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꽁꽁 숨겨둔 채 실컷 변죽만 울리다가 그냥 돌아섰던 기억, 혹시 있으신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게도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의 수줍은 고백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할 말 못하고 애면글면 속만 끓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말입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언제 어느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자유는 청소년기에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참 순진하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저보다 더 순진한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에게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책에서는 속 시원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책이 어른이 된 후에도 많은 위안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제게는 그야말로 신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논리는 없고 오직 이념만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따금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책들이 출간되기도 하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겠지요.

 

무슨 말만 하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이 모든 논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대한민국에서는 말할 수 있는 자유보다 쓸 수 있는 자유가 더 폭 넓게 보장되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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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면도 확실히 있네요.^^
그런데 책에도 아직 그 경계는 있는듯해요.
나쁜책 좋은책 ..하며..표현에 대한 고르기 랄까..
언어 등급이 있는것 같다고 느끼는 적도 있어요.
약간 더 나가면 외설처럼 빼버리고, 확 나가지
못하는 애매한 선 위에 문학이 있는건 아닌가...
할 적이 있거든요.ㅎㅎㅎ

꼼쥐 2016-01-15 14:46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유교적 전통이 오랫동안 지켜져 온 우리나라에서 서구나 일본처럼 적나라하게 쓴다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책이 좋은 것 같아요. 누구를 붙잡고 대화하다가 괜한 소리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장소] 2016-01-15 2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거침없는 표현이나 그 아슬한 경계를 문학이 대변해주기도 하죠.저도 그래서 책이 도피의 혹은 우회의 수단이라고 늘 생각하는 1인 입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1-14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요
그래도 가끔은 출판계에도 기득권 세력이 그들만의 홍보와
텃새 나아가 끼리끼리 표절도 묵인해 주는 나쁜 관습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 까요?

꼼쥐 2016-01-15 14:48   좋아요 1 | URL
작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죠. 어디 그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다만 그분이 유명한 죄로 시범케이스가 되었겠죠. 출판계도 의외로 좁아서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 경우가 많았겠죠. 당연히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초딩 2016-01-15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로세움의 던져주는 빵을 게글스럽게 먹느니, 담장아래에서 참을 인자 세번 쓰며 책을 읽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백년에 한 번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구요. 딱히 바라진 않지만 :-)

꼼쥐 2016-01-15 14:50   좋아요 2 | URL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작금의 세태를 정확하게 짚어주는...