하고, 우주가 마지막 열적 종말(모든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이 증발하고 모든 핵자가 붕괴하고, 기본 입자만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 속을 떠다니는 순간)을 겪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진다."    (p.429)

 

병원의 신고로 알렉스는 영국 방송사의 뉴스 메이커가 되고 피터슨 아저씨의 유골을 차에 싣고 귀국하던 중 경찰에 의헤 체포된다.  그러나 알렉스는 무사히 석방되어 열여덟 살 생일에 피터슨 씨가 남긴 유언장에 의해 5만 파운드의 상속금을 받는다.

 

"나는 피터슨 씨가 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엘리에게 편지를 넘겼다.  엘리는 울지 않았다.  편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면서 내게 돌려주었다."    (p.464)

 

도서관에 들러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을 빌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인연이 되지 않았을 소설.  어쩌면 내 삶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낯선 이름이 우연처럼 내 삶을 파고들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손쉽고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내가 던진 동전이 언젠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내 기억을 깨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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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외인구단 - 곧 죽어도 풀스윙, 힘 없어도 돌직구
류미 지음 / 생각학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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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매인 몸이라 여행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어떤 여행이 기억에 남는 멋진 여행이었던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 이를테면 일정도 목적지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훌쩍 떠났던 여행이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중학교 시절 비상금도 한푼 없이 친구들과 함께 갔었던 어느 해수욕장, 대학 시절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를 몰았던 경춘국도, 결혼 전 아내와 함께 탔던 어느 시외버스...

 

생각할수록 아련한 그리움이 물 밀듯 밀려옵니다.  이제 겨우 인생의 반쯤 지나온 제가 인생을 논한다는 건 우습지만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삶이라는 시간 열차에 훌쩍 뛰어 오를 수 있는 용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딴에는 꼼꼼히 준비한답시고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수선을 떨다가 결국에는 여행의 첫머리부터 진이 뻐져 여행다운 여행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신경정신과 의사 류미가 쓴 <동대문 외인구단>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입니다.  책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서울 동대문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중학생 선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한 '푸르미르 야구단'의 활동 보고서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쓸쓸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휠체어를 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푸르미르 야구단'의 멘탈 코치로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가기 싫고, 공부도 싫고, 특별히 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들과 함께 야구라는 스포츠에 동승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편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문으로 읽혔습니다. 

 

"누군가 야구는 인생과 닮았다고 했다.  푸르미르야구단 아이들은 후반기는커녕 아직 전반기도 시작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있을 뿐.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 아이들을 2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102)

 

학창시절은 인생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훈련에 지쳐 정작 본 게임에는 참가도 못한 채 쓸쓸히 퇴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기에 참가는 했지만 경기를 즐길 여유도 그럴 기분도 아니라면, 또는 스프링캠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이기는 방법만 습득했다면 스프링캠프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우리 기성세대는 과연 그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며, 어떤 책일을 져야 하는지...

 

"선생님, 저는 즐겁게 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충격이었다.  나는 '즐겁게 진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는 데 즐거운 것도 있나?  쿨한 어른이고 싶어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쓴다고 자평했는데, 내 머릿속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교육제도가 심어둔 승패, 위계 같은 것에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유주에게 점점 조여오는 승부의 긴장감은 어쩌면 짐이 될지도 모르겠다."    (p.263)

 

나는 인생의 본 게임을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어린 학생들을 무수히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물론 나뿐만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고단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변화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어른들도 보았습니다.  나는 예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올 3월, 나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어떤 아이라도, 성적이 꼴찌이거나 사람들이 다 욕하는 아이일지라도 마음속에는 빛나는 별 하나가 있다는 생가, 철없다고 할지 몰라도 푸르미르야구단을 마치고 나서 이 생각은 더 강해졌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의사에게 아이들이 준 선물이다."    (p.316)

 

준비도 없이 떠났던 여행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이 조금 고되고 힘들지라도 그 낯섦과 불편함을 온전히 즐길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초라하거나 허망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내가 준비없이 떠났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어느 멋진 여행의 추억처럼 우리네 삶도 그렇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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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
레이첼 사이먼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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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처럼 뜨거웠던 날씨가 뭉근하게 풀어지는 시간입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하루였어요.  내 속에 감춰진 모든 감정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시라도 하려는 듯 감정 절제가 맘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날씨 탓이려니 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인간의 성숙도라는 게 고작 이것이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레이첼 사이먼의 <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를 꺼내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후다닥 읽었던 탓에 마치 오늘 처음으로 읽는 책처럼 새롭습니다.  작가 레이첼 사이먼이 자신과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동생 베스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처럼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야기.

 

"내가 성인군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서 처참한 가족사를 재현하는 베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만큼 마음이 넓은 언니였으면 좋겠다.  바꿀 수 없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걸 바꾸는 용기와, 둘의 차이를 알 만한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저 정도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운전기사 70명의 스케줄을 외우고, 인종차별주의자한테 당당히 맞서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주변 사람들처럼 정신지체인은 신이 내린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292)

 

레이첼에게는 언니 로라와 11개월 차이의 동생 베스, 남동생 맥스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한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엄마가 전과자인 남자와 재혼을 한 후 레이첼은 학교 기숙사로, 맥스와 로라는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베스는 엄마와 함께 떠돌게 됩니다.  가정폭력의 성향이 있던 엄마의 새 남편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베스는 다시 어버지에게 맡겨집니다.  베스를 차에 태우고 출퇴근을 하던 아버지는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쳐가고 어느 날 베스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스는 그곳을 나와 독립을 합니다.  베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마을을 여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작가이자 대학 교수인 레이첼은 언제나 바쁜 생활입니다.  베스를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딱 1년만 자신과 함께 버스 여행을 하자는 베스의 제안에 레이첼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베스에게는 하루하루가 독립기념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생의 절반을 살기까지는 독립기념일과 거리가 멀게 지냈고, 이후로 인생의 4분의 3 지점까지는 흡사 반군(叛軍) 간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인생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이 있다는 결의를 날마다 새롭게 다지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베스의 이런 면이 좋다.  베스는 선택권의 횃불을 당당하게 지켜든 용감한 전사인 셈이다."    (p.227~p.228)

 

연인이었던 샘과 헤어진 후 느꼈던 외로움과 절망에서 비롯된 레이첼의 약속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는 베스를 뒤쫓는 것도, 버스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베스를 이해하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베스를 지켜보는 것도 레이첼에게는 버겁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도 좋은 언니가 되는 가이드북을 언제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립심이 무언지 가르쳐줄 수 있게.  아끼는 마음과 구속하려는 마음 사이에 경계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게."    (p.237)

 

38살인 베스는 버스 여행을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때로는 그녀를 무시하는 승객들과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하지만 베스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버스 노선과 스케줄을 외우고 자신을 좋아하는 버스 기사를 기억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버스를 갈아탑니다.  베스와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레이첼도 그들과 친구가 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버스 기사는 베스에게도, 레이첼에게도 삶의 진실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배꼽을 쥐며 웃고 있는 베스의 얼굴을 쳐다본다.  베스는 지금까지 많은 절망과 공포를 겪었지만 자기연민의 표정을 지은 적은 없다.  단 한번도 그 비슷한 표정조차 지은 적이 없다.  그래.  자기연민부터 없애기 시작해야겠다."    (p.315)

 

"파란 버스의 주인공 멜라니는 오래전에 가까운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 통화를 했던 친구인데, 30분 만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분 뒤를 짐작할 수 없는 게 인생이에요.  나만 하더라도 저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걸요?  그러니까 친구가 되자 이거예요.  많이 베풀며 살자 이거예요."  나는 그 말을 내 기억의 수첩에다 적는다.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멜라니의 말이 다시 뇌리를 때린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    (p.317) 

 

언니라는 이름은,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그 말 속에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 말 속에 마땅히 담겨야 할 사랑을 철저히 외면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레이첼은 어른이 된 베스의 몸을 간지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사랑을 다시 불러오려는 것처럼.  나도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가족 간의 사랑을 영영 멀리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혀진 사랑을 되찾기 위해 나도 언젠가는 낡은 버스를 타고 익숙한 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베스와 레이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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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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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직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조직원은 열이면 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 의견의 배후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크면 클수록 통일된 의견을 취합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고자 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편법과 권모술수만 난무하게 된다.

 

서울대 물리학과의 김대식 교수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 형제가 대담 형식으로 엮은 <공부 논쟁>은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이런 까닭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이 책의 내용에 나는 왜 적극적으로 수긍하지 못했을까?  형제이면서 둘 다 교수 직함을 갖고 있는 두 명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일까, 아니면 그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오는 열등의식일까?  나는 리뷰를 대신하여 내가 느꼈던 불편함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첫번째 의문은 모든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할 때 타 조직과의 비교는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을 미리 말하자면 '노(no)'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현실을 타 국가의 그것과 비교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 발전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그렇게 되는가.  예컨대 부모님이 자신의 아이를 자극하여 발전을 도모코저 할 때, 소위 '엄친아'와의 비교를 밥 먹듯이 하지만 과연 아이가 '엄친아'에 근접하거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엄친아'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좌절감과 패배의식만 심어주지 않던가.

 

"일본의 장인 씨스템이 독일의 대학 씨스템을 만나 일본 과학의 발전을 일구어냈다면, 우리나라는 선비문화가 그대로 대학문화로 이어졌어요.  조선시대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장원급제도 해야 하지만 좋은 서원 출신일 필요가 있었잖아요.  이게 지금 우리나라의 학벌로 연결되는 거죠.  어느 대학 출신.  미국 박사라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공부로 끝장을 보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공부가 항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인 게 문제예요."    (p.173~p.174)    

 

두번째는 잘못된 역사의 순환고리에서 그 사슬을 끊을 자신감과 실천의지는 문제점의 파악만으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문제점의 인식과 실천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조직원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때로는 조직원들로부터의 욕설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즉, 문제점의 파악과 인식만으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러나 대학 내부의 껄끄러운 제반 문제들, 엘리트주의의 한계와 우리나라 공교육 씨스템의 문제 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문제들을 언제까지 지적만 하고 있을 것인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주체(학생, 교사, 학부모)의 통렬한 반성과 실천 의지가 아닐까.  그것이 없다면 역사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공부, 엘리트, 탁월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장원급제 DNA와 장인 DNA의 차이, 과장된 이공계 위기, 영재교육의 문제점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논의는 자연스럽게 비평준화 시대의 경기고와 현재의 특목고로 상징되는 엘리트주의의 한계로 모아졌고, 고교 평준화, 대입 단순화, 서울대 개혁이라는 대안으로 이어졌습니다."    (p.10)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타 조직과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야 될 문제는 비교하는 대상을 비교 당하는 대상이 비교를 통하여 우상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조직원의 자격으로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비록 이런 더러운 곳에 속해 있지만 적어도 문제점을 말하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깨끗하다.'는 자기변명이나 자기합리화는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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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대한 변명 - 이야기꾼 김희재가 전하는 세월을 대비하는 몸.마음 준비서
김희재 지음 / 리더스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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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희재 작가의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몸이 천 냥이면 귀가 구백 냥'이라고 정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맛깔나는 대사를 잘 옮겨놓았는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흔한 대화도 귀가 좋지 않으면 이렇게 실감나게 옮길 수는 없다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습니다.  대사를 위주로 쓰는 시나리오 작가라서 그럴까요? 

 

사실 이 책은 나이 들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닥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가의 적절한 대사 발췌와 그 상황에 대한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들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곳곳에서 듣게 되지만 사실 예전보다 오래 산다는 게 축복일까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노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갈수록 악화될 테니까요.  그런 환경에서는 더이상 살기 싫다며 박차고 나와 노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따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작가도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테구요.  잘 좀 봐달라고.

 

"누구에게나 절대 공평 사항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흔적을 남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가 뿌리고 간 흔적은 대체로 힘들고, 아프고, 추접스럽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 뿐입니다.  젊은 자식과 후배들은 나이 든 부모와 선배의 추접함이 개인의 불결함이나 게으름, 혹은 낙후된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p.9)

 

나이가 들수록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 세고 독선적인 성향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얼마 전 들렀던 처갓집에서 저는 작년과는 많이 변한 장인어른의 모습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인근의 산을 오르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던 분이셨는데, 이제는 한 손에 TV 리모콘을 꼭 쥔 채 안락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거나 그것도 지치는지 가끔 졸다 깨다 하셨습니다.  아내는 그게 못마땅했는지 아들놈에게 '할아버지는 사람을 잃고 대신 TV를 독차지했다'고 말하더군요.

 

작가는 뽀글이 파마, 여자의 화병, 배불뚝이 아저씨, 남자의 눈물, 깜빡거리는 기억력, 고약한 입 냄새 등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유쾌한 필치로 펼쳐보임으로써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아득히 먼 미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금방이다'라고 백 번 반복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변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노화의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던 예전 대가족 문화와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거 할아버지 방에 좀 갖다 드려."

"싫어, 엄마가 가."

"엄마 지금 바쁘잖아."

"싫어 할아버지 방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 그래!"

"방에서도 나고 할아버지한테서도 난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도 할아버지 노인학교 가시면 매일 창문 열면서 '아우, 냄새야!' 그러잖아!"       (p.190)

 

작가가 들려주는 열아홉 편의 이야기는 중,장년의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얘기인 양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또 그 속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마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사로 시작하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시 한 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세월에 보내는 연가>가 그것이지요.

 

누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월을 거슬러 젊어질 방법 또한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순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것도, 무작정 이해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수용하고 견딜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그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요.  몸으로 겪지 않으면 미처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말이죠.

 

"마음이 몸의 노화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맞춰주고, 몸이 마음의 성숙을 기다려줄 만큼 속도를 조절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빌려 쓰고, 떠나는 날에 땅에 두고 갈 내 몸과 다투지 않고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부러지고 무너지며 다투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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