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꽁꽁 숨겨둔 채 실컷 변죽만 울리다가 그냥 돌아섰던 기억, 혹시 있으신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게도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의 수줍은 고백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할
말 못하고 애면글면 속만 끓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말입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언제 어느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자유는 청소년기에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참
순진하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저보다 더 순진한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에게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책에서는 속 시원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책이 어른이 된 후에도 많은 위안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제게는 그야말로
신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논리는 없고 오직 이념만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따금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책들이 출간되기도 하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겠지요.
무슨 말만 하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이 모든 논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대한민국에서는 말할 수 있는
자유보다 쓸 수 있는 자유가 더 폭 넓게 보장되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